2023년도 이아 레지던시 작가들의 작업 세계 들여다보기
아티스트 레지던시라고 부르는 예술지원 서비스가 있다. 예술가들에게 작업공간을 제공하여 창작을 돕는 지원 사업의 한 유형이다. 앞으로 연재하게 될 글은 2023년도 이아 레지던시 공간에 입주하였던 6명의 작가의 이야기이다. 비록 레지던시는 끝났지만, 예술가들은 자발적으로 모여 서로의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자 한다. 감사하게도 ’문화공간 양‘에서 모임 공간을 지원해 주어 한 달에 한 번 <작가읽기> 만남을 갖고 있다.
세 번째 만남 (6월14일). 신미리 작가의 이야기
감각과 인지
어릴 때 겪은 사고로 생긴 흉터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의 변화를 생각하면서 첫 번째 영상작업을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놀라거나, 놀리거나, 걱정하거나, 신기해하거나, 그런 시선들을 경험했었고, 성인이 된 후에는 못 본 척하는 시선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 시선의 변화 속에서 신체에 대한 의문점들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무렵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를 정말 열심히 봤다. 불안정하고 나약한, 끝없이 부패를 향해 가는 신체를 버리고 기계 몸을 받기 위해 우주여행을 하는 철이와 그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삶에 대한 물음들에서 나는, 생명으로서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의 신체는 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가, 유한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많이 했었다. 신체를 이용한 테트리스 영상 작업은 이런 질문 속에서 만들게 된, 대학을 졸업하던 시기에 했던 작업이다. 이 영상에는 신체를 부정하는 여러 개의 층위가 있다. 감각적인 부분, 인식적인 부분, 그리고 유희적인 부분에서도 신체는 부정된다. 사실 내가 이 작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 당시 나의 고민들을 이제 조금씩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다.
<유기 놈> 작업을 하던 시기에는 자연사 박물관에 많이 갔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종류의 생물을 보면서 형태의 다양성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 처음에는 모두 하나의 형태였을 것이다. 그러다 형태는 구체화되고 다양해진다. 말하자면 진화가 이루어진다. 어제는 오늘과 다르고 생의 의지는 초월적이다. 변화는 필연적이다. 그리고 변화에 대한 적응 속에서 돌연변이들이 나타난다. 사실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적응을 한 돌연변이는 새로운 길을 만든다. 난 박물관의 포르말린 용액에 들어 있는 돌연변이를 보면서 궁금했다. 신체는 의지의 발현에 대한 증거인 걸까.? 진화에서 경향성을 유추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유기놈>은 돌연변이에 대한 내가 혼자 만들어 낸 가설로부터 시작했다. ‘돌연변이는 생존을 선택하지 않았다.’라는 가설이다. 돌연변이가 생존을 포기 함으로써 얻게 된 신체적 자유가 <유기놈>의 주제이다.
파동
매체에 대한 관심은 비디오 작업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장비들이 다 디지털화되어서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식의 문제가 되었지만 비디오 작업을 처음 시작하던 때에는 아날로그 테이프에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그때에는 카메라는 신체의 기관을 대신하는 장치라고 생각했다. 카메라는 사람의 시선을 모방하고 우리가 보는 세상을 모방한다. 이런 카메라의 작동 방식에 대해 생각하면서 사람 눈과 카메라의 눈의 차이 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사람은 어떻게 3차원을 인식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기계의 눈은 전체를 한 번에 스캔하는 반면, 부분 부분의 이미지 조각들을 모아서 머릿속에서 기억을 통해 조합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빛으로 3차원을 기록하는 방법에 관심이 있어서 홀로그래피 작업을 했었다. 홀로그래피는 사진과는 다르게 빛의 파동성질을 이용한 기록 방식이다. 그 당시 파동에 대한 여러 현상들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당시 교수님은 파동으로 이루어지는 물질 세상의 가능성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들을 이야기해 주셨는데, 문득, 인간은 세상을 왜 5개의 감각 영역으로 구분하여 인지하도록 진화하였는지, 그리고 인간과는 다른 감각기관을 갖고 있는 생명체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등의 질문을 했던 거 같다.
이상한 측정 행동
그동안 작업을 안 하고 있었다. 작업으로 이야기할 주제가 없다고 생각했었고, 스스로 나는 작가는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개인적인 어떤 사건들을 겪으면서 스스로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작업을 다시 하게 되었다. 시작은 불안감이었지만 이런 증상이 질병으로 분류가 되기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측정의 행위들을 보면서 어떤 허망함 같은 것을 느꼈던 거 같다. 측정의 결과로 얻게 되는 것은 다양한 수치들이었다. '이 숫자들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숫자들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하지만 숫자는 또 다른 현실의 증거가 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측정 행위들과 숫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내가 느낀 기괴함에 대해, 허망함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고 작업은 나에게 도피처이면서 안전지대가 되었던 거 같다.
작업 안으로 끌고 들어 온 기괴한 측정 행위는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를 재는 측정 행위였다.
주변의 낯선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거리를 재고 그 수치들을 기록하였다. 그 수치 안에 포함된 당시의 감정들을 분류하고 기호화하여 드로잉으로 옮겼다. 숫자들을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내용으로 변환하는 작업이었다.
작업 안으로 끌고 들어 온 기괴한 측정 행위는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를 재는 측정 행위였다.
주변의 낯선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거리를 재고 그 수치들을 기록하였다. 그 수치 안에 포함된 당시의 감정들을 분류하고 기호화하여 드로잉으로 옮겼다. 숫자들을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내용으로 변환하는 작업이었다. 사람들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일은 평소에는 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 행위를 전시장 안으로 가져오기 위해 센서라던가, 거리에 따라 바뀌는 숫자, 벽의 색, 소리 등의 장치를 사용했다. 전시장에 거리를 재기 위해 앞 뒤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져오고 싶었다. 이유는 비일상적인 모습이 전시장에서는 허용되는 그런 미술 전시의 오묘함을 이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기괴한 일들이 미술의 영역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라고, 그래서 지금 이 모든 건 전혀 문제가 아니라고 나에게 안심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거리 재기 작업의 마지막 작품은 국가별로 사람들 사이의 친밀도에 따라 거리 평균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업이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목적과 필요에 의해 측정을 하고 사회문화적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연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연구에는 국가별로 양상이 다르다는 측정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국가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인지, 국가와 상관없이 개인별로 다른 결과를 나타 낼 수 있는 요인도 존재 하는지 등의 내가 궁금해하는 내용은 연구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연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나는 원인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인을 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원인은 없다. 그리고 원인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작업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에는 원인보다는 좀 더 현재를 보게 되었 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나의 기괴한 사건들과, 나의 작업들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관객이 참여하여 벽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작업은 유희에 대한 작업이다. 각 나라별로 측정된 사람들 사이의 친밀도를 나타내는 수치들. 그 길이만큼의 고무줄에 연필을 연결하고 동그라미를 그리게 되는 데, 고무줄이라서 사실 관객 마음대로 그릴 수 있게 된다. 물론 고무줄의 길이 보다 더 늘려서 원을 그리 려면 힘을 가해야 하지만 충분히 마음대로 그릴 수 있다. 여기서의 수치들은 나에게는 허망함을 넘어서 가지고 놀 수 있는 유희의 대상이 되었다.
거리 재기 작업의 시작은 사실 좀 오래전에 한번 시도되었었다. 그 당시에는 거리를 잰 수치만큼의 공간을 재현하는 문제에 있어서 소리를 통해 공간을 경험하고자 했었다. 그 당시에는 소리에 대해 관심이 많았었고 특히 소리 파장의 물리적인 전달 방식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피에조라는 진동 마이크를 이용해서 종이 스피커를 만들었고, 옛날에 종이컵에 실을 매달아서 전화기처럼 사용했던 그런 감성으로 멀리 있는 소리를 듣고자 했었다. 그런데 사실 그때의 작업이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았고, 그래서 미완성의 느낌으로 작업이 끝난 것 같다.. 사실 이번에 한 거리 재기 작업도 마찬가지로 미완성의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설치를 해보고 싶다.
피드백 대화 기록
관심의 대상이 기계라기보다는 장치에 더 가깝다. 이미지 장치.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미지는 언어에 비견하여 폄하되는 부분이 있는데, 현대에 와서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생각하게 함. 느슨한 저항으로서의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소마트로프의 이미지 장치, 플라톤의 미메시스를 떠올리게 함. 사운드를 소리라기보다는 소리와 이미지의 결합으로 볼 수 있는데, 이미지의 확장이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이다. '거리 재기'작업도 이미지 장치로 읽어 낼 수 있었다. 좀 더 복합적인 감각을 만들어 낸다. 이런 이미지를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 이미지 저항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현대 미술에서 작품은 작가에 의해 1대 1 대응 방식으로 생산되는, 사색의 대상으로서의 전통적 미술 방식을 떠나 다차원적인 기록 방식으로서 의미가 있다. 보리스 그로이스의 '프로젝트 외로움 (The Loneleness of the project)'에서 제시하는 동시대 미술의 다차원적인 기록 방식으로서의 시각 이미지에 대한 개념과 함께 이해될 수 있을 거 같다.
전시를 꺼려하는 이유? 작업을 안 하려고 하는 이유?
전시장에 대한 불편함과 거리감이 있다. 작품이 전시 장에 걸렸을 때 박제된 곤충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스스로 작가는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성격적으로 예술가는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은 예술가는 아닐 수 있는데 감각은 있는 거 같다. 여러 가지를 다 해보고 다시 돌아오셔도 될 거 같다.
편한 매체와 편한 공간에서 작업을 계속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 개인적으로 해결하셔야 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
<작가 읽기>는 매달 한번씩 '문화공간 양'에서 진행됩니다. 참석을 희망하는 시는 분은 댓글 달아주시면 일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신미리작가님을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여기로! -> @mir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