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프롤로그: 왜 안정적인 제약회사를 나왔나
제약회사라는 곳은 묘하다. 밖에서 보면 하얀 가운을 입은 지성인들의 집합소 같지만, 안에서 겪은 나는 그저 거대한 기계의 녹슨 나사 하나 같았다.
내 책상 위엔 항상 두꺼운 SOP(Standard Operating Procedure; 표준 작업 지침서)가 놓여 있었다. 제약 업계에서 SOP는 헌법이다. 창의성은 죄악이고, 매뉴얼 준수는 미덕이다. 약을 만드는 일이니 당연하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에 "음, 오늘은 장비를 좀 힙하게 다뤄볼까?"라는 시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 오늘과 똑같을 내일. 정해진 프로토콜대로 움직이는 삶. 통장에 찍히는 월급은 달콤했고, 부모님은 "안정적인 직장 다녀서 좋다, 너가 제일 효자다"며 안심하셨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안정감은 마약성 진통제와 같다는 것을. 통증만 못 느끼게 할 뿐, 내 커리어의 근육은 서서히 위축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퇴사를 고민하던 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가 말했다는 '후회 최소화 프레임워크'를 떠올렸다. 거창한 경영 이론 같지만, 요약하면 이거다.
"나중에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지금 이 결정을 후회할 것인가?"
상상을 해봤다.
시나리오 A: 이 지루한 업무로 꾸역꾸역 커리어를 쌓고 정년 가까운 시기까지 다닌다. 안정적으로 미국주식 투자하고, 적당히 승진하고, 적당히 나이먹고, 턱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을 붙잡고 월 500-600 받고, 훗날 수십년 지난 뒤 뉴스를 본다. 새로운 신약연구 매커니즘, 나의 상식 바깥에 있는 완전히 바뀐 헬스케어 시스템. 그때 나는 생각할 것이다. "아, 그때 나도 저 물결에 올라타 볼걸. 쫄지 말고 한번 해볼걸."
시나리오 B: 지금 당장 퇴직원을 던진다. 코딩이라곤 'Ctrl+C, Ctrl+V' 밖에 모르는 문과 같은 이과생이 AI를 배우겠다고 덤빈다. 당연히 망할 수도 있다. 모아둔 돈을 다 까먹고, 다시 중소 제약회사 생산팀/품질관리팀 막내로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20년 뒤의 나는 적어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도 그회사에서 하던 일을 아직도 하고있다 생각하면 좀 무섭네."
결론이 났다. 나는 실패할 확률보다 후회할 확률을 더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팀장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일한지 1년밖에 안 된, 가장 일 열심히 해야 할 시기의 막내가 가장 먼저 나간다고 안 좋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이렇게 빨리 나갈거면 왜 왔냐는 말을 듣지는 않을까.
"학업이랑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요. 다음 달에 그만해야겠습니다."
"그래요. 그동안 너무 열심히 잘해주셨기 때문에 마무리하는 절차에는 문제 없을거에요."
"바이오 쪽에서 오래 일하려면 학업 더 하시는 게 맞죠."
우리 팀장님은 대왕 T다.
mbti 네 글자가 전부 TTTT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로봇 같은 분이 저렇게 말해줬다는 것은 나의 심금을 충분히 울리고도 남았다. 오죽하면 저 말을 들은 찰나의 순간 '나가면 공부 진짜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라고 생각했을까.
나에게 주어진 남은 일들을 하나둘씩 처리하며 한 달을 다녔다. 이제 '갈 사람'이라는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지자 바쁜 시기에도 나에게 더 이상의 업무가 들어오지 않았다.
사직 처리가 완료되고 마지막 근무일, 빛바랜 사원증을 반납하고 엘리베이터와 회전문을 걸어나왔다. 목에 걸려 있던 묵직한 플라스틱 카드가 사라지니 목이 시원해야 하는데, 오히려 허전했다. 소속감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이제 나는 'OO제약 사원'이 아니다. 그렇다고 '개발자이거나 연구원 미르'도 아니다.
나는 그저 5등급 인생, 재수 경험으로도 한 번 벗어나지 못한 국평오 중의 국평오, 특별한 재능 하나 없는, 통장 잔고는 유한하고, 내 머리의 한계는 무한해 보이는, 리스크 덩어리.
하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은 가벼웠다. 더 이상 남이 써준 SOP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 이제부터 내 인생의 코드는 내가 직접 짠다. 비록 그 코드가 버그 투성이에, 실행할 때마다 에러를 뿜어낼지라도.
이 이야기는 멋진 성공 신화가 아니다. 마이크로피펫을 놓은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매일같이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는 '보통 사람'의 처절한 생존 기록이다.
지금부터, 나의 에러 로그(Error Log)를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