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바이오 전공자가 갑자기 코딩?

Part 1. 프롤로그: 왜 안정적인 제약회사를 나왔나

by 미르

바이오 관련 학과를 졸업하면 드라마나 영화 속 과학자가 되는 줄 알았다. 하얀 가운을 입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인류를 구원할 신약을 개발하는 모습. 하지만 현실의 나는 엑셀 막노동꾼에 가까웠다.


전문대 졸업생 신분으로 제약/바이오 업계에 발을 들였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거대한 벽이었다. 작은 꼬마인 나에게는 아주 아주 거대한 벽이다.


학력이라는 이름의 유리천장: Wet-Lab의 현실

10명 중 9명의 공부하고 대학 간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있는 거 아닌가?", 또는 학력요건이 중요하지 않은 업종의 사람들에게는 "그게 살면서 꼭 필요한가?" 싶겠지만 나에게는 2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한, 아주 아주 중요하고도 넘기 번거로운 벽이다. 바로 학사학위다.

다른 이에게 ‘당연히 있는’, 혹은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게 나에게 없다는 사실이 상당한 걸림돌이었고 상당한 고통을 선사했다.


물론 없어도 지금 당장 돈 버는 데 지장은 없다. 하지만..

자격요건: 학사 이상
우대사항: 석사 우대

제약회사 연구소 채용공고 100개 중 90개는 이렇게 써 있다. 나머지 10개는 석사 이상 박사 우대다.


이젠 공고에 이런 거 써있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이런 식으로 써 있어도 대부분 석사 이상이 채용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흔히 실험실을 'Wet-Lab(젖은 실험실)'이라고 부른다.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고, 세포를 배양하기도 하고, 어떤 곳은 실험동물을 다루기도 한다. 이곳의 생태계는 냉정하다. 연구를 주도하고 실험을 설계하는 '연구원(Researcher)' 타이틀은 최소 석사(Master), 보통은 박사(Ph.D)들의 몫이다.


그렇다면 전문학사 출신인 나는 대부분 생산(PR)이나 품질관리(QC) 부서에서 단순 반복 시험을 수행하는 테크니션의 역할보다 더 단순한 업무들에 머문다. 내가 하는 일은 '연구'(=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가 아니라, 박사님들이 설계한 제조공정과 작업지침에 따라 장비를 돌리고 문서를 생산하는 '오퍼레이팅'(=기존의 짜임새대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나마 위에 서술된 업무도 전문학사 출신이 채용되기 힘든 업무다. 왜냐하면 생물 관련 전공을 한 4년제 학사학위 보유자들이 더 널렸기 때문이다.
전문학사 출신은 이것보다 더더욱 단순하고 반복적인 생산업무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흔히 미디어에서 보는 하얀 가운 입고 마이크로피펫 들고 일하는 업무랑 거리가 먼 업무들이다.


매일 수백 행의 데이터를 복사하고 붙여 넣었다. 펜 수기로 작성된 문서를 보존하기도 해야 해서 가운데 손가락 관절도 남아나질 않았다.

그 데이터들의 의미를 해석할 권한은 없었고, 그저 숫자가 튀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데이터를 만들고 저장하고 검사받고 서명받고, 다음날도 숫자가 튀지 않기를 기도하고 데이터를 만들고 저장하고 검사하고 서명받는 기계적인 삶.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일하며 보내야 할 백세 시대에, 내 커리어의 정점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학부 3학년으로 편입해서 +2년을, 석사학위까지 +2년을, 박사학위까지 +3년 +α (= 7년 +α)을 투자할 돈도, 시간도 없었다. 학력이라는 계급장을 떼고 오직 '실력'으로만 승부할 수 있는 곳은 없을까?

학력 = 계급장이라는 프레임은 옳지 않은 접근이지만, 이 업계에서는 머리와 펜으로 얼마나 공부해 보았는가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연구 경험'이라 함은 곧 특정 주제에 관련해 얼마만큼 논문을 읽어봤는가, 그 주제에서 학계에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가설을 검증해 보았는가, 그 검증을 위해 어떤 실험을 해봤는가, 그 실험을 하면서 어떤 장비를 사용해 보았는가, 그 장비를 다루는 테크닉이 얼마만큼 익숙한가 가 모두 집약된 표현이다.
따라서 대학원 환경에서 연구를 직접 해보지 않고는 위 경험들이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혼자서 '연습'하고 혼자서 '수련'하는 것이 안 된다는 의미다.
즉, 바이오 도메인의 연구실에서 일하기 위해 석사, 박사학위 계급장은 어찌 보면 필수불가결하다.


바이오(Bio)와 테크(Tech)의 교집합을 발견하다

방황 중에 눈에 들어온 단어가 '통계(Statistics)와 데이터(Data)'였다.

제약회사는 데이터의 광산이다. 임상 데이터와 의학통계, 유전체 정보, 단백질 구조예측, etc... 하나의 조직에서도 매일 테라바이트급의 데이터가 쏟아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데이터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생물 박사님들은 생물학적 메커니즘에는 통달했지만, 수만 개의 데이터를 파이썬(Python)으로 자동화해서 분석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반대로 IT 개발자들은 코딩의 신이지만, '기전(Mechanism)'이나 '단백질 구조'같은 말만 들으면 도망가는 것이 현실이다.


머릿속에 전구 스위치가 켜졌다. "내가 이 중간 지점에 서면 어떨까?"

나는 비록 코딩은 모르지만, 적어도 데이터의 '맥락(Context)'은 안다. 이 데이터가 왜 튀었는지, 실험 과정에서 오염(Contamination) 같은 것이 있었는지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있다. 여기에 코딩 기술만 얹는다면?

'개발할 줄 아는 바이오 전공자'. 이것은 바이오 업계에서는 희귀종이고, IT 업계에서는 독특한 캐릭터가 된다. 레드 오션에서 치고받고 주먹다짐하며 경쟁하는 대신, 나만의 작은 블루 오션을 만들 수 있겠다.


ICR-mouse를 놓아주며

국평오(국민 평균 5등급) 중에서도 국평오, 일반인 중에서도 일반인인 내가, 수학과 논리의 결정체인 프로그래밍을 배운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제약회사 제조소의 부속품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남이 설계한 실험을 대신 수행하는 손이 아니라, 데이터를 통해 새로운 인사이트를 설계하는 머리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결심했다. 하얀색 털을 가진 실험용 ICR-mouse를 놓아주고, 책상 위의 검은색 로지텍 마우스와 키보드를 꽉 쥐기로.


내 손끝에서 탄생할 결과물이 더 이상 '단순 반복의 결과'가 아닌, '논리와 창조의 산물'이 되기를 꿈꾸며 퇴직원 결재 서명을 갈긴 그 순간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낮은 스펙이 절대 아니다. 제로 스펙이다.

이렇게 나의 화려한(?) 과거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다.


대학교 전공 수업 때, PCR 실습을 하면서 그 비싼 시약을 엎질러 지도교수님께 등짝을 맞아가며 실험을 배웠고, HPLC(고성능 액체 크로마토그래피) 실습을 할 땐 기계가 뱉어내는 피크(Peak) 하나에 울고 웃었다.


지난 동물실험 데이터 추출을 하기 위해 혈액분석기를 돌려놓고, 실험실 옆방 사무실 의자 2개를 이어붙여 쪽잠을 자다가 키우던 세포에 문제가 생겼다며 새벽 3~4시에 누가 깨워도 불만 한 마디 내뱉지 않고 차분하게 커피 한 모금 마신 뒤 세포실을 들락날락하기도 했다.


3월 말부터 4월 중순에 남들 벚꽃 보러 갈 때에도 벚꽃 명소, 트렌드 그런 거에 관심 없었다. 실험실에서 또 다른 미니 프로젝트를 만들고, 일을 크게 벌이면서 피펫팅과 동물실험 투여 연습을 체감 수만 번 반복했다.


졸업 후엔 제약회사의 GMP. 먼지 한 톨 허용하지 않는 클린룸에서 무균복을 입고, 발걸음도 천천히, 숨도 조심조심 쉬어가며 장비들을 돌리고 수십, 수백 장의 시험기록서를 써나갔다.


하지만 이 자랑스러운 경험들은 IT 업계로 넘어오는 순간, 완벽한 휴지조각이 되었다.

작은 불씨 한 톨에 불이 번져 금방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릴 마른 휴지조각.


내가 쌓아온 탑을 유기하고 다른 나라에 와서 새로운 탑을 또 쌓으려니까 막막하다. IT 업계로 발을 들이려는 순간 그저 '쓸모없는 기술을 가진 비전공자'일 뿐이었다. 다른 곳에서 경력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에서 '국평오'인 내가 빠르게 기술들을 습득하고 개발자 세계에 기웃거려도 되는 걸까?


구글, 유튜브, 커뮤니티, 개인 블로그 등등에 입문 개발자의 사례들을 검색해 보면 '비전공자 출신 개발자, 비전공자 데이터분석가 성공기'가 넘쳐난다.

클릭해 보면 대부분 이런 식이다.

'비전공자(서울대 경영학과)의 대기업 합격 수기', '수포자 문과생(연세대 경제학과)의 인공지능 대학원 진학 합격 비법 공개'.

그들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들의 '비전공'과 나의 '비전공'은 질량 자체가 다르다. 그들은 이미 학습 능력이 증명된 똑똑한 양반들이고, 나는 대한민국 표준, 좋게 말해 평범하고 솔직히 말해 어중간한 '국평오 수드라' 출신이다.


나의 CV를 IT업계의 시점에서 냉정하게 해부해 보자.

컴퓨터공학 학위 없다.

코딩 관련 자격증이나 포트폴리오도 없다.

수학적 사고력 없다. 그나마 공부했던 바이오 전공도 타 전공보다 수학적 사고력을 덜 요구한다.


이렇게 나의 커리어를 남의 실험대가 아닌 나의 모니터 앞에서 이어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