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프롤로그: 왜 안정적인 제약회사를 나왔나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은 묻는다.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미국 드라마 <Suits> 한 편과 커티삭 한 잔을 조지고 깊은 고뇌에 빠진다.
인생의 큰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때 이만한 방법도 없다. 잠시 머리를 비우고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한 편 때리며 저농도의 알코올 투여하기.
여기서 반드시 지켜야 할 포인트는 절대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맥북 모니터 화면 속, 새까만 터미널 창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도 물었다.
"어찌, 내가 개발자가 될 상인가?"
내 머릿속의 자아가 하는 대답은 단호했다.
"전혀. NEVER."
두-둥!
_人人人人_
> 돌연사 <
 ̄Y^Y^Y^Y ̄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이자 기반적 요소.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이유로 죽는다. 저 사인들 때문에 개복치는 아직까지도 쉽게 죽는 동물이자 멸종되어야 마땅한 동물이라는 잘못된 오명을 쓰게 되었으며, 어이없게 죽거나 파괴되는 것에 대한 대명사가 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살아남아라! 개복치'
"삽질(Trial and Error)을 두려워하지 않는 끈기."
세포 배양 실험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24시간, 48시간을 꼬박 기다려 결과를 확인했는데 세포가 다 죽어있을 때의 그 허탈함, 오염(Contamination)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혼란, 왜 죽었는지 모를 때와 그 생화학적 기전을 밝힐 수 없을 때 느끼는 나의 무능력함.
게임 <살아남아라! 개복치>를 하드모드로 플레이해 본 사람은 간접적으로 이 느낌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에이, 안 해야지" 하고 때려치우고 싶은 상황은 세포실에서 아주 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배지를 만들고, 배양기 온도와 이산화탄소 농도를 확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GMP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는 또 어땠는가. 오탈자 하나, 서명 누락 하나 용납되지 않는 그 숨 막히는 규정 속에서도 나는 꾸역꾸역 페이지를 채워냈다. 오탈자 하나 때문에 문서 수십 장을 수기로 다시 쓰기도 했다.
언제 한 번은 원인 모를 시험 데이터 특이점(숫자가 너무 높거나 너무 낮게 튄 경우)을 잡기 위해 7~8시간 동안 무균복을 입은 채로 클린룸에서 나오지 않고, 같은 시험을 퇴근시간 한참 지나서까지 반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기억도 있다.
코딩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 경험은 쓰이지 않을까?
에러가 나서 빨간 글씨가 화면을 뒤덮어도, 코드가 내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원인을 찾아내는 것.
나에게 '컴퓨터 과학 학위'는 없다. '수학적 머리'도 없다.
하지만 나의 엉덩이는 무겁다. 난 내 둔근의 스트렝스를 아주 높게 평가하고 나의 신체 부위에서 가장 신뢰하는 부위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실패를 견디는 '엉덩이의 힘', 그리고 답이 나올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미련하고 집요함'. 이거 하나만 믿고 못 먹어도 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면 되지. 내 무기는 끈기다."
천재도 아닌 일반인이 3초 만에 짜는 코드를, 나는 3일을 밤새워 짤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물이 같다면, 그리고 그 3일을 버텨낼 멘탈만 있다면, 나 같은 둔재도 같은 업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에러가 해결될 때까지 컴퓨터 멱살을 잡고 늘어지는 집요함.
"그래, 나는 스마트한 개발자는 못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독한 개발자는 될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교육이나 캠프들을 찾던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광고가 있었다.
[AI 헬스케어 개발자 양성]
'헬스케어'라는 단어가 내 심장을 뛰게 했다. 그냥 '웹 개발'이나 '앱 개발'이었다면 흘겨보지도 않고 넘겼을 것이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동네 같을 테니까. 하지만 '헬스케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이야기가 다르다. 커리큘럼을 보니 익숙한 단어들이 보였다. 임상 데이터, 질환 위험 요인 분석 등등.
코딩 부트캠프에서 AI 키워드가 들어가면 거르라는 유튜버들이 많아서 처음엔 회의적이었다.
인공지능 분야도 딥러닝 머신러닝을 대학원에서 연구한 박사님들이 널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사해본 결과 그건 AI모델을 완전 태초부터 뚝딱뚝딱 만드는 ‘연구직’, 혹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일 때 이야기이고, 기존에 사용하던 모델들을 사용해서 특정 서비스를 제작하는 것은 6개월 내로 실무까지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해보면 알겠지. 의심부터 하지 말고 정주영 회장님의 말씀을 새겨듣자)
여기는 내 과거가 휴지조각이 되는 곳이 아니라, 거름이 될 수도 있겠다.
바이오 도메인 지식을 가진 내가 코딩이라는 무기를 쥐면, 남들보다 더 예리하게 헬스케어 데이터를 지지고 볶을 수 있지 않을까?
여기라면 비전공자인 나도 '스토리텔링'이 가능할 것만 같았다.
나의 모든 노동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마법의 단어처럼 느껴졌다.
"여기라면, 내 낡은 도메인 지식이 휴지조각이 아니라 자원이 될 수 있겠구나."
나는 홀린 듯이 지원 버튼을 눌렀다.
지원서 첫 줄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Wet Lab의 경험과 Dry Lab의 기술을 잇는 '개발자이기 전에 과학자'인 인재가 되겠습니다."
화려한 갑옷도, 명검도 없이 나무 몽둥이 하나 들고 ‘뉴비 환영, 너만 오면 고’ 고렙 파티에 합류하고 던전에 입장한다.
며칠 뒤, 합격 문자가 날아왔다.
그렇게 나는, 되돌아갈 다리를 불태웠다. 이제 남은 건 앞을 향해 달리는 것뿐.
드디어 입장권이 생겼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호랑이 굴인지, 곰 굴인지 모를 그곳, 코딩의 세상으로 걸어 들어갔다.
> print('Hello, World')
> Hello,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