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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Oct 05. 2022

Vol.20<CODE NAME OOO>

[기록보관소]


사서 이승주입니다.


매 순간 우리는 수많은 자아들 중 일부를 적절히 배합해서 드러내곤 합니다. 고루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독서가 취미임을 숨기는 것. 철없는 아이처럼 보일까 봐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한 마음을 감추는 것. 괜히 도마에 오를까 봐 유별난 가정사를 꽁꽁 싸매는 것. 이렇게나 애를 쓰는 이유는, 특정한 자아, 지위, 혹은 서사가 필연적으로 가치 판단을 동반하기 때문이겠지요. 한편, 그러한 현실 세계에 맞서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ooo 작가’와의 대담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결여가 주는 짜릿함이 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라이더가 폭음과 함께 활주한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스름 내리깐 도시에 주욱 선을 긋는다. 희부윰한 곡선을 따라 모든 게 이등분된다. 이름에도 이중성이 있어 나를 불러주길 바랄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이 곤욕스러운 모순을 품고 양 무릎에 고개를 얹는다. 시선만 치켜 달을 지펴 올리는 무렵을 가슴에 문지른다. 허한 속이 광색으로 충만해질 즈음 훌훌 털고 기지개를 켠다. 이 시간부로 나는 이름이 없다. 헬멧을 낀다. 빌딩풍을 비켜나며 무엇도 명명하지 않는 곳으로 향한다.


ooo 작가가 창조한 이름 없는 캐릭터, 이름 없는 공간. 이곳은 궤변을 늘어놓는 상사도, 당신을 힐난하는 악당도 없다. 그저 요상하고 알록달록하다. 페이지를 넘기는 입꼬리는 실실 나붓거리다 속살대는 감정이 차오르면 방방 울려댄다. 저편의 세계가 현실에 돛을 내리고 당신을 기다린다. 눈을 맞추면 둘러싼 낱낱이 픽셀이 된다.



Call It What You Want


필명 ‘ooo’, 언뜻 작자 미상을 나타내나 싶었다. 나란히 늘어선 동그라미를 무어라 읽을지 고민돼 말문을 사려물었다. 그것도 잠시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되겠구나 단출한 결정이 섰다. ooo 작가는 도트를 이용한 그림과 만화를 그린다. 4컷 만화집 <무슨 만화>를 필두로, <여행기>, <멘트 빠칭코!>와 같은 단행본들을 발간했고 ‘만화경’에서 2컷 만화 <AB2C>를 연재 중이다. 더불어 각종 전시와 협업 등 활발한 활동을 두루 잇고 있다.


뻗대지 않고 지글대는 선들 사이로 눅진한 시니컬함이 훅 끼쳐 든다. ooo 작가의 작품은 마주하면 ‘어, 범상치 않네?’ 싶다가 이내 깊숙이 빠져들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마음속 난전에 전시된 한심함, 허탈감, 의미불명의 고양감을 픽셀에 속속들이 담아낸다. 무어라 칭할 수 없는 우리네 일상을 기민하게 포착한다. 이제껏 느껴왔지만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이 총천연색을 발하며 눈앞에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농담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이라 표현한다. 농담 같은 진담과 진담 같은 농담의 경계를 4컷 안에 덧그리며 삶의 우연성을 채색하는 것이다.



To The Unknown World


ooo 작가의 만화에는 신원을 특정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름도, 성별도, 직업도 알 수 없다. 그 생김새까지 남다르다. 인간이지만 인간 같지는 않게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동물의 흔한 외형을 가져와 조합하다 보니 곰인가, 사람인가 싶은 캐릭터 디자인이 탄생했다. 이들은 비슷하게 생겼으나 매 화 다른 인물이며 전부 ‘oo’라고 지칭한다. 무언가를 규정하는 이름이나 설정은 편견과 고착화된 이미지를 이끌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호칭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은 만연에 도사린다. 일례로 어떤 이름은 특정 인종이 자주 사용하기에 명단만 보고 ‘이 사람은 흑인일 테지.’ 단정 짓게 되는 상황이 있다. 이런 불필요한 가치판단을 피하고자 그는 필명처럼 작품 내부까지 익명성을 띠게 했다. 선입견에서 벗어난 ooo의 캐릭터들은 누구든 될 수 있다는 낭만을 지닌다. 미지의 영역으로 가닿는 잰걸음이 솜털 같다. 비로소 알았건대 명칭의 부재는 이토록 자연스럽다.


그는 이름이 한 브랜드나 사람, 캐릭터의 배경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건설되는 세계관에 대한 기대점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비슷한 이름으로 다르게 전개되고 있는 공간들과 최대한 부딪히지 않고, 아예 연상 가능한 배경조차 없는 곳에서 작품을 시작하고 싶었다고 한다. 다양한 시추에이션을 그릴 때 구체적인 설정이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도 그 이유였다. 갓 걸음마를 떼고 친숙한 집에서 나와 처음 목도한 낯선 동산에 입술을 앙다물고 울상 짓던 시절, 허나 발을 딛자마자 반색을 띠며 내달렸던 유년처럼. 일말의 여상함도 없는 신(新) 가상의 세계는 이렇게 우리 앞에 당도하게 되었다.



Fine Work, Hard Work


흐름을 종잡을 수 없는 참신함과 넌지시 내포된 블랙코미디는 ooo 작가 만화의 고유한 매력이다. 그는 소소한 말장난이나 상황극 등을 떠올리다 영감을 얻는다. 샤워하며 멍을 때릴 때도 좋은 플롯이 종종 튀어나온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아이디어를 글로 풀어내 에피소드의 콘티를 짠다. 다음으로 사각형 틀에 형태를 그리고 선을 정리하며 대사를 넣는다. 그 위에 채색을 하고 글자의 위치, 전체적 색감 조정 등의 세세한 부분을 수정하면 하나의 4컷 만화가 완성된다.


작업할 때 자주 겪는 고충에 대해 질문하자, 그는 밤낮이 뒤바뀌어 피부가 뒤집히는 일을 꼽았다. 또한 독립만화가로서 모든 걸 혼자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게 아직도 익숙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따로 있을까. 이에 그는 작업 시에 체력적으로 힘겹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아 굳이 회상하지 않기도 하고, 힘들었던 기억은 빠르게 잊는 편이라 인상 깊었던 일도 선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개인이 작업하는 경우에 두드러지는 딜레마가 아닐까 한다. 홀로의 버거움을 감내하고 작품을 선보이기까지의 고뇌와 열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Life Always Goes On


조소를 전공했으나 지금은 도트 만화를 그리는 ooo 작가에게 ‘삶의 불확실성’에 관해 물었다. 그는 불확실한 미래나 가능성을 좋아하진 않지만 매번 그런 (피할 수 없는) 변화를 맞을 때마다 운이 좋았다고 답했다. 만화를 꾸준히 그려왔음에도 만화가가 되고 싶진 않았는데. 다분히 멀어지고자 했던 길로 되돌아와 있는 찰나가 삶의 예상치 못한 지점인 듯하다며. 이런 현상들이 황당하고 놀랍다고 했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일과 안정적인 일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재차 물었다. 그는 “안정적인 미래에 대한 선택 또한 본인이 안정감을 선호한 것이기에 그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언하기 어렵지 않나. 세상에는 앞선 두 속성을 함께 지닌 직업이 많다. 환경에 변수가 없다면 좀 더 끌리는 쪽을 고르면 되지 않을까.”라며 고질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시원스레 갈무리해줬다. 어떤 방향을 선택하든 돌파구가 되는 것은 과감한 행동력, 성실함, 체력이라 생각한다고 그는 말을 이었다. 진부하게 들리지만 자신에게 부족한 점들이라 그런지. 이 세 가지를 가졌다면 어느 고리타분한 회사에 들어가도 수장이 될 법한 대단한 능력 같다고.


그가 <불타는 옛사랑의 그림자>와 <개>에 이어 새로이 애정을 가지는 작품은 <이상한 만화>, 그 이유는 뜬금없고 재밌기 때문. 코멘트를 남기고 싶은 작품으론 <영어 만화>를 뽑았다. 한국인만 알아듣는 한글 만화를 그릴 수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지만 그만큼 다른 언어로 번역을 포기한 만화도 많다고 한다. 보통 말장난과 농담 등을 자유롭게 사용하려면 원어민만큼 언어의 세밀한 어감과 뉘앙스를 잘 알아야 하는데. 스스로 영어에 능통하지 않기에 말장난으로 통하지 않거나 영어 말장난 축에서도 흔하고 시시한 농담이지 않을까, 영어권 나라에서 보는 느낌은 어떨까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영어권 나라들에서 잘 봐주셨기에 그걸로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Amazing Things Will Happen


포기하려던 내일을 기약하게 만드는 건 적지 않다. 장대한 서막과 기나긴 모험이 들어찬 트릴로지도 있고. 단숨에 읽고 오래오래 기꺼운 4칸짜리 만화도 있다. 어이없게 유쾌하다, 근데 곱씹으면 우리의 하루를 관통한다. 모르쇠 야멸차게 내쳤던 마음이 숫제 벅찬다. 웃음 끝에 서느렇게 딸려오는 의아함은 내가 어찌 살아야 할지를 뭉근히 재촉한다. ooo 작가는 특별히 작품마다 의도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지는 않다며. 독자마다 감상이 달라 어떤 이들은 위로와 공감을 얻을 수 있지만 일부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창작자로서 이런 모든 반응을 흐름대로 두고 가끔 인상 깊은 것만 간직하는 정도로 있고 싶다고 부연했다.


이담의 그의 계획이 궁금해졌다. 그는 진행 중인 2권 작업이 끝나면 또 새로운 책들을 연달아 작업할 예정이라 한다. 요즘 바쁜 일정 탓에 활동이 뜸한데 언팔로우하지 않는 구독자분들께 늘 계셔주셔서 감사하다 전하고 싶다고.(잊은 것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앞으로의 장기적인 꿈은 만화와 상관없는 가게 만들기 그리고 꽃밭 가꾸기 두 가지라고 한다.


나름의 삶을 버티는 방식이 있다면 무얼까. ooo 작가는 이렇게 응답했다. “만화의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상황들도 결국은 짧은 한 장면인 것처럼, 일상의 순간순간 최대한 그런 장면들을 찾아가며 지내기.”




Vol.20 <CODE NAME OOO>中

Editor 함유진

Illustrator 박주호

Photographer 이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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