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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루 Sep 21. 2023

나는 아직 유럽 앓이 중

주범은 이탈리아야

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 정도가 지났지만, 기억이 자주 떠오른다. 이렇게 멀리, 또 길게 한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도 많았고 난처했던 적도 많았지만, 뜻밖의 좋은 일도 많았기 때문에 여행은 정말 인생의 축소판 같다고 느꼈다. 유럽 여행을 하며 가장 좋았던 것은 보고 듣고 느낀 감각들이 모두 아주 생경했다는 점이다. 낯선 공간에서 제삼자가 볼 때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들,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나에 대한 감각들이 새롭고 생생했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은 어느 나라가 가장 좋았냐는 것이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총 세 나라를 다녀왔는데, 모든 나라가 각기 다른 매력과 비슷한 강도로 좋았기 때문에 고르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유럽 앓이의 후유증을 가장 크게 안겨준 나라라면 고를 수 있는데, 바로 이탈리아다. 마지막으로 방문해 더욱 기억에 남는 것도 있고,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제일 많았던 나라인 탓도 있다. 역시 뭐든지 우여곡절이 있어야 더 기억에 남는 법인가 보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도 한몫했다. 대학생일 때 나는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을 보고,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 여건상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내 버킷리스트였던 '서른 전에 이탈리아 가기'는 잊혀졌다. 시간은 흘러 2023년 봄, 나는 결심하게 된다. 올여름엔 포르투갈에 사는 친구 주연이를 만나러 가기로. 공교롭게도 이 결심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블로그에서 서른 전에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다고 썼던 글을 발견한다. 마침 내 나이 스물아홉, 과거 나의 버킷리스트를 들어줄 수 있는 상황인 거다. 당연히 못 갈 거라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좀 애틋해지면서 그 버킷리스트를 이뤄주고 싶었다. 그렇게 포르투갈, 스페인에 이어 이탈리아를 행선지에 추가했다.


유럽 여행을 계획할 당시의 나는 정말 되는 일이 없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버킷리스트를 이뤄 신기했다. 어쩌면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을 뿐, 여태 이뤄낸 일들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블로그에 끄적인 글이 아니었으면 버킷리스트를 실현할 생각도, 실현했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을 텐데 역시 뭐든 기록하고 볼 일이다.


과거의 내가 블로그에 끄적인 영화 리뷰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에는 이탈리아로 떠나온 프란시스에게 운명처럼 다가와놓고서 다음 날엔 까맣게 잊어버리는 남자들이 나왔다. (영화를 본 지 오래돼서 한 명이었는지 여러 명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주향 교수님은 이탈리아에 그런 남자들이 정말 많다고 했다. 이탈리아에 가면 혹시 나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까? 생각했다. 교수님은 친구와 같이 다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며 이탈리아에서는 혼자 여행하는 시간도 가져보라며 웃으셨다. 그 말을 듣던 나도 따라 웃었다.


유럽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들도 많았고, 일정도 바빴고, 여러 난관에 봉착해 가며 간신히 마지막 여행지인 로마에 도착한 나는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지친 상태로 로마에서 예약한 투어를 듣고 있는데 가이드님이 말했다.


"Roma를 거꾸로 하면 Amor, 사랑이라는 뜻인데요. 그래서인지 로마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사랑의 도시죠."


이 말을 듣자 왠지 로마라는 도시가 좋아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프란시스에게 다가온 남자처럼 다가오는 남자가 나타났다. 나는 방어 기제가 높은 사람이어서,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이 사람이 멀고 낯설며 매력적인 도시가 주는 분위기에 취해 <비포 선라이즈> 필터를 끼고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 게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생각만 한 게 아니라 말로도 나와버렸다.


"멀고 낯설고 매력적인 도시의 분위기에 취해 로맨스 필터를 너무 쉽게 장착한 것 아니신지."


좀 재수 없게 들릴 법한 내 말에 남자가 대답했다.


"그러면 또 어때?"

"......"


지당한 말이었다. 예전에는 영원하지 않을 지나갈 일에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는 것이 성숙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요즘에는 매 순간 감정을 풍부하게 느끼고 일희일비하는 삶이 오히려 더 행복하고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요소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을 이미 체득한 남자 같아서 호기심이 생겼다. 자기 규제가 심한 답답한 여자인 나와는 다르게 시원시원한 면모가 돋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정말 <투스카니의 태양> 속 남자 같은 인물이었다. 내 방어 기제가 높았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투스카니의 태양>이 이탈리아로 떠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영화라면 <냉정과 열정 사이>는 피렌체에 방문하는 것을 설레게 만들어 준 영화다. 준세이 역을 맡은 다케노우치 유타카가 너무 분위기 있게 잘생겼으며(우리나라 배우 이진욱이 자주 겹쳐 보였다) 피렌체 풍경은 그림이었고 영화 고유의 감성을 담아낸 음악까지 완벽했다.


숙소 뷰를 신경 써서 예약한 도시는 피렌체가 유일했다. 두오모 돔이 보이는 숙소 창가에 앉아 냉정과 열정 사이 OST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피렌체는 정말 그림 속을 걷는 것 같은 도시였고, 두오모 앞에 다다랐을 땐 냉정과 열정 사이 OST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연주를 듣자 내가 정말 이곳 피렌체에 왔구나 싶어 벅찼다. 피렌체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산타마리아노벨라에서 새 향수를 샀다. 향수를 뿌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OST 플레이리스트에 달린 댓글


유럽 여행의 여운을 길게 유지하고 싶어서 최근엔 영화 <로마의 휴일>을 봤다. <로마의 휴일>에는 콜로세움, 스페인 광장 등 로마의 주요 관광 명소들이 담겨 있어 그곳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과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또 AE라는 직업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 도시를 관광지로 자리매김하는 훌륭한 레퍼런스로 보여 흥미로웠다. 영화는 현실적인 결말로 끝이 났다. 마음은 조금 아팠지만 취향저격인 영화였다.


<로마의 휴일>로 인해 흑백 영화의 매력에도 푹 빠져버렸다. 종종 컬러보다 흑백이 더 매력적일 때가 있다. 영화가 흑백이었기 때문에 컬러에 시선을 뺏기는 대신 인물의 표정이나 분위기에 집중이 더 잘 됐다. 다음엔 은진이가 추천해 준 <카사블랑카>를 봐야지.


영화 <로마의 휴일>
오드리 헵번 너무 예쁘다


얻은 것도 배운 것도 참 많은 첫 유럽 여행이었다. 여행은 확실히 견문을 넓어지게 해 준다.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가우디 투어 가이드님은 본인을 여행 만능주의자로 소개했다. 여행만큼 세상을 보는 눈을 틔워주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여행을 앞두고 있을 때만큼 환율에 관심을 가질 일도 없고, 다른 언어로 의사소통할 일도 없고, 다양한 문화와 생활 양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일도 없으니까. 넓은 세상에서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사는 것도 가능한 인생이라는 걸 배웠다.  


세상은 넓고 여행은 재밌다는 걸 알아버린 나. 언제 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난 내가 유럽에 갈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못 했던 사람이었다. 근데 이렇게 다녀왔으니까 또 갈 수 있겠지. 내가 포르투갈을 떠날 때, 주연이가 몰래 써서 넣어둔 엽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 아빠가 출장을 다니시며 항상 하셨던 말은 '아무리 먼 곳이라도 살다 보면 다시 올 수 있다' 하셨어. 그치만 항상 덧붙인 게 '그렇지만 다시는 올 수 없을 것처럼 즐겨야 한다' 하셨어. 다음에 리스본 또 올 수 있을 거야. 여기가 아니라도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나를 보러 또 올 거야.


아무리 먼 곳이라도 살다 보면 다시 갈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 블로그에 적어둔 버킷리스트를 예상치 못하게 이룬 것처럼, 브런치에 적어둔 이 글로 인해 또다시 떠날 용기를 얻기를. 다음엔 베를린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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