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지켜야 할 인간관계의 선은 어디까지인가?
오래전 어떤 부장님과 희망퇴직 면담을 하는 과정에서 나눈 이야기다. 이 분이 회사에 입사하고 신입사원 교육을 모두 마친 날, 사장님 주관으로 환영회가 있었다. 회식 장소는 나쁘지 않은 고깃집이었고, 넓은 벽면 한쪽에는 충격적이지만, '우리가 남이가'라는 표어의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그날 회식자리에서는 저마다 잔을 부딪히며,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빛나던 경제개발 시기에 각 기업에서는 이렇게 단체회식이 빈번했고, 저마다 기업만의 구호를 외치며 구성원의 결속력을 다지곤 했다. 자신은 회사의 분신이었고, 회사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었다. 꿈이라고는 다른 선배들이 그러하듯이 회사에서 명예롭게 정년을 마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제개발시기의 모습은 1998년 IMF 이후로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 회사는 더 이상 직원들의 자리를 보전해주지 못했다.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기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기도 했고, 비정규직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정규직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나, 이것은 잠시 화살일 빗겨나간 것일 뿐, 언제 희망퇴직과 같은 칼바람이 불어올지 두려웠다.
2010년대 이후에도 기업들은 부채비율을 더욱 낮추고, 급변하는 사업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해, 보수적인 업무 방식을 탈피하고 창의와 혁신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대규모 회식은 보이지 않았고, 저녁 단체 술자리 회식 문화는 워라밸의 주적으로 규정되어 이제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온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현상을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형용모순으로 표현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와 같이 급격한 경제개발로, 한세대 안에서 유교 윤리에 따른 가부장적 & 전통적 사고방식과 근대적 합리주의 & 자본주의 사고방식이 같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가부장적 & 전통적 사고'와 '합리주의 & 자본주의' 두 개의 가치판단 잣대 (dowble standard)를 가지게 되고, 이것들로 혼란이 야기된다. 가장 대표적인 한국사회에서의 현상으로는 큰 아들이 전통에 따라 부모님의 재산을 더 많이 물려받겠다 입장과 다른 자녀들이 재산을 동일하게 나누는 것이 합리적이다는 입장이 충돌하여 재산분할에 대한 소송으로 빈번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압축성장이라는 빛나는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 빛의 이면에는 압축성장에 따른 성장통이 짙은 그림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1998년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던 신입사원과 그즈음 태어난 90년대생 신입사원이 이제 한 공간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그들은 부장과 신입사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90년대생이 온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등의 책을 읽는다. 직장은 이런 세대의 차이, 성별의 차이, 성향의 차이, 성격의 차이가 난무한 곳이다. 직장은 관리자와 실무담당자, 경력자와 비경력자, 팀장과 팀원이 존재하는 곳으로 절대 같은 또래끼리만 모일 수 없다. 사회의 '비동시성의 동시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다양성이 난무한 직장이기에 별의별 사람들이 있고, 이들과 소통하여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당신이 직장에서 다른 누군가와 일하기 불편하고 울거나 화내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저 당연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는 사람을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회사에서 인사부서에 면담을 신청하는 많은 경우가 구성원과 인간관계 문제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잘해 주었는데,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서운한 감정을 팀장이나 팀원이나 직급과 역할에 상관없이 모두 가지고 있다. 직장생활의 관계에 본질은 근로계약에 의해 노동을 제공하고 보상을 받는 거래의 관계이다. 이곳에 사적인 친밀의 관계를 기대한다면 본인만 상처 받고 화병에 걸릴 것이다. 사적인 친밀의 관계는 가정과 개인생활에서 이루면 된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사실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욕망의 또 다른 얼굴이다. 남에게 관심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발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이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도 방해한다. 남을 걱정해서 그런다고는 말 하지만, 간섭하고 쉽게 충고하는 사람들은 인격이 성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필요할 때만 간섭과 충고를 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도움을 해주어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피곤하게 만드는 행동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직장에서 지켜야 할 인간관계의 선은 어디까지인가? 어디까지는 받아들여지고, 어디까지는 오버인가? 여기에 대해 나는 '딱, 3년만 볼 사람처럼 대하라'고 권한다. 1년만 볼 사람이면 너무 막 대하게 될 것이고, 5년 볼 사람처럼 대하는 것은 너무 피곤할 듯하다. 회사에 소수인원만 있는 직무를 제외하고, 일반부서에서 같은 동료, 상사와 근무하는 기간은 대략 3~5년 정도이다. 이 기간 동안 부서장들의 보직변경이 있을 것이고, 팀원들도 부서 이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퇴직률이 낮은 조직이라고 해도, 어느 조직이든 정년, 자발적 퇴사, 징계 등으로 조직 인원의 5~10%는 매년 자연 감소하고 새로 충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3년만 볼 사람이라는 말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즘과 같은 뷰카(VUCA)* , 디지털, 그리고 100세 시대에는 한 부서에 오래 있는 것이 미덕이 아니다. 역동적인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본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부서와 회사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 강조된다. 인사제도의 트렌드 측면에서도 2000년대 이전까지는 한 가지 직무를 담당하는 전문가 육성이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Job posting을 통해 다양한 일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이런 생각을 마치며, 한 회사에 20년 넘게 근속하시고 희망퇴직으로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시는 그 부장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내 드리며, 그분께서 새로운 일과 새로운 조직에서 잘 적응하시고 건승하시기를 속으로 몇 번이고 기원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생자필멸(生者必滅)
세상의 모든 인연이라는 것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 진자는 다시 만나게 되며, 태어난 자는 언젠가 죽게 된다.
* 뷰카(VUCA)
변동적이고 복잡하며 불확실하고 모호한 사회 환경을 말한다.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의 약자로 1990년대 초반 미국 육군 대학원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즉각적이고 유동적인 대응 태세와 경각심이 요구되는 상황을 나타내는 군사용어로 사용됐다. 이후 상황이 빠르게 바뀌는 현대 사회 및 불안정한 금융시장과 고용시장 상황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돼 왔다. 기업이 뷰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영혁신, 구조조정 등이 필수적이며 기존의 지식과 경험에서 탈피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것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