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사 Feb 12. 2020

01. 피난일기 - 하노이 숙소

충격과 기쁨의 올드 쿼터(Old Quarter) 숙소.


하노이에 도착한 첫날밤 우리는 대판 싸웠다. 생각해보면 그 이유가 참으로 유치해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매우 원통하여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미사 어릴 때.

지금도 그때가 떠오르면 나는 사진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남편에게 빈정거리곤 한다. 하지만 그는 지지 않고 재빨리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눼눼~ 내가 다 잘못했네요. 몽땅 다 내가 잘못했지요. 늘 잘못하는 건 나지요~~~~”     


하아. 너무 얄미워서 딱 한 대만 때려주고 싶지 않은가? 실제로 보면 더 얄밉다. 깐족거림의 대마왕 격이랄까. 프롤로그에서는 선비라더니 그 괴리감에 깜짝 놀라실 수도 있겠다. 참고로 이때가 결혼 5년 차였고, 늘 이러는 건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다섯 짤로 바뀌게 되었다. 


그 날의 싸움은 무승부로 흐지부지 끝나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억울하다. 제발 내 이야기를 듣고 누구의 잘못인지 부디 시시비비를 가려주시길 바란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1월 5일, 새벽 1시>

부산에서 저녁 비행기를 타고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컴컴한 새벽이었다. 바람은 스산했고, 우리는 오랜만의 장거리(?) 비행에 잔뜩 지쳐있는 상태였다. 남편이 사전에 예약한 케이케이데이(KKday) 픽업 밴을 타고 곤히 잠든 도시를 50분가량 가로질렀다.       

윤건) "공항에서 그랩(Grab)을 이용해도 되지만, 늦은 밤에 도착하는 일정이었기에 KKday 픽업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혹시나 Grab이 잡히지 않으면 낭패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공항에서는 Grab인 척하는 불법 개인 승용차량도 있으니 꼭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훗, 나는 똑똑해.”      


예상했던 하노이의 느낌.

하노이 숙소는 에어비엔비로 장기 할인을 받아 저렴한 값에 구한 곳이었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알록달록한 인테리어도 꽤 괜찮았고, 무려 하노이 출신의 베트남인 친구가 강력 추천해 준 "올드 쿼터"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내심 기대도 되었다. 


올드 쿼터라니. 이름만 들어도 왠지 고풍스럽고 흥미로운 것들이 가득할 것 같지 않은가? 값싸고 달큰한 과일의 냄새가 진동하며, 붉은 깃발이 곳곳에 휘날리며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그런 곳을 나는 상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일렁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숙소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We are here! (도착했어요!)"


기사님이 경쾌한 목소리로 멈춘 그곳에는 웬 시커먼 철문이 떡하니 서 있었다. 응? 왜 여기서 내려주는 거지?  그것은 어떤 게임에서 본 던전의 입구와 닮아 있었는데, 마치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름 모를 몬스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Are you sure? (확실한가요?)"

"Yes, I am sure. See the number? (확실합니다. 번호 보이시죠?)"


그는 씨익 웃으며 건물의 번호를 가리켰다. 놀랍게도 우리 숙소의 주소와 일치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던 사이 그는 잽싸게 차에서 뛰어내려 실려있던 우리의 짐을 척척 내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잔뜩 긴장한 상태로 밴에서 내린 후에야 우리는 겨우 깨달았다. 아, 저기가 50일 간 우리의 ‘홈, 스윗 홈’이로구나.  


급히 인사를 하고 떠나버린 기사를 뒤로하고 다시 철문을 마주하자 어디선가 낮고 음산한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며 내 귀를 간지럽혔다.          


[어서 와 하노이 올드 쿼터는 처음이지?]     

밴에서 내린 뒤 남편이 찍은 영상. 맞춤법 틀리는 건 컨셉이니 그냥 무시해 주세요.
윤건) “하노이의 구시가지인 올드 쿼터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이지만, 이 지역 숙소는 대부분 낡고 좁다란 건물의 내부를 수리한 형태입니다. 거리에 오토바이가 끊임없이 지나다니며 빵빵거리고, 벽이 얇아 방음이 안됩니다. 다만 볼거리와 먹을 게 많다는 장점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현지인의 말만 듣고 별생각 없이 결정한 우리의 잘못이었다. 숙소에 대한 조언을 해준 20대 베트남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 올드 쿼터를 추천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 절대 탓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건 마치 내가 "부산은 남포동이 좋아요."라고 말했는데, 외국인이 무작정 남포동 시장 한가운데에 낡은 집을 얻어 50일을 살아보는 격이랄까?    


철문 앞에 선 우리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렇게 잠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그리고 나는 덤덤히 던전 철문의 자물쇠를 따기 시작했다.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남편이 운영하는 전혀 유명하지 않은 유튜브 채널, '지니위키'를 찾아보면 된다. 여기에 내가 철문을 열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연약한 남편을 위하여 열심히 자물쇠를 따는 나의 용감한 모습을 말이다.      


나를 자꾸 와이프파이라고 부르는 윤건... 이것이 바로 휴먼윤건체.

숙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3단계의 문을 뚫어야 했다,      

제1 단계-  철문 옆 키 박스에 미리 알려준 비번을 입력하여 열쇠 #1을 꺼내고, 자물쇠를 딴다.  
제2 단계-  좁다랗고 어두운 골목을 통과한 뒤 무거운 이민가방을 (남편이) 들쳐 매고, 무너질 것 같은 좁은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도어록의 비번을 눌러 '건물' 대문을 연다.   
3 단계- 문을 열고 들어가 또다시 키 박스에서 열쇠 #2를 꺼내 '방문'을 연다. (참고로 이 문은 더럽게 안 열려서 한참을 낑낑거렸다.)      


이렇게 방에 겨우겨우 들어선 시점이 2시 반. 다행히도 방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둘 다 배가 너무 고팠다. 나는 대자연(‘마법‘처럼 생리를 은밀히 지칭하는 말)이 찾아온 터라 정말로 어지럽고 손이 떨렸다.


자, 여기서 여자분들은 공감하실 것이다. 정신이 멀쩡할 때 배가 고파도 짜증 나는데 아래로 피를 철철 흘리면 그 짜증이 수천 배 증폭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여러분 심지어 저는 어지러웠다니까요?) 남자분들은 이 것 하나만 기억하자. 아내가 생리에다 배가 고플 땐 꼭 뭘 먹여야 한다는 것을.           


“남편, 나 배고파...”

“...”

“남편, 나 어지러워...”

“나가서 뭐라도 먹을까?”     


<1월 5일, 새벽 3시>

가방에는 그 흔한 초콜릿 하나 없었고, 우리는 그렇게 밤길을 나섰다. 분명히 어두운 밤길이고 밤눈이 밝지도 않은데 이상하리만치 더러운 것들이 잘 보였다. 그 새벽에도 문이 열린 식당들이 몇몇 보였지만 선뜻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길 위에 낮은 플라스틱 탁자에 음식을 늘어놓고  무언가를 먹고 있는 현지인들. 그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휴지와 쓰레기들. 뽈뽈 잘 도 돌아다니는 길거리의 까만 바퀴들. 첫 날밤의 기억은 이렇듯 끔찍했다. (하지만 기대하시라. 곧 우리는 길바닥에서 잘도 밥을 먹게 되니까.)      


“남편, 나 어지러워...”

“...”

“남편, 나 배고파...”

“...”     


이렇게 한두 번 반복해서 말했을까. 남편이 갑자기 버럭 했다.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너만 배고프냐? 나도 배고프다.’ 이런 식이였던 것 같다. 진짜 어지러워서 말했는데 참 성격 더럽다 싶었다. 나도 그 이후에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분명 ‘왜 말을 그렇게 해?’ 정도 했겠지.      

윤건) “한두 번이라고요? 말은 똑바로 해야죠. 배고프다고 족히 20번은 넘게 말했습니다. 저도 심란한 상황인데 말이죠. 게다가 생리한다는 말은 해 주지도 않았고요.”       


흠흠, 한두 번이 아니었나? 스무 번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잘은 모르겠다. 어지러웠으니까. 아마 이때였던 것 같다. '만물 생리설'이란 말이 탄생한 날 말이다. 이는 남편이 지어낸 것으로 '모든 (미사의) 악은 생리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나 생리다. 조심해라.”

“눼눼~ 어이쿠 만물 생리설 시작하셨세요?”

“이 씨, 생리하는 와이프한테 맞아봤냐?”     


사실 이 사진은  전에 일본 여행을 갈 때 사진이다. 


그날 새벽 우리는 겨우 Circle K라는 편의점을 겨우 찾았고, 그 앞에 서 있던 카트에서 반미(바게트 샌드위치)를 몇 입 베어 물며 주린 배를 겨우 채웠다. 음식이 몸 안에 들어오니 순식간에 혈당이 안정되고 예민하게 굴었던 것이 약간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로 여전히 화해하지 않은 채 편의점에서 맥주와 주전부리를 이것저것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결국 뚱한 표정으로 포장해온 반미를 몇 입 더 먹고 쓰러지듯 잠들었고, 밤 귀가 밝은 남편은 얇은 벽을 뚫고 들어오는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를 어찌 참고 잤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지치고 힘든 우리의 피난 첫날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우리는 화해를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는 남편이 미안하다고 말하면 내가 마지못해 받아주는 식이였지만... 그렇게 우리는 다시 포옹하고 룰루랄라 밥을 먹으러 갔다. 바로 분보남보라고 하는 남부 지방의 소고기 비빔국수이다. 다음 편에서 더 얘기하도록 하겠다. 


그럼 오늘의 싸움 끝.


뭐, 사건의 결말이 허무하다고? 왜 갑자기 먹는 거 얘기냐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는 남편을 사랑한다. (찡긋) 원래 부부싸움은 다 이런 거 아니겠는가.  이제 고자질은 그만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게다가 안타깝지만 ‘배고파 ‘를 말한 횟수가 한두 번인지 스무 번 이상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럼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혹시라도 내가 더 잘했다고 생각하는 분만 댓글 남겨주시기 바란다. 나중에 혹시라도 만나면 커피라도 한 잔 쏠 터이니.   


그럼 오늘의 일기도 끝.  

    

낮에 찍은 숙소 사진. 미사가 냉장고에 뭘 집어넣고 있다.

<뒤늦게 깨달은 장기 숙소를 구할 때 기억할 점 > 

1) 인근에 편의점 및 슈퍼마켓이 있어야 한다.

2) 취침이 안정되어야 한다. (소음 등의 이유로 관광 중심지는 피한다.)   

3) 숙소는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외관 컨디션 및 접근성을 고려한다.    

4) 대자연이 터지면 남편에게 미리 경고를 한다.

5) 싼 게 비지떡이다.

   

작가의 이전글 00. 피난일기 - 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