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만나고 왔다

후회 없이 이별하고 싶다

by 미상이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루 휴가를 얻어 이승에 온다면

아버지가 우리 집에 하루 다녀가신다면... 어떻게 그 하루를 보낼까...


영화 ‘A.I’에서 몇 천 년을 기다려 엄마를 만난 데이빗. 데이빗이 엄마를 위해 커피를 내려주었듯이,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커피를 사드릴 것이다. 그렇게 평범한 아버지와의 하루를 보낼 것이다. 아버지는 고기를 좋아하셨고, 엄마의 쑥버무리를 좋아하셨고, 커피를 좋아하셨고, 애연가셨다.

나는 아버지와 백화점에 가서 멋진 옷과 신발을 사고, 떡갈비도, 치킨도, 갈비도 사드릴 것이다. 생전에 아버지는 집에서 매일 커피를 대여섯 잔씩 마셨다. 엄마와 싸우고 나면 다방에서 살다시피 하셨다. 아버지는 카페 나들이를 가장 좋아하실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하진 않는데 맛있는 커피를 마실 때면 커피를 좋아한 아버지 생각을 한다.

그러나 다시 만난다 해도 담배를 사드리긴 싫다. 나는 담배 피우는 아버지가 정말 싫었다. 안방에 가득한 담배 연기가 너무 싫었다. 진짜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러나 그래도 싫지만 기꺼이 최고급 담배를 사드릴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에 오래 누워계시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엄마에게는 꼭 효도하리라 결심했었다.


그러나 엄마와 잘 지낸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엄마는 (그 시대 엄마들이 그렇듯) 아들이 신이었다. 자랄 때는 오빠와 차별하며 오로지 오빠가 우선이었다. 결혼 후에는 오로지 신랑 편이었다. 시댁에 가면 신랑만이 귀한 사람이고, 친정에 가도 사위만 귀하게 대접받았다. 나는 외롭고 슬펐다. 명절이든 생신이든 엄마와 만나는 시간이 즐겁지 못했다. 며느리 아들 눈치 보고 딸들에게는 잔소리 잔소리..... 엄마에게는 늘 시원찮은 딸이었다. 엄마 맘에 드는 자식 되기가 힘들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엄마와 기쁘게 만나 즐겁게 웃고 잘 헤어지고 싶다.

나는 이제 엄마를 만날 때마다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 생각한다. 구순이 넘은 엄마, 나의 엄마는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내가 오늘 엄마에게 가는 날은

엄마가 이승에 다니러 오시는 날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분이 이승에 하루 휴가를 받아 오는 날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엄마를 만나러 간다.

다시 한번 엄마를 볼 수 있다면 뭐든 다 참아낼 것이다. 참을 수 있다.

옷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고 하던, 머리 파마를 하라고 하던, 다 들어줄 수 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생각하면 지금 살아서 듣는 엄마의 잔소리도 좋다. “알았어 엄마, 그래 알았어 엄마” 하게 된다. 몇 년 전부터 그런 마음으로 엄마를 만나고부터 엄마도 나에게 부드러워졌다. 엄마가 자식에게 원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저 엄마가 말하면 따지지도 말고 말대꾸도 말고 “ 알았어요 엄마, 네 네 ” 순종하는 딸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말대꾸하고 따지고.... 그런 딸이었다.

지금은 엄마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사랑해 엄마!” 말하고 꼭 안아드린다.

엄마는 웃으며 “그래 나도 사랑하지”라고 하신다.

한 번은 엄마가 그러셨다. “그래 나도 사랑하지, 옛날엔 그런 말이 없어서 못 했지”.


엄마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언제까지 일지 모른다.

영영 휴가를 못 오실 날이 있을 것이다.

“엄마”라고 부를 수 없는 날이 곧 올 것이다.

엄마는 이제 귀가 완전히 안 들려서 전화통화도 못 한다.

엄마와 후회 없이 천천히 잘 이별하고 싶다. 아프지 않게 이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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