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링구얼은 어딘가를 항상 그리워할 운명이다.
일본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이 단 15%에 불과하다니 충격을 받았다. <총, 균, 쇠>의 마지막에 달린 일본인의 유래에 대한 소논문 중에 나온 이야기다. 이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의 유사성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준이라고 한다.
어릴 때 읽은 위인전엔 왜인지 서양인이 많았다. 에디슨, 파브르, 링컨, 퀴리 부인, 나이팅게일 등등… 그중엔 2-3개 국어를 한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들이 위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증명하는 듯했다. 얼마나 머리가 좋기에 2-3개 국어를 하는 거지?
그러나 고등학교 때 제 2 외국어로 불어를 공부하면서 그 미스터리는 서서히 풀렸다. 불어 교사가 공부를 독려하기 위해, 불어를 알면 같은 어족의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는 금방 배운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했다. 한국 사람이 일본어를 배우는 것 같을까? 그렇다면 유럽인에게 2-3 개 국어 정도는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겠는걸. 지리상으로도 붙어 있고 말이다. 아시다시피 초급 일본어 수준으로도 자막과 함께 일본 영화를 보면 뭔가 상당히 주워 먹는 게 많다. 일단 어순이 같고, 사물에 대한 느낌도 비슷하다. 그리고 비슷한 어휘가 많아 한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뭐든 대충은 알아먹는다. 그러니 뭐든지 자신감 넘치는 유럽인이라면 그런 수준의 외국어가 몇 개 더 있는 정도로 2-3개 국어 구사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일본어와 한국어의 공통점이 15% 뿐이라니. 한 프랑스인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엔 그게 농담인 줄 알았는데, “유로스타를 타고 가다 옆 자리의 스페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스페인어도 하냐고요? 아뇨. 하지만 프랑스 사람과 스페인 사람은 서로 모국어로 얘기해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답니다.” 이 정도면 제주 사투리보다 가깝다. 프랑스인이 영어를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영국이라는 작은 섬나라만 가지 않으면 어차피 프랑스어로만 이야기해도 유럽 대륙 안에서는 OK니까. 게다가 영국이란 변방 양치기들이 언제부터 그리 잘난 척을 했던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프랑스야말로 유럽 역사를 이끌어 온 주인공들 아니던가 말이다.
현대 유럽은 외국어 조기 교육이 정착되어 상당수 국민들이 실제로 2-3개 국어를 잘 구사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프랑스에 진출한 한국 문화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국민들의 문화적인 감수성도 높은 편인 것 같다. 하지만 영어권은 다르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통통하고 보송보송한 줄리 델피가 “그래, 넌 미국인이니까 영어밖에 못하지?”라고 한 것 기억나는지? 대체로 영어 사용자들의 외국어에 대한 태도는 이렇다. 1. “어차피 전 세계가 영어를 알아들으니 나는 외국어를 할 필요가 없다.” 2. “너 외국어를 잘한다고? 그게 뭐? 영어를 못하잖아?” 물론 예외도 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어떤 외국어보다 당신의 영어가 나으니 틀려도 마음 놓고 이야기하세요. 제가 알아 들어 볼게요.”라는 친절한 사람들도 있긴 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애초에 왜 외국어를 배우지 않았던가를 살펴보면 이유는 1번인 것이다. 한국처럼 외국어에 대한 압박이 심한 환경을 생각해 보면 꽤 큰 컬처 쇼크다.
한 영화과 교수가 브리즈번 한국 영화제 포럼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영화를 전공한다는 학생들 중 자막 있는 영화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요.” 또 어느 여행 칼럼은 이렇게 썼다. “(영어 사용자들에게) 영어를 천천히, 크게, 반복해서 말한다고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이런 문화적 무지에는 그들의 교육도 한 몫한다. 미국이나 영국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호주에는 역사 교육이 따로 없다. 그들은 200년 남짓한 호주 역사만 배우고- 물론 백인 이주 후의 역사- 세계사는 따로 신청해야 배울 수 있다. 한국 국사 교육이 한국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중국 역사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과 달리 대다수 호주인 들은 영국 역사도 왕실 가계도 정도밖에 모른다. 미국 역사는 <심슨 가족>이나 대중문화를 통해 접한다. 아주 고령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2차 대전 참전을 계기로 그즈음 현대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도 있다. 은퇴 후 세계 일주를 다니시며 그 나라 역사를 그 나라에서 배우시는 분들도 계시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 호주인에게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역사도 듣보잡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타문화에 대한 감수성은 상당히 피상적이다. 그들에게 타문화란, 매일 마주치는 이민자들이다. 중국 문화는 황하에서 시작된 유서 깊은 문화가 아니라 차이나 드레스와 중국 음식이다. (그나마 현지화의 결과로 진짜 중국 음식과는 많이 다르지만. ) 인도 문화는 커리와 요가, 텔레마케터, 택시 기사들이다. (인도에서 호주로 직접 텔레마케팅 전화가 온다. 인도인 택시 기사도 흔하다.) 중동 문화는 테러, 머릿수건, 가난 아니면 오일 머니다. 아, 그리고 중동과 그리스 근방 어딘가에 케밥과 터키쉬 딜라이트(장미 등의 향을 넣은 찹쌀 젤리 같은 것)가 있네. 그런데, 너네 영어 이상해.
결국 영어권에서 바이링구얼임은 그가 이민자 1세대라는 것을 반증하는 듯하다. 주류 영어권 문화에서 자라지 않았으며, 영어에 이상한 엑센트가 있는 사람. 이민 2세대부터는 영어에 더 익숙함을 느끼기 때문에 부모한테는 부모의 언어로 이야기하더라도 형제끼리는 영어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1세대 이민자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에 외국어 사용 능력은 그 언어가 필요한 특정 분야 외에는 취업 시장에서 대단히 큰 경쟁력은 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1세대 부모는 2세대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려 노력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과 부모, 친지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는데, 이런 이유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 어떤 부모는 아이에게 한국어를 전혀 가르치지 않거나 가르치다가 중단하기도 한다. 영어에 한이 맺혔거나, 한국어를 배워 봤자 큰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어를 가르치던 안 가르치던, 1세대는 자신이 체화한 한국 문화를 아이에게 전해 준다. 또 한국어를 알던 모르던, 대부분의 한국 아이들은 자신과 생김새가 비슷한 동양 아이들과 어울리고, 배우자도 한국인이나 동양인을 선호한다. 입양된 동양 아이들이 자신과 생김새가 다른 서양 부모 밑에서 심한 성장통을 앓곤 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알려져 있다. 사람이란, 특히 어린이는 왜 그렇게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이 필요한 걸까? 자기와 닮은 가족을 사랑하도록 자연이 프로그램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두 개의 문화를 가진 바이링구얼들은 하나의 문화를 가진 모노링구얼들과는 약간 다른 생활을 한다. 평소엔 밥을 먹다가도 숙취엔 베이컨과 계란을 먹어야 한다던가. 호주 특유의 느긋한 일처리에 불평하다가도, 한국에 가면 쌩하니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잠깐 망연해지곤 한다. 가끔 한국어 단어를 잊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중간중간에 영어를 섞어 말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딱히 영어를 할 줄 안다고 잘난 척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순발력의 문제, 그리고 해당 상황에 대한 표현력이 조금 다양해진 것뿐이다. 그러나 그 스펙트럼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대화 상대는 많지 않다. 단순히 그 단어를 아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말은 결국 사고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타지 생활을 오래 할수록, 대화할 때 이것은 너도 당연히 알고 있으니까,라는 상대방의 전제에 함께 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낀다. 문화적 밀착감이 점점 옅어지는 것이다. 시기마다 빠르게 변화하는 ‘대세’가 지배하는 한국 문화와는 그만큼 더 빠르게 멀어지는 듯하다.
해외에서 오래 중년기를 보낸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윽고, 슬픈 외국어>란 수필에서 외국어로 둘러싸여 사는 일에 대해 썼다. 듣자마자 뎅, 하고 의식의 한 부분을 진동시키는 모국어와 마음으로 들어오기까지 필터를 거치는 외국어. 그럼에도 오래 외국어를 사용하다 보면 모국어조차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게 되며, 사실은 그 어떤 언어도 그렇지 못하다는 깨달음은 약간의 슬픔을 동반한다.
절대적인 것은 얼마나 편한 것인지. 자신이 숨 쉬는 공기와 딛고 있는 땅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인지. 그러나 바이링구얼의 고향은 절대적인 장소가 아니고, 그래서 그는 항상 어딘가를 그리워할 운명이다. 그러나, 100%의 한국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100% 한국적인 사람도 존재하지 않고, 정도는 다를지언정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바이링구얼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