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니 Dec 04. 2021

어린이가 가져오는 계시에 대해

그들의 안엔 작은 신이 있다.

가끔 아이들은 신비한 말을 던진다. 평소의 아이라면 하지 않을 것 같은 말들, 맥락의 저쪽 언덕에 돌을 던지듯, 어른의 마음에 커다란 물결을 일으키는 말들.


예를 들어 어느 날, 길을 잃었는데, 아이가 이 쪽이라고 한 방향으로 가다 보니 목적지가 나왔다. "아이고, ㅇㅇ이 덕분에 엄마가 길을 찾았네. 엄마 길을 정말 잘 못 찾는데." 그랬더니 아이 왈,


"엄마, 그래서 내가 왔어."


혹시 이 아이는 어딘가에서 날 지켜보던 천사였나. 아, 맨날 길을 잃는 저 여자를 좀 도와줘야겠네 하고 이 고단한 세상에 내려와 준 걸까.


또 하루는 자장가를 부르는데, 그날은 아이가 좀처럼 잠이 안 들어서 이런저런 동요를 부르고 있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 나 혼자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갑자기 슬픔이 밀려올 때가 있다.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귀여운 내 클레멘타인. 너는 영영 가버리고 나만 홀로 남았네... 클레멘타인이가 멀리 갔나 봐... ㅇㅇ이가 가 버리면 엄마가 너무 슬퍼서 어떡하지?"


어릴 적 처음 이 노랠 배웠을 땐 클레멘타인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자식이란 원래 부모를 떠나는 것이다. 나도 그랬고, 이 아이도 언젠가는 날 떠나겠지. 내 몸에서 생겨나, 나를 통해 나와, 내 젖을 먹고, 지금도 잠드는 게 무섭다며 이렇게 부둥켜안고 있지만.


"...그래도 ㅇㅇ이가 행복하면 엄마가 잘 참을게."


결말이 정해진 애정을 퍼붓는 슬픔과 기쁨. 아이는 고마워, 그러더니,


"...엄마, 내가 좋은 생각이 있어. 내 손을 잡고 엄마가 나를 따라오면 되잖아. 행복한 데로 같이 가자."


최근에는 락다운과 홈스쿨링, 대학원으로 미칠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아이의 수업시간과 내 수업시간이 겹쳐서 책상을 나란히 두고 각자의 원격 수업을 듣는데, 아이가 두 번째 수업시간부터 배가 아프다고 내 수업 시간 내내 무릎에 앉아 있었다. 나는 한 귀로 수업을 듣는둥 마는둥 하며, 앞에 앉은 아이 숙제를 봐주고, 아이는 한 번 하라 해선 듣지 않고 엎어졌다 딴짓했다를 반복하고, 나는 나보다 열몇 살은 어린 학우들이 만든 화려한 발표 자료와 열심히 들어도 모자랄 강의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가는 시간을 견뎠다. 그 후 아이의 점심을 만들고 청소를 하는데,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뭐하는 건가, 지금 공부해야 하는데, 과제해야 하는데, 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학교는 실습을 온라인으로 하기로 결정했고, 나는 내 애가 지금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 락다운 때문에 시터를 구하기도 어렵고, 구한다고 해도 작은 집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할 텐데 온라인 실습 참여는 불가능하다, 차라리 날짜를 조금이라도 조정해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답이 없었다. 원래 풀타임 2년 코스가 3년이 되고 잘하면 4년까지 늘어날 수도 있는 상황. 나는 이십 대도 아니고 가장인데, 4년이나 돈을 안벌긴 어려웠다. 아이가 크면 정부 보조금이 확 줄어들기 때문이다. 애초 계획이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지금 다른 애들 가르치겠다고 공부를 하는 게 말이 되는가, 내 집에 있는 내 애도 못가르치는데. 억울하고 답답해서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아이는 옆 집 아이와 잠시 이야기하고 온다더니 오는 길에 넘어져, 뺨 어디를 긁혀서는 울면서 돌아왔다. 작은 상처에 동네가 떠나가라 엉엉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과부하가 와, 온 세상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락다운 때마다 흰머리가 생겼다.


긴 하루가 끝났다. 아이와 나는 누워서 오늘 고마웠던 일 말하기를 했다. 보통 내가 먼저 아이에게 그 날 고마웠던 일을 말하고, "오늘 엄마가 너한테 잘한 거 있어?" 하면, "음... 잘 모르겠어."라는 식이라, "오늘 점심에 뭐뭐 맛있게 먹던데, 그거 고맙지 않아?" 이렇게 엎드려 절 받기를 하는데, 신기하게도 그날은 아이가 이랬다. "내가 도움이 많이 필요할 때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마치 어디서 연습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이 작은 아이가 고마움이란 사회적 감정을 배웠다는 것에 대한 감사? 나도 조금은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안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어떤 것이었든, 그것은 그날 내게 꼭 필요한 말이었고,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천사나 요정, 혹은 작은 신이 아이의 귀에 그 말을 속삭여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 작은 신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가진 건, 불임 선고를 받고도 몇 년이 지나서였다. 당시 나와 아이 아빠는 이혼을 앞두고 있었고, 나는 영구 귀국을 고려하며 한국에 와 있었다. 그러다 혼자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아이 아빠와 전화로 자주 싸웠다. 여러 가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이 아빠는 아팠고, 둘 다 직업도 없었다.


의사가 안정될 때까지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해서, 몇 년 만에 영하로 내려가는 한국의 겨울을 맞았다. 설상가상, 난생 처음 장염이란 것에 걸렸는데, 창자수백 개의 바늘이 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낮엔 묽은 죽을 몇 모금 마시고, 새벽엔 토하고 설사를 했다. 벌레처럼 구부리고 누워 아픔에 몸부림치면서도 약은 못 먹고, 아이는 괜찮을지 걱정하고, 아이 아빠에게 화를 내고, 또 이걸 엄마한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꿈을 꿨다.


꿈속의 나는 하늘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산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곧 빽빽한 나무 가지들이 걷히고 어둠으로 칠해진 공허가 나타났다. 저 멀리 파도 거품이 그리는 창백한 윤곽이 보였다. 길의 끝. 절벽이었다. 밤바다는 해안을 철썩, 때리고 물러갔다 다시 몰려와 다시 또 철썩, 해안을 때렸다. 공기는 쓰라리게 건조하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곳에 나는 혼자,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 춥고 빈 바닷가를 혼자 걸어, 먼 곳에 있는 절에 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문득 알았다. 맹수나 귀신의 느낌은 없었지만 난 두려웠다. 파도가 두려웠을까, 지치지도 않고 돌아와 모래의 살결을 후려치는 냉혹한 파도가.


그때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이 뜰 거야. 달하고 절만 생각해. 너는 이 바닷가에 없는 거야. 달하고 절만 생각해.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노란 보름달이 떠 바다의 표면을 밝혔다. 검고 막막한 바다에 따뜻한 색이 번지고, 그 풍경은 그대로 그림이 되어 어두운 천장에 떠올랐다. 꼭 신영복의 판화 그림 같았다. 그것은 그대로 하나의 은유적인 메시지였다. 두려워 말라. 나는 호주로 돌아와 아이를 낳았고, 아이 아빠와의 결혼도 조금 더 연장됐다.


몇 년이 지났다. 아이가 생일 선물이라며 학교에서 그린 그림을 가져왔다. 그림 속 나는 활짝 웃으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인데 내 머리 위엔 불꽃놀이가 펑펑 터지고, 노란 별이 가득하다. 내 뒤로는 나무가 빽빽하고, 발 밑은 산이다.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여긴 꿈속의 그곳이었다. 두려워하는 나를 보고 보름달을 띄워준 것은 혹시 너였을까? 춥고 고독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쓰라렸던 그 길에 이제 별이 빛나고, 불꽃놀이가 터지고, 나는 행복해 보인다. 어떤 셀카에서보다 더.


가끔은, 어른도 어린이에게 구원을 받는다. 어린이일 때의 나는 몰랐다. 작고 약한 나는 부모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지금은 안다. 부모도 자식을 필요로 한다는 걸. 작고 약하고 놀라운 어린이만큼의 구멍이, 모든 부모의 가슴에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태리에서 축구 본 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