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니 Jul 18. 2022

이혼하기 좋은 사람

로맨틱한 파트너에서 육아 파트너가 됐다

딱, 또각.


한밤중에 손톱 깎는 소리. 아빠 집에 다녀온 아이의 손톱이 너무 긴 것을 이제야 발견한 탓이다. 공동 육아를 시작한 지 벌써 몇 년 째지만, 아이 아빠는 아이의 손톱을 깎아준 적이 한 번도 없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아이는 손톱도 어찌 빨리 자라는지, 이러고 내일 학교에 가면 '엄마 없는 애'가 되겠다, 생각한다. 이건 우리 엄마가 자주 했던 말로, 학교 다닐 때 인사하고 나가려는 날 부엌에서 힐끔 보고는, 0.1초 만에 얼굴에 튄 치약, 버짐, 머리의 삐친 부분 같은 걸 스캔해서 현관으로 달려와 소맷 자락에 침을 묻혀 닦거나 할 때, 진저리 치며 엄마의 손을 벗어나려는 내게,


"야! 너 그러고 나가면 엄마 없는 애라 그래!"


이렇게 나오는 말이다. 깔끔하지 못하면 집에서 신경 쓰지 않는 애로 생각될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얕보이거나 소홀한 대접을 받지 않을까, 그런 우려가 담긴 말인 듯하다. 그리고 그 깔끔에 따르는 노동은 당연히 엄마 책임이라는 뜻도 있다.


내 아이는 일주일에 2-3일, 그 '엄마 없는 애'가 되는데, 그러니까 아빠 집에 가 있는 동안이다. 애 아빠는 대체로 아이를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학교에서 픽업하여 일요일이나 토요일에 데려다주는데, 그동안 아이가 무슨 옷을 입고, 숙제는 잘해가는지, 건강한 음식을 먹고 있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하지 않냐... 궁금하다. 그러나 대충 짐작은 간다. 올 때의 꼬락서니를 보면 말이지요. 아이는 약한 아토피가 있어, 의사가 항상 보습을 하라고 말했는데, 돌아올 때의 피부는 항상 까칠하다. 평소에 모이스처라이저라는 것을 믿지 않는 그를 아는 나는 애초에 그가 그걸 챙기리라는 기대도 않는다. 그의 집에 종종 가셔서 그를 도와주시는 아이의 할머니께는 가끔 귀띔해 드리지만... 여전히 아이는 가끔 짤뚱하거나 집에서 입는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녀온다. 물론 어린이 옷이란 계절의 초입엔 약간 크다가 계절이 지나갈 때쯤엔 짧아지는 것이고, 무릎이란 튀어나오거나 구멍이 나기 마련인 것이라, 어린이의 말쑥함이란 부모의 독수리 같은 관찰과 쉴 새 없는 노동이 필요한 것이긴 하다.


얼마 전엔 반 전체 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전날 저녁 리마인드 문자까지 보냈는데, 찍혀 온 사진을 보니 아이는 내가 사 준 새 옷을 입고 있긴 했다. 문제는, 그 옷이 약간 큰 사이즈인 탓에 목 주변이 좀 헐렁하고, 가슴팍에 호랑이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어 전체 사진으론 참 맞지 않는 옷이었단 것이다. 이쯤 되면 이건 노동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지 않나요.


이런 일들에 대한 내 사소한 복수라면, 호주 럭비 팀의 어린이용 저지를 구입한 것이다. 호주 럭비는 전통 럭비 리그의 열렬한 추종자(이를테면, 애 아빠)들이 사이비 종교 보듯 하는 스포츠로, 멜버른에서 특히 인기가 있다. 우연히 중고 샵에 들러 멜버른 칼튼 FC의 저지 점퍼를 발견한 나는, 마침 옷 가게를 지키던 아저씨에게 이 팀이 유명한지, 입고 다니면 애가 쪽팔리는 팀은 아닌지 물은 후, 그 점퍼를 애 아빠가 어린이를 픽업하는 날 입혀 보냈다. 말하자면, 전처의 조크랄까. 그는 내게 딱히 리액션을 주진 않았지만, 교문 앞에서 애를 픽업할 때 그의 표정을 생각하면 솔직히 좀 신난다. 한국으로 치면 뭘까, 뭐, NC 팬인 남편이 애를 데리러 가는 날 애에게 두산 유니폼을 입혀 보내는 것쯤 되려나? 정 싫으면 자켓을 벗겨 자기 집 옷장에 처박을 수도 있는데, 매번 돌아오는 걸 보면 (수많은 양말, 속옷, 모자와는 달리) 역시 자기 집에 보관하기엔 뭔가 찝찝한 물건인 듯하다. 후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나는 대체로 잘 지내고 있다. 옆집 아줌마가 너네 이혼한 사이 맞냐고 할 정도다. 그야... 나는 그를 '내 자식' 이란 중대한 사업의 공동 CEO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가족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생각해 보자. 놀랍게도 많은 부분이 덜 짜증 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을 생명의 은인이자 최대 투자자라고 생각하면 사소한 데서 오는 짜증은 약간 가라앉을 수도? 나는 공동 CEO의 차질 없는 업무 수행을 위해 아이의 지메일을 만들어 양쪽의 메일에 포워딩되도록 해 놓았고, 이것이 학교에 입력된 '비상 연락처'에 들어간다. 아이의 일정은 아이의 구글 캘린더에 입력하여 공유한다. 중요한 것은 문자로 한 번 더 환기시킨다. 그럼에도 막상 그날이 되어 그 일정이 실행됐는지? 그것은 신의 뜻이랄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사소한 부분을 넘어간다면, 전체적으로 나와 그는 그럭저럭 참여에 의의를 두며 육아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그는 그가 잘하는 것- 캠핑과 낚시, 로드 트립 등-을 하고, 나는 그 외 대부분을 한다. 다행히도, 나는 그에게 우리가 더 이상 인생의 파트너는 아니지만, 육아의 파트너라는 점을 초기부터 주지시킬 수 있었다. 이 세상엔 이혼 부모 교육이란 게 존재하는데, 나에게 가장 유용했던 내용은 이것- "아이가 그의 집에 간 순간부터 그의 육아 방식에는 참견할 수 없다. 아이가 저녁마다 그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패스트푸드를 먹더라도, 일단 의식주가 해결됐다면,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여기 직계 가족이 있거나 돈이 많지도 않은 주제에 처음부터 주 양육권을 목표로 했는데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 아빠는 적극적으로 육아를 하거나 지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의욕만은 넘쳤기 때문이었다. 그 의욕을 현실과 가깝게 만드는 것이 양육권 협상의 가장 큰 관건이었다. 이혼 부모 교육은 그에게 아이가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줬고, 그것은 그가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계기가 된 듯했다. 질질 끌었던 양육 협상은 어쨌든 대부분 원하는 대로 결론이 났다. 다행히 그에게는 현지 가족이 있고, 그들이 그를 도울 것이라 생각하면 그래도 안심이 된다. 나는 지금까지도 (구) 시댁과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데, 나를 9년 여간, 그를 3n년여간 지켜보신 그분들은, 모든 과정에서 공평하게 행동하셨고, 또 정보를 흘려주셨다. 그 점에 참으로 감사한다. 덕분에 내 아이가 "엄마만 있는 아이"가 되지 않아서.


누군가를 진정 알려면 그와 이혼해 봐야 한단 말이 있다. 웃픈 이야기다. 연인 사이에서 헤어지는 것과는 달리 이혼은 가족과 재산, 아이, 집, 친구, 직업까지 영향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그의 상상도 못 했던 야비하고 치사한 면을 봤는가? 봤다. 그러나 육아 부분을 고려한다면 그에게 이혼 상대로서 C 정도는 주고 싶다. 그는 부정적 감정을 애에게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을 정도의 양식은 있는 인간이었고, 아이와 함께 있는 동안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에 감사해야 할까? 그는 당연한 도리를 하고 있을 뿐인데? 그러나 육아의 세상에 당연한 것이 어디 있으랴. 이쪽은 양육비를 안내면 정부에서 원천징수를 해 주는데 그거 안 내려고 캐시잡하는 인간도 있다 들었다. 다행히 나는 굳이 그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나와 아이의 삶을 꾸릴 수 있다. 정부도 나에게 각종 할인 혜택과 연금을 지급한다. (절대 충분하진 않지만)


그는 그의 여력이 허락하는 며칠간 주 양육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아이의 삶에 포함됐고, 나는 그동안 공부든 휴식이든 일이든 하고 있으니 현재로썬 이것이 최선의 협업일 것이다. 그러니, 감사해야겠지, 하고 애 머리를 깎이며 생각한다. (말해 뭐해 싶지만, 그는 애 이발도 시켜준 적이 없다.) 아이는 네 살부터 자기 손톱은 자기가 깎도록 했다.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 완벽한 부모가 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엔 그 길 밖엔 없었다. 난 생각했다. 못난 엄마라도 있는 게, 엄마가 없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육아 일기엔 이렇게 썼다.


-널 가졌을 때, 사실 엄마 아빠는 헤어지려 하고 있었어. 그런데 기적처럼, 생길 수 없다고 했던 아이가 생겼지. 그때 엄마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엄마는 너와 만나는 길을 택했지.


네가 십 대가 되고 언젠가, 넌 엄마를 원망할까? 낳지 않는 게 나았다고 엄마한테 따질 때가 있을까?


우리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피부에 닿는 공기조차 따가워서 좋은 날을 상상하지 못할 때가 와도. 너는 태어났고, 그것 자체가 당위고 자연이야. 눈도 없고 손발도 없이 온몸으로 땅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수 있는 곳을 찾으려 온 감각을 집중하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도 살아있는 동안 온 마음을 다해 노력하자. 그냥 그곳으로 천천히, 우리 자신을 끌고 가자.


그리고 아빠도 꼭 그랬으면 좋겠다.





-

덧-

호주에서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은 모두 Domestic Violence 이며 여기엔 신체/정신적 폭력뿐 아니라 금전적 폭력도 포함됩니다. 특히 신체적 폭력의 경우 경찰에게 바로 연락하시고 (000) 언어가 어려우시면 통역을 요청하세요. 상담이 필요하신 경우 담당 GP에게 상담하시면 6번까지 무료로 카운슬링을 받을 수 있는 멘털 헬스 캐어 플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중 이혼 부모 교육은 Centacare라는 카톨릭계 재단에서 하고 있으며 무료입니다. Centacare는 또한 소득 수준에 따라 무료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양육권 조정의 중개, 카운슬링 등을 운영하고 있어요. 이혼 서류 작성에 도움이 필요하시면 무료 Legal Aid도 이용하실 수 있지만 Women's Legal이라는 여성 변호사들의 비영리 단체를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단체들에서는 필요하면 다른 단체 (쉼터 등)를 소개하거나 연결해 주기도 합니다. 또 별거를 시작하셨다면 바로 센터링크에 가셔서 Separated로 상태 변경을 알리시면 다음 페이 주부터 싱글 패런트 페이먼트가 시작됩니다. (금액은  양육 일수에 따라 달라지며 7세까지 해당) 렌트 리베이트와 전기세 할인, 차일드 캐어/스쿨 캐어 할인 등의 혜택을 받으실 수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이가 가져오는 계시에 대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