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뉴욕 여행하기 1일 차
학기가 끝나도 대학원생은 사실 연구를 지속해야 한다. 여기서도 이 시기를 여름방학, 즉 Summer break라고들 칭하나 사실상 이 시기는 대학원생에게 있어 코스웍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최적의 연구 시기이다. 그렇지만 미국에 나올 기회가 다신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항상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이렇게 아쉬워할 바에는 깔끔하게 놀고 와서 집중할 때 집중하자"라는 생각을 갖고 결단을 내렸다. 여름방학 동안 한 달에 한 번씩은 여행 가기로.
처음으로 선택한 여행지는 바로 뉴욕과 보스턴이었다. 보스턴은 사실 뉴욕을 가는 김에 근처에 있는 지역이라 들리는 겸 끼워 넣은 녀석이고, 메인은 역시나 뉴욕이었다. 뉴욕을 굳이 선택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뉴욕은 겨울에 가기엔 정말 추운 동네다
2. 겨울에 겨울옷을 챙겨가려면 기내용 캐리어로는 공간이 부족하고 수하물 추가하는 순간 비용은 덤
3. 겨울에는 걸어 다니기에는 추워서 대중교통을 더 많이 이용할 테고 역시 비용은 덤
4. 그냥 이런저런 이유로 뉴욕을 꼭 가보고 싶었다
특히 4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미국의 유명 래퍼 Jay Z가 부른 Empire state of mind라는 노래였다. 코러스마다 여가수가 "New Yooooork~"이라고 하는 노래를 말하면 다들 "아 그 노래?"라고 할만한, 당신이 아는 그 노래다. 사실상 뉴욕 찬양가에 가까운 그 노래의 가사는 나에게 뉴욕에 대한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궁금하면 코러스 부분 가사만 해석해 보시라.
정신 차려보니 이미 비행기표는 결제했고 눈떠보니 뉴욕 LaGuardia 공항이었다.(빠르고 극적인 전개)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버스를 타고 간 곳은 Harlem이었다. 사실은 할렘을 가려던 게 아니라 할렘가에 위치한 Sylvia's라는 맛집에서 점심을 먹기 위함이었다. Sylvia's는 미국 흑인(African American)들의 소울푸드인 후라이드 치킨을 파는 곳으로 유명한 곳인데, 위치가 그 유명한 할렘이다 보니 사실 가기가 망설여졌다. 그렇지만 숙소가는 버스가 마침 대낮에 할렘 중심가를 지나는 중이었고, 지금 아니면 숙소에서 할렘까지 이동해볼 일은 없겠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목적지와 가장 가까운 할렘 한가운데에 내렸다.
정거장에 내려서 잠깐 식당으로 걸어가는 동안 느낀 점은,
1. 흑인이 정말 많다
2. 동양인은 나밖에 없다
3. 생각보다 백인들도 종종 보인다
4. 대낮엔 생각했던만큼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니다
내가 상상하던 할렘은 대낮에도 흑인들이 툭하면 시비 걸고 돈 뜯는 곳이고 범죄가 만연한 곳이었는데, 생각 외로 사람들이 나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가끔 쳐다보는 눈초리는 "응? 여기에 동양인 남자가? 혼자서? 왜?" 이런 느낌이었다. 어딜 가나 많은 중국인, 인도인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니, 의외이긴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목적지로 '무혈입성' 하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할렘가는 근 몇십 년간 지역 균형발전 정책에 의거하여 정부에서 거대 자본들을 유입시켰고, 그 외에 맨하탄 중심부의 월세도 폭등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밀려난 거주민들도 맨하탄의 북부인 할렘쪽으로 유입되면서 일종의 Gentrification(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 탓에 옛날에 모두가 알던 '범죄의 온상', '빈민가' 할렘에서 많이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할렘에 오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인 Sylvia's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일단 비싸다. 뉴욕에서 처음 간 레스토랑이었고, 처음으로 뉴욕 물가를 마주한 곳인 탓에 더욱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절대 저렴하지 않다. 그래도 다신 못 올지도 모르는 뉴욕까지 와서 돈을 아끼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는 마인드로 거부감을 거뜬히 극복한 후 맛있게 먹고 나왔다. 고작 후라이드 치킨에서 닭다리의 풍성한 육즙과 촉촉함, 그리고 튀김옷의 바삭함까지 느껴지다니, 맛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Sylvia's에서 식사를 마치고 숙소까지는 할렘가 중심부를 지나서 걷는 쪽을 택했다. 물론 버스나 지하철을 탈 수도 있었지만, 한번 탈 때마다 2.4달러를 내야 하고, 지금이 아니면 여행하는 동안 할렘을 걸어볼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캐리어를 끌고 마냥 걸었다.
숙소는 맨해튼 북부의 UWS(Upper West Side)에 잡았는데, 호텔이 아닌 에어비앤비였다. 호텔값은 1박만 하더라도 최저 200달러에서 300달러 정도는 우습게 부르는 게 맨해튼이라, 비교적 저렴한 에어비앤비에 1박당 100달러 꼴로 지불하는 쪽을 택했다(물론 이것도 싼 게 아니지). 비록 아파트의 전체 유닛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방 한 칸만 제공하는 것이라 썩 훌륭한 시설은 아니었지만, 이곳이 뉴욕 중의 뉴욕인 맨해튼의 부촌인 UWS라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수긍할만한 가격이었다.
첫날이라 많이 피곤하고 출발시간도 새벽이었기에 몸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지불한 숙소 값과 비행기 값을 N분의 1을 했을 때의 가치를 따져보면 하루조차 버리기가 아까워서 여기저기 다녀보았다. 숙소에 짐을 놓고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건 오후 5시, 더운 날씨에 비까지 오고 있어서 사방이 습했다. 쓰레기가 즐비하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담배보다 대마를 더 많이 피우는 곳이 뉴욕이었다. 게다가 홈리스들이 여기저기에 노상방뇨를 해놓은 탓에 그날의 뉴욕은 나에게 끔찍한 냄새로 기억에 남는다. "여름철 사람이 북적거리는 공중화장실의 쓰레기통 옆에 서있는데 때마침 누군가 볼일 보면서 피우는 대마 냄새를 맡는 것 같다"는 표현이 그날의 '뉴욕 냄새'를 가장 현실적으로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다. 뉴욕 거리에서 느낀 점들은 이 밖에도 정말 많은데, 이는 다음 편에서 차차 후술 하겠다.
낯선 뉴욕의 오후를 가로질러 간 곳은 뉴욕의 역사 깊은 백화점인 Macy's 였다. 미국에 있어본 사람들은 "메이시스? 그거 우리 동네에도 있는 그거 아니야? 거긴 뭐가 그렇게 특별한데?"라고들 할 것이다. 하지만 뉴욕에 위치한 이 메이시스는 1924년 이래로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등극했던 곳이다. 물론 2009년부터는 우리나라의 부산 센텀시티에 위치한 신세계백화점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가장 큰 매장도 가장 최신화된 건물도 아니지만, 무려 1902년부터 이 정도 규모의 백화점이 이곳에 존재했다는 것은 놀라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실 나는 쇼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그 안에 들어선 브랜드와 상품을 구경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1920년부터 설치되어 운행되고 있는, 1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목조 에스컬레이터였다. 실질적인 작동부와 내부 부품은 금속이겠지만, 나무로 된 부분들끼리 스치고 부딪히는 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성은 정말로 새로웠다. 고작 에스컬레이터 따위에서 아늑함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다음으로 가본 곳은 뉴욕에서 유명한 랜드마크 중 하나인 Vessel이다. 이 구조물은 46m 상당의 금속제 구조물인데, 신기하게도 이탈리아에서 금속조각들이 제작되어 허드슨강을 통한 선박 편으로 미국으로 배송되어 조립된 녀석이라고 한다. 하지만 최근 1년간 3번이나 투신자살사고가 발생하면서 지금은 무기한 폐쇄되어버린 구조물이다. 가봤더니 역시 곳곳에 경찰차와 경찰이 배치되어 무단 입장을 막으면서 허튼짓하는 사람 없나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아직 해가 저물기 전에 좀 더 돌아다녀야겠다는 생각에 가볼 만한 곳을 찾다가 메이시스 바로 옆에 있는 Madison Square Garden을 찾았다. 이곳은 뉴욕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경기장이며, 한때는 한국의 2030 남자라면 누구나 아는 WWE 레슬링 경기가 열리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는 NBA(농구)와 NHL(하키) 리그 뉴욕팀의 홈구장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 볼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투어 시간을 놓친 데다가 스포츠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외관만 보고 지나쳤다. 경기장의 지하에는 미국 기차역 중 가장 붐빈다고 하는 Pensylvania station(펜실베이니아 역)이 자리 잡고 있다.
해가 저물고 밤이 되자 마지막으로 간 곳은 Edge(에지)라는 건물의 전망대이다. 에지는 베슬 바로 옆에 위치한 뉴욕의 고층건물인데, 이곳의 전망대에서는 뉴욕의 다운타운과 업타운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장점과 허드슨 강 너머에 위치한 뉴저지 까지도 볼 수 있어서 인기가 많다. 특히 전망대 높이에 설치된, 천장이 없는 발코니(라고 부르는 게 맞나)에 접근할 수가 있어서 엄청난 개방감을 체험할 수 있는 이색 장소이다. 하지만 내가 갔을 때에는 비구름이 전망대 밑에 자욱하게 깔린 데다가 천둥번개까지 치는 바람에 발코니의 접근이 제한되었다. 그저 전망대 창문을 타고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가 아쉬움에서 나오는 내 눈물인 양 감정이입하면서 안개구름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뉴욕의 야경을 보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1일 차 일정은 이 정도로 마치고 뉴욕 지하철에 몸을 싣고서 숙소로 돌아왔다. 뉴욕 지하철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지하철은 내 뉴욕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였기에 다음 일정에서 계속 설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