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뉴욕 여행하기 2일 차
뉴욕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고, 두 번째 하루가 찾아왔다. 숙소 근처에는 학교가 있어서인지 이른 아침부터 애들이 장난치고 떠드는 소리에 알람보다 일찍이 눈이 떠졌다. 전날 저녁을 대충 먹어서 배고프기도 하고, 아점으로 퉁치고 점심을 건너뛰는 게 여행 일정이나 여행경비 면에서도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씻기도 전에 뭐 먹을지부터 검색해 보았다. 마침 숙소 근처에 Absolute Bagels이라는 가게가 구글 지도에서 2000개가 넘는 리뷰와 함께 평점 4.6을 기록하고 있었다.
보통 구글 리뷰의 별점 개수는 못 믿을 경우가 많더라도 리뷰 개수는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물론 리뷰 개수도 가게에서 '리뷰 작성 시 할인' 등의 이벤트를 진행할 수도 있으니 절대적인 평가척도가 될 순 없지만, 아직까지는 미국에서 한국처럼 구글 리뷰나 SNS 업로드로 할인을 진행하는 레스토랑은 못 봤다(반박 시 당신 말이 맞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심사숙고(?) 끝에 베이글에 크림치즈 발라서 커피랑 삼키면 딱이겠다는 생각에 짐을 챙겨서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역시나 가게 밖에도 줄이 길게 나와있었고, 안에서는 열심히 베이글을 찍어내고 있었다. 단순히 베이글을 납품받아서 팔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한편, 밖에서부터 줄을 기다려 들어왔는데 'CASH ONLY'라는 끔찍한 문구를 보았지만, 이미 나는 계산대 앞이었고, 내 지갑엔 현금이 없었다. 결국은 주문부터 먼저 하고 점원이 안내해준 Bank of America 지점의 ATM에 가서 20달러를 뽑아 들고 왔다. 수수료 3달러는 덤... 능숙하게 안내해주는 걸 보니 이런 경우가 많았나 보다. '이렇게 까지 해서 사 먹어야 했나' 였던 내 생각은 한입 베어 물자 말자 '이렇게 까지 해서 먹어본 게 다행이다'로 바뀌었다. 아낌없이 넣어주는 크림치즈와 갓 구운 수제 베이글의 조합은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베이글과는 레벨이 달랐다. 아직까지 이 베이글은 뉴욕에서 가성비 최고였던 음식으로 기억에 남는다.
베이글과 커피로 당과 카페인을 충전한 후, 곧바로 향한 곳은 현대미술의 성지, MoMA(Museum of Modern Art)였다. 세계 방방곡곡의 거장들의 작품과 더불어 신예 작가들의 작품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현대미술 종합 선물세트' 같은 곳이었다.
현대미술, 그거 무슨 재미로 보는 건데?
나도 미술에 관한 남다른 지식이 있는 사람은 아니고, 그저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현대미술이 좀 더 나에게 와닿는 편이다. 내가 현대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작가는 어쩌다 이런 걸 만들게 되었을까?"
"이것도 작품이라고?"
"이 작품은 뭘로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러한 일련의 의문들을 가지면서 작품을 군데군데 뜯어본다. 그러면서 그 의문에 대해 내가 생각한 정답을 나름 정리해본다. 그다음에 바로 옆에 있는 작품 설명에서 내 생각과 작가의 생각을 비교해 본다. 내 생각이 정답에 가까웠다면 그게 하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고, 만약 작가의 생각과 다르거나 빗나갔다면 이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하거나 때로는 적극 수용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게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물론 '정답'이라는 것은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나 현대미술 작가들은 작품의 메시지에 대한 판단과 그 결론을 관객들에게 전가하고, 작품을 통해 '이런 것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건 어떻게 생각하면 작가가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주는 '선물'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 후에 다시 작품으로 시선을 옮기면, 그때야 비로소 작품이 내 생각의 여정에 '마침표'가 아닌 '화살표'를 찍어주는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내 생각에 대한 시시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고, 인상 깊었던 작품 몇개와 함께 후기를 이야기해 보겠다.
일단 엄청나게 많은 거장들의 작품이 한데 모여 있다. 나도 미술을 잘 모르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들었던 피카소, 세잔, 루소, 샤갈, 고흐, 몬드리안, 살바도르 달리부터 서울 예술의 전당에 한 번씩 전시가 열렸던 클림트, 야요이, 잭슨 폴록. 호안 미로, 프리다 칼로, 르 코르뷔지에, 앤디 워홀, 게다가 텔레비전 탑 '다다익선'으로 유명한 한국의 자랑스러운 비디오 아트 작가 故 백남준 작가님의 작품까지도 전시되어 있었다. 개중에는 이게 정말 원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들도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 더 자세히 느끼고 싶고, 앞서 말한 감상 과정을 거치고 싶었으나, 그러기에 MoMA는 너무나도 컸고, 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는 아쉬운 대로 이목을 끄는 작품들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머지는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와서 작품들을 충분히 느끼고 싶은 MoMA였다.
미술관을 나오고 나서는 하늘을 보니 비가 오기로 예정되어있음에도 아직은 하늘이 파래서 유람선을 탈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걸, 유람선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배가 고픈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뉴욕이라고 다르겠는가? 때마침 가는 길에 인도음식을 파는 푸드트럭이 하나 있길래 Lamb with rice 한 그릇을 8달러에 냉큼 집어왔다. 사실 큰 기대는 안 하고 급한 대로 허기를 채우려고 사 먹은 건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원래는 좀 더 일찍 도착해서 어디서 앉아서 먹으려 했지만, 계산해보니 열심히 걸어도 5분 남짓밖에 남질 않아서, 결국 이 녀석을 걸어가면서 쿰척쿰척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걸으며 끼니를 해결한 끝에 유람선이 출발하는 Pier 83에 정말 딱 맞게 도착했다. 이 유람선의 코스는 맨해튼 서쪽에 위치한 허드슨강의 부두를 떠나서 맨해튼 남쪽의 Liberty island에 위치한 Statue of Liberty(자유의 여신상) 근처까지 갔다가 맨해튼 동쪽의 East River위에 지어진 Brooklyn Bridge, Manhattan Bridge 밑을 지난 다음 다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간단히 말해 U자 코스로 갔다가 다시 U자 코스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배에 탑승한 가이드가 계속하여 건축물에 대한 가이드를 방송해준다.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진풍경에 내 마음은 이미 자유의 여신상과 뉴욕의 고층건물들에 뺏긴 지 오래, 내 입은 다물어지질 않았고, 내 손가락은 차마 카메라 셔터 위에서 떠나질 못했다.
다음 목적지는 Chesea Market이었고, 유람선에서 내리면 걸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부두에 다시 도착할 때쯤, 먹구름이 뉴저지 쪽에서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배에서 내리고 나서부터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나는 우산이 없었다. 선착장에서 잠깐 비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언제까지고 비가 멈추길 기다릴 수는 없는 법, 한 30분 동안 기다리다가 다음 목적지를 위해 버스정류장까지 비를 맞고 갔다. 버스정류장 근처에는 비를 피할 곳이 없어서 인근 건물의 움푹 파인 곳에서 간신히 머리만 젖지 않게 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가 퇴근시간이라서 그런지 교통체증이 극심했다. 온갖 꼬리물기와 감정 섞인 경적 울리기가 반복되던 쯤에 겨우 버스를 탔다. 그 광경이 익숙지 않았던 나는 곧바로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버스를 탔는데 카드단말기가 고장이었고, 나는 한숨을 쉬며 현금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내리겠다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버스기사가 "That is not your fault, you can go ahead" 라며 이미 비에 홀딱 젖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나를 구해주었다. 뉴욕에서는 당연한 처사 일지 몰라도 나는 그게 참 고마웠다. 한국처럼 버스전용차선 같은 게 없어서 그런가 그 시간의 버스는 거의 걷는 것 보다도 느렸다. 거의 10분에 한 블록을 겨우 이동하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유람선에서 내린 지 거의 2시간이 지나서야 Chelsea market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첼시마켓의 건물은 원래 Nabisco라는 비스킷 제조업체의 공장이었는데, 이후 많은 물량이 뉴저지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자 이 공장 건물을 매각하였다. 이후 30년 넘는 시간 동안 용도를 상실한 채 폐허로 남은 건물은 온갖 흉악범죄가 끊이질 않는 우범지역으로 전락해버렸다. 이후 재설계와 리모델링을 통해 뉴욕에 자리 잡은 거대한 식료품 매장인 첼시마켓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지금은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곳이 되었다. 버려진 과자공장이 이런 핫플레이스로 변신하다니, 미국의 실용주의가 보이는 예시다.
마침 Chelsea market 인근의 스타벅스 리저브에도 들려서 구경 좀 하다가 Washington square park(워싱턴 스퀘어 파크)를 지나서 뉴욕 패션의 성지, Soho(소호) 지역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이곳의 이름이 Soho인 이유는 맨해튼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Houston street의 남쪽(South)에 위치한다 해서 앞글자를 따서 'Soho'가 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Houston street의 북쪽(North)에는 'Noho'지역이 자리 잡고 있다. 일각에서는 런던 최고의 유흥지역인 Soho를 흉내내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나, 나는 전자에 더욱 믿음이 가는 편이다.
소호지역의 그 빽빽한 건물들은 대부분 명품 브랜드(한국에서 속칭 '에루샤'라고 하는 것들은 당연히 포함) 매장들이었다. 흡사 이탈리아에 갔을 때 본 밀라노 명품거리인 몬테 나폴레오네를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쇼핑이나 패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만한 곳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품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나이키, 아디다스 등등의 스포츠 브랜드들도 입점해 있다. 그렇지만 지역이 뉴욕 소호인지라 스포츠 매장들 조차 시그니쳐 스토어의 포스를 풀풀 풍긴다.
이것저것 둘러보고 나니 배도 고파서, 저녁은 간단하게 멕시코 요리를 먹었다. 역시나 구글 리뷰가 가장 많은 곳 중에서 다음 목적지인 Rockefeller center(록펠러 센터)로 가는 경로상에 있는 곳을 골랐다.
먹고 나서 천천히 뉴욕의 밤거리를 느끼다 보니 어느새 록펠러 센터에 도착했고, Top of the Rock 이라고도 불리는 록펠러 센터의 전망대로 곧장 올라갈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록펠러센터를 단일건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 록펠러센터는 이 주변에 세워진 건물들과 저층부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건물단지를 통틀어서 록펠러 센터라 명명한 것이다. 참고로 이곳의 상징과도 같은 이 고층빌딩은 70층에 259m나 되는 빌딩인데 완공시기가 1939년이라고 하니, 그 시절 한국의 상황을 떠올려본다면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싶을 정도이다. 각종 영화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록펠러 센터는 1987년에 미국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록펠러 센터의 전망대는 총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에는 난간 부근에 안전 목적상 유리벽이 띄엄띄엄 세워져 있다.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상층부에는 안개와 비의 중간쯤 되는 녀석이 계속해서 나에게 전신 미스트를 뿌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전망대 1층의 뷰가 3층의 뷰보다 훨씬 훌륭했다.
이 전망대의 장점이라면 전망대 치고는 인근 건물들과 비교적 비슷한 높이에 있는 덕에 항공사진 같은 느낌보다는 하늘과 건물이 맞닿는 스카이라인을 즐기기에 딱 좋은 높이라는 점, 그리고 전망대가 전부 천장이 없는 개방된 공간이라 고층빌딩에서의 개방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있다.
2일 차 여정은 훌륭한 베이글과 함께 시작하여 뉴욕의 이곳저곳을 다닌 끝에 비로소 끝이 났다. 사실 발목, 무릎, 허리가 너무나도 아팠지만, 어디든 가는 곳마다 기대 이상의 행복감을 주는 탓에 차마 욕심내서 다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되었던 하루를 달래기 위해 맥주 4캔을 사들고 왔지만, 결국 입에도 못 대고 씻자마자 기절해버렸다. 다음 여정을 기대하시라. Show must go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