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 여행한 이야기
보통은 여행은 혼자 다니거나, 정말 마음 맞는 사람과 둘이서 다니는 편이었다. 나에게 여행은 일상에서 이탈하여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온전히 새로운 경험에 오롯이 집중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온전한 나를 찾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여럿이 다니는 여행은 여행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칫 새로운 인간관계와 감정 소모의 늪에 빠지는 어리석은 선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보다 1년 먼저 미국에 들어와서 이곳저곳 여행을 해본 미국 여행 전문가 I가 여행 계획을 전부 수립해서 일찌감치 공개했고, 서부의 웬만한 볼거리들을 관통하는 그의 여행 계획은 도무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의 마케팅에 현혹되어 나 말고도 J와 H도 동참을 선언했는데, 두 친구 모두 내가 인정하는 훌륭한 친구들이었고, 우리는 과거에 많은 시간들을 공유하며 서로에 대한 일정 수준의 이해가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라면 이번 여행은 문제없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나를 비롯하여 I, J, H를 포함한 4명의 이방인은 늦은 밤 샌프란시스코의 한 에어비앤비에 모였다.
4명은 모두 다른 지역의 다른 학교(Texas A&M, UIUC, Virginia Tech, Purdue)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학부시절에 같이 보낸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만나볼 일이 없었던지라, 에어비앤비에서 보는 모습들이 2년 만에 처음 보는 모습인 경우도 있었다. 한 명이 샤워를 하는 동안 나머지 3명은 앉아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하며 넘치는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방인에게 낯선 타향에서 만난 벗이란 그 어떤 만남보다도 기쁘기 마련이다.
다음날부터 시작될 일정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도 할 이야깃거리들을 남겨놓기 위해 우린 각자의 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라는 이 도시의 이름은 가톨릭 교회의 성인 중 1명인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본래 멕시코 땅이었던 이곳은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미국 땅이 된 곳이다. 그래서인지, 샌프란시스코라는 지명부터('San'은 스페인어로, 영어로는 'Saint', 즉 성인을 뜻하는 말이다) 곳곳에 보이는 스페인어 간판 등, 멕시코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은 상쾌하고 시원했다. 때마침 미국의 이상고온 현상으로 인해 내가 있던 인디애나도 한 번씩 최고기온이 36~39도에 육박하곤 했는데, 샌프란시스코의 최고기온은 20도 정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었다. 돌아다니기에 딱 적당하고, 오랫동안 가만히 서있거나 앉아있으면 쌀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날씨였다. 같은 캘리포니아임에도 남부의 LA와는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푸르다 못해 살짝 남색 빛이 돌 정도로 녹진한 파란색을 띠고 있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Tartin Bakery(타르틴 베이커리)였다. 타르틴 베이커리는 2002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처음으로 창업한 베이커리이며, 현재는 곳곳에 분점을 운영하고 있고, 특이하게도 14개의 지점 중 해외지점 6개 모두가 한국에 위치해 있다(2022년 8월 기준). 한때 나도 빵을 좋아했지만, 헬창의 길을 걸으면서부터 탄수화물과의 적절한 거리두기를 실천해 왔던지라 빵집은 내발로 찾아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빵과 디저트에는 사족을 못쓰는 H가 꼭 가봐야 한다고 선언한 곳이었기에, 나도 기대감을 안고 오랜만에 베이커리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사실 하나씩 다 먹어보고 싶었지만, 깊은 고민 끝에 초콜릿 크루아상과 타르트 몇 개를 주문해서 들고 나왔고, 샌프란시스코의 정취를 즐기면서 이것들을 맛볼 최적의 장소를 찾고 있었다. 마침 우리가 있던 Mission district 근처에 Mission Dolores Park 가 있었고, 야자수 나무가 우거진 그 공원을 우리의 목적지로 놓고 걷기 시작했다.
평소에 빵이나 디저트를 즐겨먹는 편이 아니라, 마땅한 레퍼런스가 없어서 이 맛을 무엇에 비교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맛있었다. 재료를 아낌없이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고작 디저트에서 육즙이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괜히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곳이 아니었다. 한국에 가서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추억을 소환하러 타르틴 베이커리를 찾을 것 같다.
이 공원에서는 개들의 목줄을 풀어놓은 상태로 산책을 시키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 작은 강아지가 냄새를 맡고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 밑을 열심히 맴돌고 있었다. 한번 와서 샅샅이 훑고 간 줄 알았는데, 방심한 찰나에 다시 와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진 거 없는지 한번 더 수색하고 갔다. 개도 맛있는 음식은 알아보는 모양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첫끼(?)를 화려한 디저트로 장식하고, 한 끼 식사는 차고 넘칠 정도의 칼로리를 충전했으니 다음 목적지로 슬슬 이동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Twin Peaks(트윈 픽스), 말 그대로 두 개의 봉우리이다. "봉우리라니깐 그냥 가볍게 마실이나 갔다 오면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간다면 오산이다. 오르막길과 골목길의 콤비네이션을 막상 겪고 나면, 동네 뒷산 치고는 가볍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올라가서 밑을 보니 그래도 고생한 값을 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낮보다는 밤에 올라오면 더욱 멋진 야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야경을 보러 밤에 다시 올라올 생각은 없었다.(으어 힘들어;;;)
높이로 치면 282m 밖에 안 되는 '산'이라기보단 '언덕'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바다 근처에 있다 보니 해발고도로서의 282m가 확연하게 느껴지다 보니 생각보다 높아 보였다. 그리고 올라갈 때도 낮다는 생각이 안들 정도로 힘들었다. 그래도 샌프란시스코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장소로써 이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
저 봉우리 좀 잠깐 올라갔다고 아침 일찍 충전해놓은 당분이 그새 다 사라졌고, 배고픔이 찾아왔다. 배가 고프면 여행은 재미없어지게 마련이다. Twin Peaks를 내려와서 곧장 향한 곳은 Super Duper(슈퍼 두퍼)라는 캘리포니아의 햄버거 체인점이다. 나는 이런 로컬 브랜드 레스토랑에 갈 때마다 이 지역의 특산품이라고 생각하며, 다시는 이곳에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무조건 가장 비싸거나 가장 칼로리가 높은 시그니쳐 메뉴를 물색한다.
여기서 내가 찾은 시그니쳐 메뉴는 바로 패티가 두장 들어간 Super Burger였다. 아쉽게도 Five guys처럼 토핑들이 무료가 아니라서, 별도의 돈을 내고 토핑을 추가해야 했다. 이 밖에도 Garlic fires와 음료수를 사이드로 주문했고, 그러고 나니 총지출은 24불이었다. 이곳이 샌프란시스코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가성비가 좋은 음식은 아니었다. 아무튼, 패티에는 육즙이 가득했고, Super burger와 Garlic fires를 선택한 것에 대해선 한치의 후회도 없었다.
기름진 음식으로 허기를 달랜 후 향한 곳은 Painted Ladies건물이다. 샌프란시스코의 경사로에 맞춰 세워진 이 세모 지붕의 건물들은 마치 다른 색의 옷을 입은 7명의 아가씨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비탈길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건물이 유명한 이유는, 이 화려한 건물이 샌프란시스코에 자본들이 대거 모이던 시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축가들은 막대한 부와 자본을 건물에 투영시켜 뽐내고자 했고, 그 결과 탄생한 건물이다. 더욱 가까이 다가가 보면, 창문들이 상당히 많고, 온갖 군데에 장식을 아낌없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Painted Ladies는 이곳에 있는 게 전부가 아니고, 곳곳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도 완전히 똑같은 건물을 다른 곳에서 보고 이게 원조라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샌프란시스코뿐만이 아닌 다른 도시에도 종종 보인다고 하니, 이젠 비슷한 건물을 보게 된다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
Painted Ladies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City hall(시청)을 보러 갔다. 관공서 건물이 멋있어 봤자겠지 싶겠지만, 막상 가서 보면 상당히 웅장하다. 뭔가 전형적인 미국의 시청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좀 더 크고 아름답게 생겼다. 군데군데 금색으로 장식도 되어 있고, 관공서가 이렇게나 아름다울 일인가 싶을 정도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박물관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청 앞에는 줄지어 서있는 나무 사이에 모래가 덮여있는 Civic center plaza가 있다. 왜 모래밭으로 놔두고 풀을 심지 않았는지 궁금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질 않는다.(이유를 아시는 분은 댓글에 작성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시청을 찍은 사진에서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알아챘겠지만, 샌프란시스코 도시 한복판 사거리 위에는 웬 전깃줄들이 이상한 모양으로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도 처음에 저게 뭔가 싶었는데, 이 전깃줄은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노면전차의 밥줄이다. 신기하게도 이 노면전차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전차나 지하철처럼 땅 위에 난 선로 위를 지나다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버스처럼 바퀴가 달려있다. 다만 주 동력원이 저 전깃줄에서 나오는 전기인 것이다.
저 전차마다 위에 뒤쪽 위에 달린 노란색 더듬이 2개가 있는데, 이 더듬이로 전기를 공급받는다. 이 더듬이는 생각보다 길고 유연해서, 고정된 궤도 위를 다니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도로를 누비는 버스 형태의 전차임에도 계속 전깃줄에 붙어서 버스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때때로는 이 더듬이를 잠깐 접고서 다른 차선으로 추월을 하는 모습도 보았다.
이렇게 전깃줄을 인프라로 구축하는 비용을 들여서까지 전차를 대중교통으로 운용하는 이유를 자세히 알아보진 않았지만, 캘리포니아 주의 환경 관련 법제로 인해 높아진 비싼 휘발유값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이렇게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차가 많진 않았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흔해빠진 게 하이브리드 차와 테슬라다.
여행 첫날인 데다가 햇빛을 쐬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조금 텐션이 떨어졌다. 카페인도 충전할 겸 Philz Coffee에 들렸다. Philz coffee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커피 브랜드이고, 이제는 LA, 시카고, 워싱턴에도 지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 브랜드의 특징이라면, 고유한 원두 블렌딩으로 제작된 커피를 판매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는 Mint Mojito coffee랬는데, 나는 커피에서 민트맛과 모히또 맛이 나는 걸 상상조차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나마 맘에 드는 기본 메뉴를 주문했다. J는 민트 모히또 커피를 주문했길래 한 모금 맛을 봤는데, 음... 범상치 않은 메뉴 이름처럼 범상치 않은 맛이 났다. 한 번쯤 맛보는 것은 나쁘지 않겠지만, 또 먹어보고 싶은 맛은 아니었다.
적당한 휴식시간을 가진 후, 카페에서 나서기 전 저녁 메뉴를 정했다. 나름 평과 리뷰가 좋은 곳들을 골라보았고, 선택지는 몇 가지로 좁혀졌다. 그중에서 Pacific rim(환태평양 지역) 요리를 하는 Prubechu라는 레스토랑이 선정되었다. 환태평양 지역이면 일본, 뉴질랜드, 호주 등등 너무나도 다양한 나라가 포함될 텐데 대체 어디 요리가 환태평양 요리냐 싶어서 자세히 찾아보니, 신혼여행으로 많이 가는 Guam(괌 섬) 지역의 요리를 파는 곳이란다.
카페에서 레스토랑까지 걸어가는데, 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곳곳에서 대마 냄새가 나고, 홈리스들이 과연 누가 사갈까 의심스러운 물건들을 노상에서 팔고 있었다. 괜히 눈 마주치면 말 걸거나 무슨 일이 날까 봐 무서운 곳이었고, 혼자 여행 왔다면 분위기를 직감하고 바로 돌아서 나왔을 거였지만, 그래도 4명이 같이 다니면서 공포감을 분산한 채로 그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신호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덩치 큰 흑인 한 명이 우리 쪽으로 침을 뱉었고, 맞지는 않았지만, 발끈한 I가 반사적으로 그 흑인을 쳐다보았더니 "뭐 할 말 있냐?"라고 두어번 중얼거리며 우리 쪽을 향해 슬그머니 다가왔다. 때마침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어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는데, 자칫하면 귀찮은 일에 휘말릴 뻔했다.
어렵사리 식당에 도착해서 예약 없이도 잠깐 빈 예약석에 앉을 수 있었고, 메뉴판을 펼치는 순간 도대체 무엇을 먹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영어로 쓰여는 있다만, 재료가 뭐가 들었는지 말고는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메뉴들이었다. 결국 메뉴의 카테고리와 재료, 그리고 가격만 읽어보고 적당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주문했다.
기다렸던 요리가 나왔고, 첫인상은 정말 처음 보는 신기한 비주얼을 가진 요리들이었다는 것이다. "괌 사람들이 이런 걸 먹고 사는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나씩 먹어보았다. 신기하게도 생긴 것에 비해 맛은 상당히 괜찮았다. 특히 적색 양배추가 들어간 음식에서는 간짜장 맛이 났다. 이런 재료들의 조합으로도 괜찮은 맛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신기함의 대가로 3가지 메뉴를 먹고 나온 비용은 팁과 세금을 포함하여 103달러였다(가격마저도 신기할 따름이다).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거하여 모두의 동의하에 결정한 식당이었기에 우리는 누구를 탓하지도, 탓할 수도 없었다.
여름의 샌프란시스코는 정말 시원하고, 맑고, 푸르렀다. 주변에서는 여름에 캘리포니아 가면 타 죽는다고들 했지만, 샌프란시스코에 한해서는 좋은 피서지라고 생각한다. 한여름에도 가을 같은 선선한 날씨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니, 더위 걱정은 말고 들고 다닐 겉옷 하나를 챙겨오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