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타고 금문교 건넌 이야기
2일 차 여행의 메인 테마는 자전거 여행이었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Golden gate bridge(금문교)를 넘어 Sausalito(소샬리토)를 갔다가 돌아오는 게 대략적인 큰 그림이었다.
숙소를 나서자마자 우버를 타고 자전거를 대여하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바로 자전거를 타자니, 아침에 커피 한잔밖에 마시질 않아서 이대로 페달을 밟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 인천에서 부산까지 국토종주를 했던 경험을 토대로 봤을 때, 어제 봤던 샌프란시스코의 언덕길을 넘나들며 라이딩을 하는데 충분한 식량(특히 단당류)과 물이 없다면 소위 '봉크'라고 불리는 탈진상태에 빠지게 될 우려가 컸다.
어쨌든, 이런 경험을 토대로 뭐라도 먹어둬야겠다는 생각에 마침 열었던 카페에서 빵이라도 하나 먹어두고, 자전거를 빌리러 갔다. 자전거는 예상보다 괜찮은 자전거였다. 다만 내 자전거는 앞쪽 기어가 고정이어서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이 친절하게 자전거를 골라주면서 지도를 하나 펼치더니, 반납 장소와 가볼 만한 루트 등을 알려주었다. 자동차 렌트와 비슷하게도 반납 장소와 대여장소가 다르면 추가금이 붙는다. 자전거 4대를 빌렸는데 자물쇠를 달랑 한 개 주는 게 좀 섭섭하긴 했다.
오늘 여정의 길을 잘 알고 있는 I가 맨 앞에, 체력 수준이 어중간한 J와 H가 중간에, 그리고 내가 맨 뒤에 있었다. 내가 라이딩의 페이스를 올리지 않게 하기 위해 전날 밤에 "적어도 H를 앞질러 가진 않겠다"라는 식의 협정을 자진해서 맺어둔 상태였기에, 나는 이들의 등짝만 보고 쫓아가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는 특히나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있다. 아예 인도가 아닌 차도 한복판에 자전거 전용차선이 따로 명시되어 있고, 이게 전용인지 공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차들이 뒤에서 자전거를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비켜 지나가거나 자전거가 지나가기를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단순히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기보다도 문화와 시민의식이 잘 갖춰진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언덕 몇 개를 넘어서 가장 먼저 간 곳은 금문교 인근에 위치한 Palace of fine art였다. 샌프란시스코에 이런 형태의 건축물은 주변에 있지도 않은데 갑자기 덩그러니 있는 게 좀 이상했다. 설명을 잘 읽어보니 1915년에 열린 엑스포에서 전시를 하기 위해 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그 시절 건축했다고 보기엔 뭔가 고풍스럽고 고대 유적같이 생기긴 했지만, 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진 신전도 아니고, 그저 엑스포라는 단일 행사를 위해서 이 정도 규모의 건축물이 세워졌다는 게 놀라웠다.
인공호수 위에 세워진 모습이 마치 별장 같기도 하고, 산책하기에 좋은 공원 같았다. 이런 아름다운 전경 덕분에 Palace of fine art는 결혼식 장소로도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도 결혼식은 아니었지만, 웨딩사진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인파 속에서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신랑과 신부의 얼굴이 기억난다. 동네의 흔한 공원이 이 정도 수준이라니, 부러울 따름이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Golden gate bridge(금문교)였다. 사실 나를 비롯한 많은 여행객들이 생각하는 금문교의 이미지는 새파란 하늘에 선명하게 솟아있고 뻗어있는 새빨간 구조물의 이미지일 테지만, 내가 간 여름의 샌프란시스코는 금문교를 안갯속에 숨겨두고는 좀처럼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햇빛을 못 받다 보니 다리의 색깔도 빨간색이 아니라 검붉은 느낌이었다. 아쉽게도 샌프란시스코의 다른 곳들은 다 맑은데 유독 이곳만 이렇게 안개가 끼어있다. 찾아보니, 여름에는 이곳에서 육지의 뜨거운 공기와 바다의 습한 공기가 만나서 늘 이런 모습이라고 한다. 금문교 사진을 찍기에 이상적인 시기는 5월~6월, 그리고 9월~10월이라고 하니 참고하자.
경치 감상은 아쉬운 대로 이 정도로 마쳐두고, 이제 우리의 여정은 금문교 위로 향했다. 금문교의 한쪽은 보행자만 다닐 수 있도록, 그리고 반대쪽에는 자전거만 다닐 수 있도록 통제되어 있다. 오고 가는 자전거가 교행 하다가는 자칫 사고가 날 것처럼 생긴 좁은 길이었지만, 다들 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센스있게 피해 다녔다.
금문교 한가운데는 안개에 싸여 있었고, 그 안에서는 매우 습하면서도 차가운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반팔 반바지로만 차려입은 나에게는 조금 추웠다. 바람이 얼마나 강하게 불었는지, 일부 구간에서는 방향을 유지하면서 자전거의 중심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때로는 역풍이 불어서 페달조차 제대로 밟기가 힘들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던 J는 바람이 세게 불어 난간 밖으로 떨어질까 봐 많은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순조롭게 건너는 데 성공했다.
금문교를 건너자마자 거짓말같이 안개가 걷히고 어제 보았던 새파란 하늘이 다시 나타났다. 햇빛이 다시 내리쬐면서 기온도 따뜻해졌다. Sausalito로 향하는 길은 거의 내리막길이 대부분이었고, 굽이친 도로를 지날 때마다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면서 라이드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신나는 내리막길이 돌아올 때는 고된 오르막길이 될 거라는 걱정이 모두의 마음 한편에 쌓이고 있었다.
마침내 오늘 라이딩의 터닝포인트인 Sausalito(소샬리토)에 도착했다. 어제 보았던 샌프란시스코의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사람들도 많고 분위기도 관광지 느낌이 물씬 났다. 듣기로는 예술가들과 부자들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한다. 여기저기 식당과 가게들이 많았고, 해변을 따라 예쁜 집들이 세워져 있었다. 바다 쪽에는 개인 요트로 보이는 하얀 배들이 빽빽이 부두를 메우고 있었다. 한국에서 내가 가본 곳 중에 이곳과 가장 비슷한 곳을 골라보라면, 여수를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다들 자전거 안장 위에서 열량을 소비한 후라, 배가 고팠고, 허겁지겁 점심을 먹으러 Napa valley burger company로 향했다. 구글 리뷰 4.5점에 1400여 개의 리뷰에 빛나는 맛집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곳의 시그니쳐 메뉴를 찾기 시작했고, 이번에 고른 것은 가장 비싼 James Beard Competition Burger였다. 다신 이곳에 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 메뉴 선정에는 돈을 아끼기가 상당히 어렵다.
자전거를 타면서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왔던지라, 더위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맥주 한잔과 함께 버거를 곁들였더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햄버거만 쫓아다니는 나를 보고 질리지도 않냐는 사람들도 있는데, 햄버거라는 정해진 형식 안에서 그 레스토랑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보존해온 노력과 비법을 투사하여 나에게 다양한 색깔의 만족감을 선사하는 경험을 여러 번 하다 보니 햄버거 마니아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만난 새로운 햄버거 레스토랑은 만족과 불만족과는 별개로 항상 기대감을 준다.(대충 햄버거 X나 좋아한다는 뜻)
생맥주 한잔에 햄버거 하나를 알맞추 먹은 후에 맞은편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다. 이름은 Lappert's Ice cream & Yogurt였다. 먹을 땐 몰랐지만, 뒤늦게 가게의 역사에 대해서 찾아보니, 원래 이 가게의 시작은 하와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1984년에 이르러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 지역에 생산공장을 만들면서부터 미국 곳곳에 지점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Walter Lappert - Michael Lappert - Issac Lappert의 3세대에 걸쳐 이 가게는 꿋꿋이 새로운 맛과 아이스크림의 퀄리티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옛날이야기는 이만하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평가하려면 아이스크림을 먹어보는 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 아니겠는가? 한 가지 맛만 주문하기에는 아쉬워서 2가지 맛을 주문했다. 맛은 웬만한 프랜차이즈 못지않게 맛있고, 마냥 달기보다는 재료의 풍미가 느껴졌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가격은 양에 비해서 조금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로컬 브랜드라는 점과 샌프란시스코의 물가를 생각하면 합당한 소비였다.
맛있는 디저트까지 삼킨 후, 소살리토의 해변을 적당히 산책하며 소화 좀 시킨 후에, 신나게 내려왔던 언덕을 넘어 금문교로 향하기로 했다. 역시나 우려했던 대로 소샬리토에서 금문교로 가는 오르막길을 오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J는 자전거에서 내려 '끌바'를 하기 시작했고, I와 H를 먼저 올려 보내고 나는 J와 동행을 했다. 자전거 도로가 있다곤 했지만, 혼자 내버려 두기엔 위험하기도 했고, 누구라도 옆에 있어주는 게 멘탈 보존에 유리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렇게 가파른 소살리토의 언덕을 넘고, 금문교의 바람과 안개를 지나 간신히 출발지점 인근으로 돌아왔다. 자전거 자체가 이런 언덕길에 최적화된 가벼운 로드바이크가 아니었던지라, 나조차도 마지막에는 힘이 부쳤다. 사실 싼 가격에 빌린 자전거에 무엇을 바라겠는가? 내가 선택한 자전거였기에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다음에 다시 온다면 소샬리토는 차로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한 H와 J는 먼저 자전거를 반납하러 갔고, 아직은 목숨이 붙어있었던 나와 I는 자전거를 타고 Golden gate park로 향했다. Golden gate park는 크기로만 보면 뉴욕의 센트럴파크보다 규모가 조금 크다고 한다. 역시나 센트럴 파크처럼 일부 구간은 차량의 출입 자체가 통제되어서 큰 도로에서 여유롭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센트럴 파크와 차별되는 부분은, 약간의 경사가 있는 편이고, 공원 한쪽이 해변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마침내 공원의 끝부분에 도착했고, 해변에서 여유를 잠시나마 쉬며 바닷바람을 쐬었다. 이 해변은 정확히 서쪽으로 향해 있었고, 만약 여기서 배를 타고 쭉 직선방향으로 간다면 한국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저 멀리 조국에서 1년째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I와 함께 자전거를 반납하고, 기념품점과 베이커리를 돌아다니고 있던 J, H와 인근의 공원에서 합류하여 잠깐 오늘 라이딩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진 후, 저녁 메뉴를 정했다. 다들 배고프고 지친 상태여서 저녁은 전날 먹었던 환태평양 요리만 아니면 괜찮다는 생각이었고, 구글 리뷰를 바탕으로 적은 고민을 거친 끝에 Street Taco라는 가게로 향했다. 구글 리뷰 4.5점에 리뷰 개수 1000개가 넘는 곳, 올바른 선택이었다.
가격도 이 지역 물가를 고려한다면 저렴한 편이었어서, 맛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브리또 안에 아낌없이 들어간 재료 덕분에 만족스러운 저녁식사가 되었다. 들어갈 때도 줄을 서서 기다렸고, 나올 때쯤엔 가게 바깥까지 줄을 서 있었다. 역시 구글 리뷰 개수에 기반한 메뉴 선정은 실패가 없는 편이다.
식사도 마치고 나서 집으로 걸어가는데, 헬멧 때문인가 두피 쪽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샌프란시스코의 강렬한 햇빛에 가르마 쪽의 두피가 타버린 것이었다. 평소에 선크림을 바르면 피부 트러블이 심해지는 탓에 이번에도 선크림을 안 바르고 버텼던 것이 원인이었다. 시원한 날씨 탓에 타는지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숙소에 들어가고 나면 느껴지는 화끈거림에 큰일 났음을 느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렇게 여행 2일 만에 안면부의 피부가 심하게 타서 벗겨지기 시작했다.
아무튼, 앞에서 자전거를 타며 열심히 길잡이 노릇을 해준 I와, 이미 소진된 체력을 끝까지 짜내며 고소공포증을 이기고 금문교를 건넌 J와, 남정네들 사이에서도 절대 뒤지지 않는 체력으로 잘 따라온 H, 그리고 이미 초라해져 버린 내 피부의 헌신적인 노력을 기리며 건배를 하고 그날의 여행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