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닿는 대로, 스페인 <1>
2005년 9월. 17세의 나는 미국 콜로라도 주에서 형편없이 망가진 이동식 주택을 하얀색 페인트로 칠하고 있었다. 평범한 열일곱 고등학생이면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시간이었는데 나는 조금 다른 길을 선택했다. 영어를 좋아했고, 늘 미국에 가보고 싶었다. 마침 미국 고등학교에서 1년 동안 공부할 수 있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있어 지원했고, 그렇게 한국 고등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부모님을 떠나 호스트 아줌마 아저씨와 1년간 가족처럼 지내며 공부해야 할 곳은 콜로라도 주가 아니라 버지니아 주의 한적한 마을이었다. 호스트 아줌마는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이 소유한 이동식 주택을 임대해 주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학기가 시작할 무렵에 임차인이 갑자기 나가게 되어서 그 집을 수리하러 콜로라도 주에 가야 한다고 했다. 아저씨는 유럽에 출장을 간 상태였고, 나 혼자 버지니아에 머물며 학교를 갈 수는 없으니 나도 함께 가야 한다고. 그렇게 학교에 가지 않고 콜로라도 주로 날아가 집을 손보는 일에 동참하게 됐다.
우리가 고쳐야 할 이동식 주택에 가보니 임차인이 왜 갑자기 나갔는지 알 수 있었다. 집안부터 작은 마당까지 쓰레기로 가득 차있었고, 뭐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쓰레기를 치우고 거둬가는 험한 일은 아줌마의 일꾼들이 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 내부를 하얗게 칠하는 작업에 내 손을 보탰다. 아줌마는 시급을 아주 넉넉히 계산해 줬다. 대신 시작 시간, 쉬는 시간, 마치는 시간을 무서울 정도로 꼼꼼히 기록하고 챙겼다. 인생 첫 아르바이트로 나쁘지 않았지만 사다리에 올라가 천장을 칠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됐다. 공부하는 게 백번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이 집을 빨리 고쳐야 학교에 갈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꼼짝없이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하다 잠깐씩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책을 읽었다. 미국의 가을 하늘 아래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책을 읽는 내 모습이 퍽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읽은 책이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다.
『오 자히르』는 장편 소설이지만, 엄청난 여행기다. 한 남자가 자신을 떠난 아내 에스테르가 자신의 유일한 사랑임을 깨닫고, 그녀를 찾아서 바람, 사막, 초원을 건너는 구도의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 나는 이 책을 읽어 삼키고 또 삼켰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반드시 내가 사랑하는 것을 찾아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왕이면 내가 푹 빠지게 된 작가 코엘료가 작품적 영감을 많이 받았다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파울로 코엘료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한, 산티아고 순례길. 열일곱 살의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적어도 다섯 번은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부모님과 함께, 연인과 함께, 미래의 내 아이와 함께, 그리고 다시 혼자서.
그러니까 내가 산티아고를 향해 걷기 시작한 것은 열일곱 살 때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