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사랑의 시작과 끝에서
어떤 영화음악은 영화에 대한 인상의 전부로 남기도 한다. Buskers의 'If I Ruled The World'가 그런 곡이다. 때로는 영화의 시작에서, 또 때로는 엔딩에서 관객들에게 헤어 나오기 어려운 여운을 건네 왔다.
이 곡은 1970년 프로듀서 Ray Singer와 Simon Napier-Bell이 버스커들의 음악을 컴필레이션 형식으로 구성한 앨범의 수록곡이다. 영국 거리의 악사들이 부른 것이 이어져온 이 곡은, 토니 버넷을 비롯한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왔다. 하지만 리스너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것은 아마 Buskers 버전이 아닐까 싶다.
If I ruled the world,
every day would be the first day of spring
Every heart would have a new song to sing
And we'd sing of the joy every morning would bring
'내가 세상을 지배한다면'이라는 위풍당당한 제목과는 달리 한없이 소박한 가사다. 세상을 지배하고 싶은 이유는 거창한 야망이나 욕심 때문이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과 달빛 같은 웃음을 지니고, 세상이 모두의 편이기를 원해서다. 깔끔하지만 따뜻한 어쿠스틱 베이스와 바이올린 선율이 가사와 잘 어우러지며 그 소박함을 더욱 빛낸다.
아마 많은 국내 영화 팬들이 'If I Ruled The World'를 영화 <야간비행>의 엔딩곡으로 기억할 것이다. 영화에는 이 음악이 두 번 사용된다. 바로 용주와 기용의 첫 만남과 영화의 엔딩 장면이다.
늘 카메라로 세상을 바라보던 용주는 처음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찍게 된다. 바로 무덤덤한 표정으로 버스킹을 바라보던 기용이다. 이때 버스커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If I Ruled The World이다. 용주는 기용이 자신을 봐주지 않자 그의 새하얀 운동화를 밟아 흙자국을 낸다. 이러한 장난에 결국 기용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 웃음이 아마 용주에게는 음악의 가사처럼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 기용을 꿋꿋이 사랑해야 할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용주는 꾸준히 기용의 사진을 찍으며 사랑의 감정을 키워간다. 친구들의 괴롭힘에도 기용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기용도 용주에게 호감을 가지지만, 이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몰라 혼란을 겪는다.
용주가 기용을 사랑하는 방법이 되어온 카메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용주에게 큰 위협으로 돌아온다. 게이라는 이유로 용주를 괴롭혀온 성진이 용주를 성추행하고, 그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기 때문이다. 기용은 용주를 지키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성진에게 맞서 싸운다. 그리고 결국 카메라 메모리칩을 되찾는다. 하지만 이 일로 걷잡을 수 없이 크게 상처 받은 용주는 자퇴를 택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곁을 떠나기 전, 긴 대화 대신 포옹을 나눈다. 이때 다시 한번 If I Ruled The World가 흘러나온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지만, 세상의 규정에 의해 공동체에서 철저히 배제당한 용주. 그리고 세상의 규정을 어기는 것이 두려워 자신이 가진 감정이 사랑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회피해온 기용. 그들에게 음악 내내 등장하는 'IF'로 시작하는 행복한 이야기들은, 말 그대로 현실이 될 수 없는 '가정'일뿐이다.
그들이 세상의 규정을 다시 쓴다면, 그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If I Ruled The World을 들으며 그들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가늠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