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기록: 이자카야, 6시 정각, 트위드 재킷 남
1. 날짜/시간/장소: 10월의 어느날/18시/양재의 어느 이자카야
2. 참석자: 박모씨(여, 29세) 이모씨(남, 35세) 총 2인
3. 상황 기록:
소개팅은 늘 약간의 기대와 약간의 자책으로 시작된다.
‘밥이나 먹고 오자’라고 다짐하지만, 그 속엔 ‘혹시 이번엔 다를 수도?’라는 치명적인 오류가 여전히 숨어 있다. 그렇게 몇 번을 당해놓고 또? 아서라…
장소는 양재의 깔끔한 이자카야였다. 30대의 소개팅 배경으로는 거의 고전이다. 메뉴는 2~3만 원대, 그러나 저녁엔 주류 주문이 필수인 곳. 술은 시키되 적당히 취하지 않을 정도로 - 마치 이 관계도 적당히 안전한 선에서 끝내야 한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공간이었다. 약속 시간인 6시 정각, 식당에 도착했을 때 남자 두 명이 각자 테이블에 등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곤란한 상황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과연 누구인가. 둘 중 하나라도 내 스타일이었다면 모른 척 앉아 드라마 같은 상황을 만들어봤겠지만, 여긴 현실이다. 둘 다 탐탁지 않았다. 기사님, 택시 돌려주세요.
베이지색 재킷을 입은 오른쪽 남자가 나를 보고 애매하게 일어서려는 찰나, 검은색 트위드 재킷을 입은 왼쪽 남자가 환하게 손을 흔든다. 오늘의 목적지는 저기다. 왼쪽 손목엔 까르띠에 산토스 시계, 오른쪽 손목엔 프레드 포스텐 팔찌까지. 양손이 너무 바쁜 남자였다. 그는 자신을 어느 회사 디자인팀의 팀장이라 소개했다. 직급은 과장이지만, 전임 팀장이 나가서 급히 팀장을 맡게 됐다고 했다. 트위드 재킷과 양손의 명품, 그리고 살짝 과장된 말투까지. 그 조합이 참 완벽하게 과했다. (+추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오마카세라고 했음. 오마카세는 '음식'이 아니라 '메뉴' 이름이세요. 본인은 스시를 좋아하시는 거세요.) 나는 원래도 사람을 잘 보는 편인데 특히 소개팅 상대로 앉은 남자는 10분만 대화해 보면 결론이 나온다. 이번엔 5분이면 충분했다. 가볍고, 말 많고, 컨트롤 욕심 강한 남자. 나와는 최악의 조합이다. 5년 전이었다면 흥미를 느꼈을 거다. (물론 외모는 절대 아니지만) 하지만 지금은 상상만 해도 피곤하다.
남녀 간의 발전은 없겠다고 판단한 순간, 나는 내숭을 내려놓는다. 대화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서로의 직업 이야기를 주고받고, 자동으로 따라오는 질문. '퇴근하고는 뭐 하세요?' 나는 습관적으로 ‘수영이요’라고 대답했다. 보통은 '저도 배워봤어요'나 '재밌겠다'로 이어지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혹시 저 티가 나나요?' 아니 뭘요? 뭐가요? 주어도 없이 물어보시면 제가 어떻게 알죠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제야 그는 사투리가 티가 나냐고 설명했다.
'제가 맞춰볼까요?'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이런 타이밍엔 이런 리액션을 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우선 경상도 말씨니까 창원부터 질러본다. 창원, 부산, 아니면 바다 근처 어딘가 — 대부분은 여기서 놀라며 '맞아요!'라고 해준다. 하지만 아니라면, 다음은 육지로 가야 한다. 대구? 역시 정답. 그는 대구 사람이었다.
'수영 얘기하다가 갑자기 사투리요?'라고 묻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아 제가 대구 펠프스였거든요!' 대학 시절 교양으로 수영 강의를 들었는데, 수영 전공자들을 제치고 2등을 했다는 자랑을 덧붙였다.
여기서 우리가 파악해야 할 건 하나다.
1. 그는 수영을 잘하는 테토남이다.
2. 그는 대구의 어느 대학을 졸업했다.
장난치냐? 당연히 2번이다.
나는 학벌주의자다. (개인 취향이니 반박 안 받습니다.) 이미 검정 트위드 재킷에서 탈락이었지만, 여기서 한 번 더 탈락을 준다. 차마 내려놓지 못했던 마지막 내숭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1시간 만에 표면적인 소개팅은 끝이 났다.
4. 결론 및 코멘트: 남녀 간 발전 가능성 0%
*소개팅 사건 일지 - 2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