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기록: 대형 카페, 8시, 대구 펠프스가 된 트위드 재킷남
*소개팅 사건 일지 - 1화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 날짜/시간/장소: 10월의 어느날/20시에서 21시 사이/이자카야 근처의 카페
2. 참석자: 박모씨(여, 29세) 이모씨(남, 35세) 총 2인
3. 상황 기록:
구 트위드 재킷남 현 대구 펠프스와의 표면적인 소개팅은 끝이 났고 다시 만날 일은 없다. 저녁은 그가 살 테니, 난 커피든 맥주든 2차를 계산하고 찝찝함을 남겨선 안 된다. 소개팅의 불문율이다.
+ 여기서 꿀팁 하나. 남성들은 모르는 여성들의 신호체계가 있다. 만약 당신이 소개팅에 나갔는데, 상대 여자가 기를 쓰고 더치페이를 하려 한다면 ‘개념녀’를 만났다고 감동할 일이 아니다. 본인의 매력을 점검해야 한다. 그녀는 당신과 다신 엮이지 않겠다는 뜻을 품격 있게 포장 중이다. 반대로 남자가 밥을 사고 커피까지 샀는데 고마워하고 행복해하고 ‘다음엔 꼭 제가 살게요!’라는 멘트까지 한다면 ‘김치녀’에게 당했다고 열받아 하지 좀 마라. 그녀는 당신에게 푹 빠진 것이니 거울 속 자신에게 박수를 날려주면 된다.
소개팅의 식사 값은 5~7만 원 사이가 적당하다. 둘 다 서로가 맘에 들면 뭐 얼마가 나오든 상관없다. 우리가 간 이자카야는 양이 적은 편이었고 주류도 필수라 3~4만 원이 추가 됐다. 대화가 길어지며 메뉴도 늘었고 아마 10만 원은 넘었을 거라 슬슬 부담되던 참이었다. 근데 대화가 길어졌다고? 맘에 안 들었다며?
마침내 둘 다 내숭을 내려놓고 드디어 ‘진짜 대화’가 시작되는 변환점을 맞는다. 각자 회사 얘기를 하다가 내가 툭 던졌다. ‘회사는 회사일 뿐이에요. 회사 사람들에게 기대는 금물인데, 모르세요?’ 그는 갑자기 눈을 반쯤 뒤집으며 외쳤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와, 그걸 벌써 아시네???’ 목소리의 볼륨이 커질수록 확신이 들었다. 이 남자도 드디어 가면을 벗었구나.
소개팅 전날 회사에서 속상한 일을 겪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에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일로 엮이는 순간 결국 똑같아지는 건가, 회의감이 들던 때였다. 그런데 그도 최근에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우린 둘 다 겨울 생이라 별자리도 같고 MBTI도 같았다. 감정의 박자가 묘하게 맞았다. 어차피 다시 볼 일 없는 사이라 솔직하게 털어놓기에도 좋았다. 딱 봐도 선배 노릇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해결책 하나쯤은 얻을 수 있겠다 싶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성실히 실천했고 내 예상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마치 본인의 일인 듯 내 이야기에 몰입하더니 진지하게 조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소개팅에서 이래도 되나 죄책감이 들었지만 뭐, 남녀 사이는 시작도 안 했으니 괜찮았다. 설렘이나 플러팅 보단 팀장님과의 면담, 세바시, 김창옥쇼 그런 거와 더 가까웠다. 솔직한 대화 후엔 묘한 후련함이 남았고 심지어 명쾌한 해결책까지 얻었다. 나는 무료 게릴라 심리 상담을 받았고, 그는 억눌린 꼰대력 살풀이했으니 서로 손해 본 장사는 아니었다. 그렇게 2시간이 훌쩍 지나 커피숍으로 예의상 자리를 옮겼다. (내가 2차를 꼭 내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소개팅의 회계는 깔끔해야 한다.) 둘 다 피곤해져 영혼 없이 각자 강아지 자랑만 실컷 하다 일어났다.
택시를 타겠다는 나를 그는 끝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이럴 땐 느낌이 와야 한다. 개이득의 느낌. 그는 차를 자랑하고 나는 집에 편하게 간다. 윈윈이다. 집주소가 노출되는 게 불안했지만, 집 근처 다른 아파트 주소를 찍으면 그만이다. 역시 그의 차는 레인지로버였고 비닐 뜯은 지도 얼마 안 된 새 차였다. 집까지 30분, 나는 엉뜨에 녹아내려 정신이 몽롱했고 차 안의 대화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껏 내 소개팅에서는 없었던 사건이 발생한다.
4. 결론 및 코멘트: 소개팅에서 이래도 되나 싶지만 아무 이상 無.
*소개팅 사건 일지 - 3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