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록: 오전 9시/ 출근 후 커피 머신 앞
트위드재킷남 편트위드재킷남 편
*소개팅 사건 일지 - 2화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 날짜/시간/장소: 10월의 어느날/오전 9시 /사무실 커피머신 앞
2. 참석자: 박모씨(여, 29세) 총 1인
3. 상황 기록:
소개팅 후 내가 애프터를 해 본 경험은 없다. 우선, 또 만나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었고 연애가 시작되기도 전에 주도권을 뺏길 순 없었다. 무슨 주도권 타령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엔 연애의 물리 법칙이 작용한다.
남자들은 여자가 마음에 들면 연애 시작 전 시속 120km로 달리는 F1 경주용 차가 된다. ‘오늘부터 1일’ 선포 후엔 곧바로 고속도로 진입 - 시속 100km로 돌진한다. 하지만 연애가 진지해질수록 속도는 급격히 줄어든다. 어린이보호구역에 진입하여 시속 30km로 감속하더니, 결국엔 주차장에 주차하고 시동을 꺼버린다. 속도 0km, 완전 정차다. 물론 평생 스포츠카처럼 달리면 교통사고 엔딩이니 그걸 원하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안전 운전 모드로 일정하게 달려주면 안 되냐는 소리다. 여하튼 120km로 달리던 남자도 결국엔 0km가 되는데 아직 시동도 안 건 남자를 붙잡아 끌고 온들 그게 과연 지속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난 천년의 이상형을 만나지 않는 이상 먼저 애프터 할 생각은 없다.
소개팅 얘기로 다시 넘어가 보자면 대구 펠프스와의 소개팅은 30분간의 드라이브를 마무리로 끝이 났다. 소개팅은 토요일이었고 일요일엔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주말이 다 지나 월요일 출근 후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진다. 앞으로 우리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아무래도 나… 그 사람을 좋아한다. 이렇게 끝날 순 없다. 그래서 결심해 버렸다. 연락해 보기로.
미안하지만 여러분이 기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는 소개팅남이 아니라 회사 동료다. 동료와의 관계는 충분히 개선될 여지가 있었고 이 생각에 힘을 실어 함께 계획을 짜준 건 소개팅남이다. 나보다 회사 생활을 먼저 시작했고 어쨌든 팀장까지 된 사람이다. 그리고 나와 성향도 비슷해서 그의 시행착오와 대처법, 후기, 장단점, 부작용까지 소개팅남이 브리핑한 방법은 나와 잘 맞았다. 어쩌면 내 인생 첫 유의미한 ‘직장인 멘토링형 소개팅’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세운 완벽한 계획은 월요일 출근 후 바로 오점이 발견됐다. 아침 내내 고민해도 결론이 나지 않으니,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번에 그는 소개팅남 맞음) 잘 마무리된 소개팅 후 따로 연락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주말에 뭐 하세요?’도 아닌 ‘계획에 차질이 생겼는데요.’라고 문자 하는 오버를 범하고 싶어졌다. 오해의 소지가 있겠지만 고민 해결이 더 급했다. 그에게 연락하니 역시나 명쾌한 해답이 돌아왔다. 덕분에 동료와의 관계는 잘 회복되었고 다시 깔깔대며 잘 지내고 있다. 오히려 위기 상황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아지며 믿음이 커졌다. (물론 내가 사수 입장이라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음.) 이번 소개팅에서도 남편감을 찾진 못했지만, 중요한 순간의 카운슬러는 만났다.
사람을 만나 5분 만에 편견을 만들어버린 내 모습을 반성했다. 인간은 이렇게 입체적인데 모든 걸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만심이 참… 귀엽다. 이번 경험이 남긴 건 단순한 소개팅 후기가 아니다.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할 순 없고, 심지어 대화 몇 시간으로는 전부를 알 수 없다. 그걸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성장한 셈이다. 연애든 삶이든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때론 의도치 않게 해답과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 ‘한 장짜리 10분 요약본’의 편견을 만들어 씌우던 나도, 이제 조금 더 유연해졌다.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배우며 살아가는 재미가 있다. 소개팅 관찰기 1편, 이렇게 보고 완료!
4. 결론 및 코멘트 : 속도 조절은 필수, 성급한 판단은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