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록: 지하철 6호선 안, 오후 6시
1. 날짜/시간/장소: 가을 끝 무렵 어느 날/19시 30분/마포구의 어느 식당
2. 참석자: 박모씨(여, 29세), A군(34세, 킹카남), B군(32세, 먹보유머남), C군(31세 ,혼잣말남), D군(33세, 날라리남), E군(35세, 사회성사망남), 소개팅 호스트(여, 나이 미상) 총 7인
3. 상황 기록:
서른 정도가 되면 나의 어떤 행동이 이성에게 잘 먹히는지 알게 된다. 거기다 난 상대의 심연을 보는 능력도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느 사주 집에서 들은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한겨울 아주 깜깜한 새벽에 태어난 사람이라 타인의 뒷모습을 기가 막히게 본다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불이 꺼지고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바닥의 팝콘이며 옆 사람의 표정까지 보이듯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어둠에 이미 적응된 타입이랬다. 그래서 상대가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듣기 싫어하는지 빠르게 읽는다. 그러니 마음을 얻는 것도 쉽지만 솔직히 상처 주는 것도 그만큼 쉽다. 이번 소개팅에서 내 능력은 120% 발휘됐다. 몇 명에겐 원하는 반응을 해주고 몇 명은 피해의식을 건드려줬다. 이번엔 무려 5명의 남자를 한 번에 만나는 단체 로테이션 소개팅에 다녀왔다.
첫 로테이션 소개팅이라 20대 20 같은 대규모는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자리엔 꼭 날라리들만 모일 것 같아서 친구 지인이 운영하는 소규모를 선택했다. 소개팅 SNS 계정에서 매 회차 신청 현황을 보며 조용히 눈팅만 하던 참이었다.
그러다 문제의 문구가 올라온 거다.
‘이번 회차는 키 크신 훈남분들이 많네요.’
이걸 보고 어떤 얼빠가 안 흔들리려나. 나는 즉시, 숨도 안 쉬고 신청했다. 직업도 안정적이고 키 큰 훈남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설화 속에만 사는 거 아니었는지 의심이 들었지만, 은근 기대됐다. 남자들의 사진을 볼 수 없으니 ‘키 큰 훈남’들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내 상상 속 그들은 차은우, 박보검, 서강준, 강동원, 조인성이었다. 현실? 그런 건 모르겠고요…
드디어 기어코 내가 단체 소개팅까지 하게 됐구나, 살짝 현타가 왔다. 그러다 갑자기 또 설레기 시작하는 거다. 괜찮은 남자가 하나쯤은 있을 테다. 그사이 다른 소개팅도 했는데 별로라서 어느 순간 자신을 위로하기에 이르렀다. 모두 잘생겨서 누굴 고를지 고민되면 어쩌지, 그 남자를 만나려고 지금까지의 남자들이 그지 같았던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행복회로에 미친 짓인 건 알았지만 또 이 정도 상상은 나를 달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드디어 전날, 마스크팩에 바디스크럽까지 했지만 결국 제일 오래 걸린 건 옷 고르기였다. 옷장은 넘치는데 입을 옷은 없다는 그 오래된 도시 괴담이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시간의 고민 끝에 결론은 어차피 앉아만 있을 건데 ‘상의만 괜찮으면 된다’였다. 아이보리 색의 적당히 여성스러운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독기룩까진 용기가 없어서 하객룩 정도로 합의 봤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으며 회피하고 있는 진실은 피할 수 없다. 옷이고 뭐고 남자들은 결국 하나만 본다, 얼굴. 오빠들은 내가 마스크팩을 했는지 바디스크럽을 문질렀는지 알 리가 없다. 그건 언니들만 알아준다. 면티에 청바지여도 이쁘면 장땡이고, 아니면 뭐 성격 좋은 걸로 승부 봐야 한다.
소개팅 당일 퇴근하고 화장을 하는데 괜히 두근거렸다. 드디어 오늘 잘생긴 남자들을 만나는 그날이다.(라고 세뇌함.) 근데 이런 날 꼭 화장이 말썽이다. 턱엔 뾰루지, 다크서클은 오늘따라 왜 이리 짙은지.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향수까지 장착한 뒤 출발했다. 더 큰 난관은 거리였다. 퇴근길 택시로는 1시간이 훨씬 넘게 걸려 결국 지하철로만 1시간을 가는 코스를 선택해야 했다. 다시 한번 현타가 찾아왔지만, 나는 글감을 찾으러 가는 작가라고 또 세뇌했다. 지하철을 갈아타며 내숭 모드(인상 쓰기 금지, 허겁지기 뛰기 금지 등)를 켰는데 어쩌면 이 안에 오늘 소개팅 멤버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내 촉은 정확했다. 어디서부터 같은 칸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적지까지 내 앞에서 걸어가던 남자는 소개팅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역에 도착해 마지막 점검을 하니, 지하철 피로 때문인지 부기도 쏙 빠지고 유분이 살짝 올라와 이게 또 다행히 맘에 들었다.
소개팅 장소에 도착해 코트를 벗으며 핸드폰 사용 자제라는 안내 문구를 보고는 순순히 폰을 가방 속에 밀어 넣었다. 그날 대화 내내 턱에 뾰루지가 신경 쓰여 말할 때마다 괜히 입술을 만지작 거렸다. 작은 거울 정도는 챙겨도 됐을 텐데... 역시 모든 건 경험으로 배우는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나의 첫 단체 로테이션 소개팅이 시작됐다.
4. 결론 및 코멘트: 모든 경험에선 배울 게 있음.
* 소개팅 사건 일지 - 5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