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록: 마포구 어느 식당, 오후 7시 30분
*소개팅 사건 일지 - 4화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 날짜/시간/장소: 가을 끝 무렵 어느 날/19시 30분/마포구의 어느 식당
2. 참석자: 박모씨(여, 29세), A군(34세, 킹카남), B군(32세, 먹보유머남), C군(31세 ,혼잣말남), D군(33세, 날라리남), E군(35세, 사회성사망남), 소개팅 호스트(여, 나이 미상) 총 7인
3. 상황 기록:
첫 로테이션 소개팅 전, 솔직히 가장 궁금했던 건 남자들의 외모도 식당의 메뉴도 아닌 내 지정석이었다. 괜히 그 자리 배치가 나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중간이 메인이라는 생각에 그 자리에 앉으면 묘하게 그날의 퀸카임을 인정받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식당에 도착해 신분증과 명함으로 본인 인증을 하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자리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확인한 내 자리는 - 정확히 가운데 자리였다. 은근 기분이 좋아서 자연스러운 미소를 장착할 수 있었다.
소개팅 시작 전 그 10분은 솔직히 끔찍했다. 지금까지 도착한 남자들은... 자세히 말하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수도 있으니 생략하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 또 내가 나를 너무 믿었구나.’ 잘생긴 남자들이 나타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은 내 자신이 기가 막혔다. 30년 동안 수없이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면, 이건 그냥 평생 못 차리는 거다. 그 와중에 식당까지 내 앞에서 걸어왔던 D군이 계속 나를 힐끔거렸다. 그렇게 그의 부담스러운 시선과 함께 나의 첫 로테이션 소개팅이 시작됐다.
호스트가 자신과 소개팅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시작했다. 단언컨대 그 자리의 모든 사람 중 내 스타일은 바로 그녀였다. 밝고 자신감 넘치고, 딱 내 취향. (결국 참지 못하고 찝쩍댐.) 그 후 참가자들의 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맨 왼쪽 남자부터 하나씩 소개를 듣다가 마지막 맨 오른쪽 남자인 A군이 자기소개를 하는 순간, 머릿속 경고 사이렌이 켜졌다. 저 남자는 뭐지? 언제부터 저기 앉아 있었지? 왜… 잘생겼지? 처음 몇 명의 남자를 보고 실망해서 다른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던 나의 방심이 문제였다. 그는 어느 배우가 생각나는 훈훈한 외모였다. 게다가 짧은 자기소개에도 다른 남자들과 달리 사회성이 부족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담백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말솜씨에 나의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고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여자들의 순서였다. 자기소개부터 남자들의 관심을 끌 필요는 없지만 너무 평범하면 잊히기 쉽기 때문에 에너지를 적절히 배분해야 한다. 내가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남자들은 눈빛으로 관심을 드러냈던 것 같다. (제가 불치병이 있어요. 공주병 말기...) 자기소개가 끝나고 호스트가 준비한 단체 질문이 시작됐는데, 솔직히 나는 성가시게 내 주변을 날고 있는 모기에게 집중해 버렸다. 모기에게 물리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허공을 쫓던 찰나, A군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나처럼 눈으로 모기를 추격하고 있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혔고 둘 다 참을 수 없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짧은 순간 우리만 아는 미묘한 긴장감이 생기며 주변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 순간이 바로 그거다. 주인공만 남기고 아웃포커싱되며 흐려지는 배경. 이때다 싶어 남자들이 싫어할 리 없는 입 가리며 웃기 스킬을 사용했고 그렇게 벌써 우리 사이엔 작은 스파크가 튀고 말았다.
호스트의 마지막 질문은 최근 가장 열정을 쏟고 있는 일에 관한 내용이었다. 각자 회사, 대학원 등 다양한 대답을 했지만 나는 살짝 변주를 줘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될 기회를 잡았다. 앞서 에너지를 아꼈다면 이번에는 써야 한다. 그 방법은 바로 솔직함이다. ‘열정적으로 하는 일요? 글쎄요, 지금은 없는 것 같아요.’ 모두가 시선을 고정했다. ‘겉보기엔 안 그럴 것 같지만 저는 그동안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취업한 전형적 모범생이었어요.’ (과거가 깨끗하다는 걸 어필) 그래서 지금은 하고 싶은 걸 하며 그저 즐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반응은 예상대로 좋았다. 오, 그럴 수도 있죠. 멋있네요. 박수까지 받았다. 이런 스킬은 남자를 꼬시는 데만 쓰이는 건 아니다. 주목받고 싶을 때, 뻔하지 않게 존재감을 보여야 할 때, 익숙한 대답 대신 살짝 비틀어 주는거다.
그렇게 호스트의 질문이 끝나고 드디어 문제의 로테이션 대화가 시작됐다.
4. 결론 및 코멘트: 언제 어디서든 한눈팔지 말 것.
*소개팅 사건 일지 - 6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