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기록: 마포구 어느 식당, 오후 9시
*소개팅 사건 일지 - 5화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 날짜/시간/장소: 가을 끝 무렵 어느 날/21시/마포구의 어느 식당 중간 자리
2. 참석자: 박모씨(여, 29세), A군(34세, 킹카남), B군(32세, 먹보유머남), C군(31세 ,혼잣말남), D군(33세, 날라리남), E군(35세, 사회성사망남), 소개팅 호스트(여, 나이 미상) 총 7인
3. 상황 기록:
이미 첫인상과 몇 마디로 판단은 끝났다. 내 성격상 ‘아니다’ 싶은 남자와 잘 될 확률은 0%다. 솔직히 난 A군과만 더 대화해보고 싶었다. 문제는... 그러려면 네 명과의 대화를 버텨내야만 했다.
<첫 번째, 31세 혼잣말남 C군>
그는 남녀 불문하고 내가 제일 힘들어하는 유형이었다. 바로 대화 중 혼잣말을 하는 사람. 단체 질문 타임에 다른 사람이 말만 하면 옆에서 ‘오ㅋ 등산 힘들지ㅋ’, ‘아핰 와인…’ 같은 미묘한 웃음을 섞어 혼잣말을 툭툭 던졌다. 하필 그가 내 첫 로테이션 상대였다. 대화동안 나는 의자에 등을 딱 붙이고 단 한 번도 떼지 않았다. 그는 오전엔 제빵사, 오후엔 힙합 음악과 시 창작을 했고, 취미는 러닝이라고 했다. 내 특기는 이런 남자들 기죽이기이다.
박모씨: 오~ 제빵사시구나. 저도 전공이 요리라서 15년 전에 제과, 제빵 자격증 땄거든요. C군도 있으세요?
C군: 아;; 그건 아니에요… 전 그렇게 진지한 건 아닙니다.
박모씨: 오~ 시 쓰시는구나. 시인 등단이 그렇게 어렵다던데, 주변에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C군도 등단 준비하시나요?
C군: 아;; 그건 아니에요… 전 그렇게 진지한 건 아닙니다.
박모씨: 오~ 러닝하시는구나. 제 친구가 이번에 서울 마라톤에서 기록 2위를 했더라고요. C군은 최근에 어떤 마라톤 다녀오셨어요?
C군: 아;; 그건 아니에요… 전 그렇게 진지한 건 아닙니다.
C군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소개팅 후기를 우연히 보게 됐다. 그의 글 속 나는 귀엽긴 했지만 소심하고 대화가 잘 안 통하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로테이션 소개팅 다수 경험자였지만 왜 아직도 솔로인지는 본인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두 번째, 32세 먹보유머남 B군>
푸짐한 체형에 둥근 코, 첫마디는 ‘S대기업 카드사 다닙니다.’였다. 아마 그게 그의 인생 자랑 1순위인 듯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치고 성격 나쁜 사람은 없다는데, 딱 B군이 그랬다. 남성성은 없지만 성격은 푸근했다. 사실 나는 직전 남자와 대화하던 중 휴지를 챙기려다 옆자리 여성분의 와인잔을 쏟는 대참사를 저질렀다. 그런데 B군과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아까 놀라지 않으셨냐며 걱정해 주더니, 곧바로 ‘너무 아름다우셔서 얼굴 보느라 와인 쏟으시는 건 못 봤습니다~’라며 능청 유머도 던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직전 대화가 너무 고역이어서였는지 이 푸근한 남자와 얘기하니 마음이 풀렸다. 그가 강아지를 키운다고 운을 띄우는 바람에 우리는 각자 강아지가 얼마나 천재적이고 건강한지 자랑하다 시간이 끝나버렸다. 그와의 대화가 끝난 건 아쉽지 않았지만, 핸드폰이 없어 서로 강아지 사진을 못 보여준 건 진심으로 아쉬웠다.
<세 번째, 34세 킹카남 A군>
드디어 여러분이 기다리던 킹카남이다. 그런데 먼저 사과부터 하겠다. A군과의 대화는... 솔직히 쓸 게 없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알 거다. 그냥 합격이라는 거다. 대화 중 거슬리는 포인트가 없었고,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서 문제 되는 게 없었다. 이제부터는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아무도 관심 없는데 나만 재밌는 얘기’를 줄줄 읊을 예정이니, 관심 없다면 가볍게 지나가도 무방하다.
A군은 자기 자신을 잘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군더더기 없이 설명해 줬다. 알고 보니 출신 지역도 나와 가깝고, 그의 집은 나의 회사랑 같은 동네였다. 나처럼 와인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는데 그는 스페인어를 잘했다. 내가 가우디 얘기를 꺼냈더니, 그는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요?’ 하고 내가 가보고 싶다고 한 성당의 풀네임을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말했더니 자기도 재밌게 봤다며 소감을 자연스럽게 얹었다. 좋아하는 영화감독도 있었다. 아씨 말하는데 그냥 잘생겼다. 나는 등받이에 등을 붙일 새가 없었고, 입꼬리는 내내 올라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목선을 드러내느라 머리카락을 몇 번이나 넘겼는지 모르겠다.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다 기억하잖아...) 느낌이 좋았다는 건 아주 정확하게 기억난다.
<네 번째, 35세 사회성사망남 E군>
자극적으로 이름을 붙여 미안하지만, 그에 관한 여자들의 모든 후기는 최악이었다. 처음엔 회계사인 것처럼 말했지만, 물어보니 정확하게는 회계 세무사였다. 나와 나이 차이도 너무 났고(A군이랑 1살밖에 차이 안 남. 박모씨 모순 레전드.) 외모도... 음... 그랬다. 게다가 그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 결국 사회성 있는 내가 먼저 대화를 시작해야 했다.
박모씨: 오~ 무슨 일 하세요?
E군: 흠…. 무슨 일을 한다고 나열하기가 좀…^^; 저는 스페인 다녀온 적 있습니다.
박모씨: (엥?) 오~ 스페인 어디 다녀오셨어요?
E군: 흠…. 어디를 다녀왔다고 나열하기가 좀…^^;
박모씨: (엥?) 그럼 스페인에서 먹었던 음식이라도 기억에 남는 거 없으세요?
E군: 흠…. 뭘 먹었다고 나열하기가 좀…^^;
박모씨: 아 넵 알겠습니다.
그렇게 정적이 이어졌고, 대화 시간은 종료됐다.
<다섯 번째, 33세 날라리남 D군>
드디어 마지막이 됐고 D군에겐 미안하지만 이쯤 오니 제정신이 아니어서 대화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네? 잘 안 들려요. ㅠㅠ.’
‘죄송해요. 정신이 너무 없어요.’
라고 말한 기억밖에 없다. 성의 있게 대화해주고 싶었지만, 모르는 사람들과 쉼 없이 이야기하는 건 정말 체력 테스트였다. 게다가 바로 전 사람의 사회성 부족 때문에 피로도가 배가 됐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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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든 대화가 끝났다.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호스트에게 전달했고 나는 당연히 A군이었다. 혹시 모를 기타 안전 문제를 위해, 남자들이 먼저 나가고 여자들은 10분 뒤에 나갈 수 있었다. 집에 가는 지하철역에서 함께 소개팅한 여자분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사실 그녀들과도 대화를 해보고 싶었기에 신이 났다. 우리는 소개팅 후기를 주고받으며 속전속결로 번호도 교환하고, 따로 만날 날까지 잡았다. 역시 난 여자들이 더 편하고 좋다.
집으로 가는 길, 호스트에게 연락이 왔다. 매칭이 완료되어 A군도 나를 선택했고, 서로 연락처를 교환할 의향이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당연히 ‘좋아요!’라고 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받게 됐고, 나의 새로운 소개팅 사건 일지는 또 한 번 시작 됐다.
4. 결론 및 코멘트: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운명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