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기록: 북카페, 오후 2시, 미지근한 물 같았던 그 남자
1. 날짜/시간/장소 : 2026년 2월/식곤증 오는 오후/조용한 카페 안
2. 참석자: 박모씨(여, 30살), 포장남(남, 36살) 총 2인
3. 상황 기록:
몇 달 사이 굵직한 이벤트들이 몰려 있었고 3월에는 결혼 KPI 달성이라는 명확한 목표 아래 성실하게 일상을 운영해 왔다. 재밌는 일이 하나쯤 터져줘야 도파민이 돌고 그 기세로 글도 후루룩 써지는데 요즘은 그런 에피소드도 딱히 없었다. 그러던 중 소개팅 주선이 취미인 후배가 오랜만에 남자 매물을 들고 왔다. 주기적으로 공급받는 메인 거래처이다. 소개팅남은 나이가 조금 있는 편이었는데 직업과 취미가 마음에 들어서 상관없었다. 외모는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착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내 소개팅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이런 유형은 최소한 기분이 상하고 끝날 케이스는 아니다.
소개팅남은 회사가 바쁜 시즌이라 퇴근 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첫 카톡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박모씨!’
여기까지는 정석이다. 보통 이다음에는 ‘연락처 받은 ㅇㅇㅇ입니다.’ 같은 문장이 이어진다. 그런데 그 문장이 오기도 전, 이 남자에게 보이스톡이 걸려 왔다. 바로 끊겼고 곧 잘못 눌렀다는 카톡에 우는 이모티콘이 따라왔다. 나는 마침 핸드폰을 보고 있었고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지금 이 사람이 얼마나 죽고 싶을지 상상이 갔다. 전화로 소개팅 날짜를 잡는 테토남은 신박했겠다 싶어 실수라는 게 아쉽기도 했다. 이후로는 무난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날짜를 잡았다. 그는 일주일 정도 해외 출장을 앞두고 있었고 출국은 일요일 저녁이라고 했다. 나는 이미 주말 일정이 차 있었는데 그가 출장 전에 한 번은 꼭 만나고 싶다고 해서 일요일 오후에 간단하게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가 찾아온 곳은 앤트러사이트였고 이상한 갬성 카페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게 소개팅 날짜가 됐고 나는 점심 소개팅 하나를 깔끔하게 끝낸 뒤 합정 앤트러사이트로 향했다. 하루에 소개팅을 두 번 잡는 일정은 꽤 효율적이니 참고하시길. 그는 카페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도착했는데도 그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길가에 서 있는 남자들을 훑어봤다. 그리고 한 번 더 봤다. 그래도 없었다. 사진에서 본 얼굴이 어디에도 없었다. 셀기꾼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고 그저 특징이 없어서 인식이 안 되는 타입이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에 남질 않는 얼굴. 미지근한 물 같달까, 백지 같달까... 분명 보고는 있는데 머리에 저장이 안 된다. 그쪽에서 먼저 나를 알아봤고 모르는 남자에게 인사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대화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둘 다 책과 영화를 좋아해서 대화가 크게 끊기는 구간은 없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을 물어봤더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거다. 공교롭게 나도 그 주에 읽고 있던 책이었다. 내가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꺼냈는데 그가 거짓말처럼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출장을 자주 가는 편이라 지난달에 사 온 건데 나를 주려고 챙겨 왔다고 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의 ‘밝음’을 마음껏 뽐냈다. 너무너무 좋다며 신나 했다. 나중에 들으니 포장남은 이때 나에게 반했다고 했다. 밝은 여자라 좋았는지 아니면 고작 '초콜릿' 하나에 행복해하는 여자라 좋았는지는 모르겠다. 할많하않, 투비컨티뉴.
여기까지 봤을 때 평소의 나라면 운명이다 어떻다 난리부르스를 칠 법도 한데 운명으로 엮이고 싶은 외모가 아니었어서 그런가 부정했다.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물었다. ‘손 씻으셨어요?' 황당했다. 당연히 씻었고,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화장실 갔다가 손 안 씻는 사람이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핸드크림 바르실래요?’라고 하면서 가방을 뒤적였다. 포장남이 망설임 없이 꺼낸 건 다이소의 복숭아 향 핸드크림이었다. 황당했다. 물론 나도 다이소에서 생필품을 사곤 한다. 다만 핸드크림까지 다이소에서 해결하는 건 내 기준에서는 조금 방향이 다른 선택이었다. (논란이 될 수 있어 두루뭉술하게 쓰지만 뭔 말인지 다들 알 거라 믿는다.) 하여튼 '다이소 복숭아 핸드크림'은 나름 신경 쓴 결과 일수도, 그냥 취향일 수도,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크게 중요하진 않다는 거다. 이 시점에서 이 만남이 어디까지 갈지, 끝나는 이유가 뭐일지는 대략 감이 왔지만 지워버렸고 앞으로의 만남에서 비슷한 문제점들은 나를 스트레스 받게 했다.
대부분의 커플은 맨 처음 느낀 불편함이 결국 이별 사유가 되고 만다. 초반에는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고 아직 상대를 잘 모르니까 ‘내가 예민한 건가’, ‘이 정도는 누구나 그래.’ 하면서 적당히 넘겨버린다. 그 순간에는 별거 아닌 일처럼 지나가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 동일 구간에서 브레이크가 걸린다.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비슷한 이유로 다시 신경 쓰이게 된다. 결국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된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경험에 의한, 혹은 여자의 촉이 보내는 경고 사항이 이었음을.
4. 결론 및 코멘트: 왜 포장남인지는 투비컨티뉴.
※소개팅 사건 일지 - 10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