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기록 : 과거를 회상하며 생각에 잠긴 박모씨.
1. 날짜/시간/장소 : 2020년 12월/폭설주의보가 내린 제주도
2. 참석자: 박모씨(여, 24살), 구 제주도남(남, 27살), 신 제주도남(남, 32살) 총 3인
3. 상황 기록:
소개팅 사건 일지로 돌아온 박모씨, 인사드린다. 최근 카X오톡이 그지같이 리뉴얼된 이후, 가장 싫었던 건 굳이 알 필요 없는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 변경을 실시간으로 알게 된다는 점이다. 궁금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손은 이미 스크롤을 내리고 있고, 거기엔 늘 비슷한 사진들이 줄지어 있다. 결혼 스냅, 결혼식, 신혼여행, 초음파, 신생아들까지. 대한민국이 역대 최저 혼인 건수를 유지 중이라던데, 내 카톡 안에선 이미 출산율 반등이 끝나버렸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번호를 지우지 않은 구남친, 구썸남, 구소개팅남들의 프사까지 재난 문자처럼 등장한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도 전부 결혼사진이다. 과거의 남자들이 전원 유부남이라 환승연애는 못 나가겠다고 생각하던 중, 한 남자의 프사를 보자 문득 그와의 소개팅 썰이 떠올라 후다닥 사건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소개팅한을 적도 있다. 소개팅을 위해 제주도까지 간 건 아니고, 여행을 간 김에 소개팅을 한 거다. (그거나 그거나) 취준생 시절, 취업 준비가 너무 힘들어 도피 유학 개념으로 제주도에 좀 길게 머문 적이 있다. 한겨울이었고 한파주의보에 강풍주의보까지 겹쳐서 밖에 나가면 걷는 게 아니라 거의 밀려다녔다. 며칠은 아예 호텔 안에만 갇혀 지낼 정도였다. 내가 제주도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엄마의 남사친이 본인 베프의 장남이 제주도에서 일하는데 애가 정말 정말 괜찮다며 나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어차피 갈 데도 없고 심심하던 참이라 친구랑 저녁 먹는다고 생각하고 사진도 보지 않은 채 긴급 소개팅을 승낙했다. 연락처는 빠르게 교환됐고 일사천리로 그날 저녁 약속이 잡혔다.
제주도 소개팅남은 어느 와인바 주소를 보내왔고 나는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혼자 급히 떠난 여행이라 옷이랑 화장품이 턱없이 부족했다. 립스틱으로 블러셔를 하고 아이브로우로 아이라인을 그리며 강제 꾸안꾸 메이크업이 완성됐다. 소개팅 장소에 도착했고 대화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그 당시 유행하던 와인잔에 형광펜으로 낙서하는 것도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아마 ‘새해 화이팅’ 같은 걸 썼던 것 같다.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으면 ‘새로운 시작~ 기대되는 새해~’ 이런 걸 썼겠지만.
식사를 다 하고 제주도 소개팅남의 차를 타고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했다. 차 안에서는 스탠딩에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는 스탠딩에그를 엄청 좋아했는데, 사실 그 당시엔 스탠딩에그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더 희귀하긴 했다. 나도 스탠딩에그 노래를 좋아한다며 조금 따라 불렀더니 그는 마치 운명의 여자를 만난 사람처럼 설레했다. (※주의. 원래 연애란 공통점에 착각해 시작하지만, 차이점에 실망해 끝나는 거랍니다) 드라이브의 목적지는 어느 공원이었는데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도 나는 남자 사용법을 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대화할 땐 분명 차분한데 쌓인 눈을 보자마자 갑자기 발랄해지면 남자들은 반전 매력을 느낀다. 그러고는 남자들도 같이 무장 해제되며 이 여자가 좋아서 신이 나는 건지, 아니면 몇 년 만에 눈사람을 만들어서 신이 나는 건지 본인들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리곤 '심장이 뛴다.' ='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거다. 이 공원에서 우리는 작은 눈사람 두 개를 만들었다. 생각보다 잘 만들어졌고 귀여웠다. 그리고 나는 그 눈사람들 사진을 찍어 카톡 배경 사진으로 바꿔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날 이후 나는 며칠 뒤 제주도를 떠날 예정이었고, 그는 떠나는 날 커피라도 한 잔 더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공항 근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인사를 한 뒤 우리는 헤어졌다. 서울에 도착한 후에도 그는 계속 연락을 해왔고 결국 그도 카톡 배경 사진을 눈사람 사진으로 바꿔버리고 만다. 난 그저 눈사람이 너무 귀여워서 바꾼 것뿐이었는데 그는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바꾼 걸로 의미 부여를 해버린 것이다. 하, 내가 또 아무 생각 없이 한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 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제주도남은 성격은 좋았지만 외모가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는 아랍상이었고 내 기준에 키도 큰 편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그 당시의 나는 연애를 하면 일주일에 7일을 만나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장거리 연애는 아예 선택지에도 없었다. 그렇게 그와의 만남은 예의 있게 끝을 냈다.
박모씨는 취업에 성공해 회사원으로 레벨업을 한다. 그리곤 몇 년 후, 다니던 회사 온라인몰에 익숙한 브랜드의 제품이 입점하게 된다. 바로 제주도 소개팅남이 다니는 회사의 제품이었다. 우리 업계가 워낙 좁기도 하지만 역시 세상은 너무 좁아서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뭐 우리가 사귀었던 것도 아니고 잘 끝난 소개팅 남녀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도 많이 지났고 이젠 내숭 같은 건 내려놓은 지도 오래였다. 반가운 마음에 제주도남에게 카톡을 했고 그도 반갑게 답장을 보내며 본인 회사의 상품을 잘 부탁드린다고 했다. 로맨스는 제주도에서 이미 끝났고 그다음 장르는 B2B 실무가 돼버린다.
다음 달쯤 제주도에 사는 또 다른 남자와 소개팅이 잡혔다. 물론 이번엔 내가 아니라 그가 서울로 날아온다. 몇 년 전만 해도 장거리 연애는 죽어도 못 할 것 같았는데 지금은 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애인이 보고 싶을 때 바로 만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금의 나처럼 일상이 루틴하게 굴러가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수인 사람에게는 생각보다 큰 타격이 아니다. 장거리가 아니어도 주변 회사원 친구 커플들을 보면 어차피 다들 바빠서 일주일에 한 번 보는 게 디폴트다. 그러니까 제주도든 서울이든 거리보다 더 중요한 건 서로 시간을 낼 의지가 있는지다. 물론 왔다가 갔다 비행기 값이 좀 들겠지만. 사랑을 위해서라면... 감수해야겠지, 아마도.
4. 결론 및 코멘트: 제주도까지 다녀왔지만 박모씨는 여전히 싱글이고 여전히 관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