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첫사랑

<서른아홉 싱글 생존기>

by 새로운




달리기에는 단거리 주자와 장거리 주자가 있다.


나는 단연코 단거리 주자다. 나는 무엇이든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해내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으로, 그만두는 속도가 시작만큼이나 빠르다. 시작과 동시에 그만두거나, 시작하기도 전에 그만두거나, 하는 시늉만 하고 그만두거나.


연애도 마찬가지다. 내 연애는 도무지 오래가는 법이 없다. 대부분 1년을 못 채우는데 보통 6개월, 아니 3개월, 짧을 때는 2주…(정말 심각하다). 이런 나도 인생에서 딱 한번 오랜 연애를 한 적이 있다. 6년이 넘는 장기연애를.


우리는 스무 살에 만나 20대의 대부분을 함께했다. 그는 오빠의 친구였다. 그가 오빠와 함께 집에라도 놀러 오는 날이면 나는 문을 꼭꼭 닫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화장실도 꾹 참았다. 그러다가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서 터질 것만 같았다.

대학생이 되던 날 용기 내어 그에게 고백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도 나를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고. 친구의 동생이라서 차마 고백하지 못했다고.


그는 멋지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모든 면을 사랑했다. 쌍꺼풀 진 큰 눈, 넓은 어깨, 유머러스하고 책임감 강한 성격, 매운 걸 좋아하는 식성까지도. 그의 웃는 모습이 좋았다. 웃을 때만 보이는 오른쪽 보조개와 반달눈, 나는 그가 좋았다.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와 철없고 세상물정 모르던 나는 그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했다. 그는 내가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영화 <먼 훗날 우리>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홍대에서 추위에 떨고 계신 할머니의 달고나를 모두 사들고 온 날 찐득이는 손으로 서로의 입을 닦아주며 우리는 낄낄댔다. 하루 종일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입 안에 달고나를 녹여 먹으며.


얼마 후엔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튜닝이 잔뜩 된 아이써티를 샀다. 화이트와 블랙이 섞인 중고차였다. 우리는 그 차를 윌리라고 불렀다. 야생 범고래가 나오는 영화 <프리윌리>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윌리를 몰고 어디든 다녔다. 차에서 밤을 세든, 싸구려 민박집이든 그와 함께라면 뭘 해도 좋았다. 존재만으로도 빛나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랑을 배우고, 환희와 쾌락, 행복의 감정 따위를 느꼈다. 서로의 청춘을 마음껏 낭비하며. 할 수 있는 건 사랑뿐이요 가진 건 서로 밖에 없었으니 젊은 날 사랑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점차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여느 커플처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어느 날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사람처럼 굴다가도 어느 날은 원수처럼 서로를 상처 주고 할퀴었다. 마치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더 깊은 상처를 줄까 연구하는 사람들처럼.


그리고 문득 서로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됐을 때, 서로를 미워하고 가장 밑바닥과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까지 모두 드러내고 난 후에야 우리는 헤어졌다.



그때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영화 <먼 훗날 우리>에서는 꿈을 찾아 베이징으로 상경한 젠칭과 샤오샤오가 등장한다. 둘은 낯선 타지에서 꿈을 키우며 힘들고 어려운 젊은 날을 함께 하지만 젠칭은 노력할수록 가난해지는 현실을 이겨내지 못하고 게임 속으로 빠져든다. 결국 그녀도 떠나고 훗날 젠칭이 그녀를 모티브로 한 게임을 개발해 성공한 뒤 둘은 우연히 마주친다.



“그때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그래도 결국 헤어졌겠지”

“네가 끝까지 내 곁에서 있었다면? “

“네가 성공하지 못했을 걸”

“애초에 모두 바람대로 됐다면? ”

“결국 다 가졌겠지. 서로만 빼고.”



어쩌면 그 시절 이별이란 필연적인 게 아니었을까?

어떤 것들은 지나간 후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되기도 하니까. 우리가 그토록 목숨을 다해 사랑할 수 있었던 건 그때뿐이었다는 걸. 그래서 헤어짐은 당연한 거였다는 걸.


얼마 전부터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했다. 올해의 목표는 풀 마라톤 완주다. 이번에는 인내심을 길러볼까 한다. 긴 거리를 달리며 에너지를 배분하는 법도, 지치지 않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법도, 포기하지 않는 법도 배워야겠다.


이번에도 한참 후에야 알게 되겠지. 이 기나긴 달리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아, 청춘이여. 달리기 하듯 그때처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배경 사진 Unsplash, Maico Amor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