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오후. 집 앞에 새로 생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읽고 싶은 책을 몇 권 샀다. 조금 욕심껏 골라도 가격 부담이 없고 대개는 새 책과 다를 바 없거나 오래되었어도 깨끗한 책들이라 기분도 좋다. 무엇보다 중고품을 구매하는 거야말로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니 마음도 뿌듯해진다. 베스트셀러와 신간 위주로 진열되어 있는 대형서점과 달리 중고서점은 이웃집 언니의 서재에서 책을 고르는 느낌이랄까. 가볍게 읽을 소설 한 권과, 알피가 추천해준 아프리칸 작가의 소설, 알피에게 선물하는 알랭 드 보통의 소설, 그리고 알피가 꼭 읽어보고 싶었다는 묵직한 하드커버. 오늘은 이렇게 총 네 권이다. 모두 새 책 같은 영어 원서들인데 합해서 2만 8천 원을 지불했다. 봉투는 거절하고 책을 두 손에 가득 들고 가게를 나선다.
도서관에서든 서점에서든 책을 골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이토록 든든하고 넉넉하다. 요즘은 전자책으로 읽기도 하지만, 읽고 싶은 책들을 골라서 묵직하게 손에 들고 집으로 향하는 포만감에 비할 바는 아니다. (물론 그 책들을 다 읽는 건 별개의 문제이지만) 거의 월급날 기분이랑 비슷한데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월급과는 달리 책은 그 여운이 꽤 오래간다. 마트에서 장을 가득 봐 올 때도 든든하다기보단 무거울 뿐인데 말이다. 역시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책을 두 권씩 나눠 들고 횡단보도를 기다리다가 앞사람의 신발에 눈이 갔다.
"저기 저 사람이 신은 신발 있잖아. 꼭 양말 같이 생긴 거. 저렇게 웃기게 생겼어도 60만원짜리다?"
"헐. 그 돈이면 읽고 싶은 책 다 살 수 있을 텐데"
"그러게. 좋은 책 골라서 행복하다"
"진짜 행복해!"
노력하지 않아도 대화가 통한다는 건 가령 이런 건가 보다.
집에 돌아와 우리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또는 대각선으로 누워 베개에 파묻혀서 각자 고른 책을 읽었다. 추운 겨울 포근한 이불속 독서와 끊임없이 까먹는 상큼한 귤의 조합이라니. 나는 곧 까무룩 잠이 들었고 알피는 내가 자는 사이에 한 챕터를 다 읽고 보리차까지 끓여놓았다. 고요했던 성탄절이 구수한 보리차 향과 함께 저문다.
2020.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