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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자연 Jan 23. 2023

프리랜서이고 임산부입니다

이토록 강력한 동기부여이자 데드라인


대체로 나의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는 위기의식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난 뭔가에 도전하거나 뭔가를 만들어냈고 결과적으로는 성장의 포인트로 삼을 수 있었다. 


2021년 봄,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 '클래스 101'에 <서비스영어> 수업을 기획하고, 그 해 여름 수업을 론칭했다. 사실 작업을 시작했던 건 그보다도 일 년 전인 2020년 8월이었다. 드디어 성인 영어강사 일이 안정적으로 자리가 잡혀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는데 확진자수가 폭증하면서 모든 수업이 화상으로 전환되었다. 사실 화상 수업이나 방문 수업이나 나에겐 똑같지만 시간당 6~7만원을 지불하고 오시는 수강생님 입장에서는(일대일 프리미엄 어학원이라 비쌌다) 화상수업이 아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대부분의 수강생님들이 규제가 풀릴 때까지 수업을 연기하기를 원했고 수업시간에 따라 페이를 받는 프리랜서인 나는 졸지에 그 달 수입이 반타작이 나게 되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침 여행을 가기 위해 비워놓았던 주였는데 예기지 못하게 쪼그라든 주머니 사정과 코로나에 대한 공포로 나와 남편은 여행 대신 매일 집 앞 스타벅스로 출근하여 이런 돌발 상황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프리랜서가 될 수 있는 길을 도모했다. 


기본적으로 내 시간과 돈을 맞바꾸지 않아도 수입이 들어오는 구조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단지 돈 때문에 뭔가를 하고 싶진 않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장기적으로 나의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했다. 이미 저서를 출간한 적이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집필이었지만 다른 채널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크루즈에서의 호스피탈리티 경험을 살려 서비스영어 온라인 강의를 만드는 것이었다. 막상 마음먹고 나니 수업에 넣을 내용들이 마구마구 떠올라 그동안 이걸 안 하고 어떻게 배겼지 싶을 정도였다. 수업 설계가 얼추 되어갈 때쯤 규제가 풀려 다시 어학원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고, 회화 전담 강사직을 맡게 되어 이전보다 더 바빠지자 다 짜둔 온라인강의 계획안은 나중을 기약하며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서랍에서 이 계획안을 다시 꺼낸 건 일 년 후인 2021년 봄이었다. 

물론 이때도 계기가 있었다. 인후염으로 몇 주를 고생한 후였다. 목소리가 밥줄인 직업인데 목이 퉁퉁 붓고 임파선염으로까지 번지니 지금이야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풀타임으로 수업을 하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또 어학원 수업이 꽉꽉 차서 매달 수입도 나쁘지 않다 보니 은근슬쩍 안주하게 되는 나 자신에게도 뭔가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클래스 101 홈페이지를 다시 탐색해 보니 그전엔 없었던 법률영어, 의료영어 같은 특정 분야의 특성을 살린 영어 수업들이 올라와있었다. 그 트렌드에 힘입어 나의 서비스영어 수업도 순조롭게 론칭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실 크리에이터가 기획한 수업이 실제 오픈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200개의 응원이 필요했는데, 나는 그 조건을 다 채우지 못했는데도 앞서 법률영어, 의료영어 수업의 반응이 괜찮았고 서비스영어라는 소재가 신선했기 때문에 클래스 101팀에 의해 채택이 되었다.

 



모든게 처음이었던 촬영부터 편집까지. 밤을 새가면서 결국 런칭까지 해낸 나의 첫 온라인 수업   




이 온라인 수업을 만들며 다사다난했던 여정에 대한 이야기도 언젠가 쓰게 되겠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수업을 제작하며 전담 PD님이 배정이 되는데 매주 정해진 날에 영상을 완성할 수 있도록 얼마나 응원해 주시고 꼼꼼히 봐주셨는지 모른다. 하루는 PD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제가 담당한 다른 크리에이터님 중 한 분께서 커리큘럼의 마지막 영상을 보내시면서 사실은 만삭 임산부라 이거 넘기고 출산하러 가신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티가 전혀 안 나서 상상도 못 했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땐 '와, 정말 멋진 분이다' 하고는 곧 잊어버렸는데 1년 반이 지난 지금, 나는 배가 꽤 나온 임산부가 되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임신사실을 알게 되고 머리가 또 복잡해졌는데 출산을 하고 나면 그동안의 주요 활동이었던 어학원 수업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프리랜서 형태로 일을 해왔기 때문에 육아휴직 같은 혜택도 받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동안 즐겁게 해 오던 일을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그때 PD님께서 말씀하신 그 임산부 크리에이터님이 떠올랐다. 비록 얼굴 한 번 뵌 적 없지만 만삭의 몸으로 매주 스크립트를 쓰고 촬영을 하셨을 그분을 떠올리며 나 또한 출산을 하기 전까지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그동안의 성인영어 티칭 경험을 정리하는 전자책 출간을 목표로 집필을 시작했다. 그땐 이렇게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지금이 임신 17주이니 남은 23주 동안 틈틈이 작업해서 아기의 탄생과 함께 내 첫 전자책도 론칭해 봐야지'

 

이것이야말로 아주 강력한 동기부여이자 데드라인이었다. 그렇지만 간과한 게 있었다. 임신 17주의 몸은 지금 27주의 몸과 비교하면 그냥 홑몸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 그때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종종 잊을 만큼 입덧도, 불편한 것도 거의 없었지만 주수가 지날수록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하루에 앉아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니 몰랐다. 한 달 전부터 버스만 타면 이상하게 등이 시큰거리며 아프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빈도가 잦아지고 며칠 전부터는 소파에 앉아도 등이 불편하고 밤에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눕는다. 공식적으로 오늘부터는 책상 앞에 앉아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니 예전처럼 소셜미디어에 접속해 의미 없는 스크롤을 내리거나 멍 때리고 앉아있을 시간이 없다. 하루에 4시간 정도 앉아있는 게 가능하다면 그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꼭 필요한 일을 해야만 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정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니 그 시간을 더 농도 있게, 귀하게 쓰게 되어 오히려 좋은 점도 있지만 등 통증은 어떻게 좀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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