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는 한 해
1. 육아
으! 어! 에! 부!로 모든 걸 말하던 20개월의 아기와 맞이했던 새해였는데 어느덧 한시도 쉬지 않고 재잘대는 32개월 자칭 ‘어린이’와 2025년을 마무리한다. 미엘은 정말 하루가 다르게 컸다. 4월에 두 돌 생일 이후로는 할 줄 아는 게 왜 이렇게 날로 날로 늘어나는 건지. 예전엔 일 년 열두 달을 내가 갔었던 도시나 풍경으로 기억했는데, 지금은 어떤 풍경이든 계절이든 미엘이 없는 곳이 없다. 유모차를 탄 미엘, 넘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걷는 미엘, 아기자전거를 붕붕 타는 미엘, 킥보드를 타고 공원을 누비는 미엘, 두 팔을 벌리고 나에게 달려오는 미엘. 요즘은 함께 나누는 대화도 얼마나 찰진지 스쳐 보내기 아쉬운 마음에 인스타에 미엘로그 (@miel_log) 계정에 담기 시작할 예정이다. 너는 기억하지 못할 너의 아름다운 말들, 내가 다 기록해 줄게.
2. 일
작년 11월부터 출근 중인 어학원에서는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의 최대치를 배정하여 정말 즐겁게 수업을 하고 있다. 말은 최대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형태의 삶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개인 시간과 휴식 시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희생하지 않는 선이기 때문에 일주일에 20시간 남짓이다. 성인 일대일 경험은 많았지만 그룹 수업은 처음이었어서 잘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해보니 너무나 내 체질인 수업이었다. 매번 즐거운 토크쇼의 호스트가 된 느낌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속초 출강을 계기로 외부강연도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다.
3. 사업
미엘이 돌이 지나고 육아가 조금 익숙해졌다 싶었을 때쯤 데스파파예(@despapayame)를 열었다. 그게 벌써 작년 9월. 원래 우리가 계획했었던 건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소셜링과 원데이클래스였지만 동탄이라는 지역적인 특성에 맞물려 키즈 영어 쿠킹클래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음식으로 뭔가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인 게 재료프랩과 뒷정리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간다. 보람 있지만 소진되기도 쉬운 일이다. 그래서 방문해 주시는 분들의 만족도가 높고 새로운 분들께서 계속 찾아주고 계심에도 섣불리 수업을 늘리며 규모를 키우지는 못하고 있다. 알피의 또띠야와 살사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봄까지는 선데이마켓도 매달 열었고 하반기부터는 마음이 잘 통하는 오운북앤바 사장님과 팝업레스토랑도 여러 번 했다. 호연이음터 작은 도서관을 시작으로 여러 백화점 문화센터, 강남 1인 커뮤니티센터 등 출강도 꽤 나갔다. 2025년이 빌드업의 한 해였다면 새해에는 사방팔방의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알피가 정말 수고 많았다. 육아동지이자 사업동지 내 짝꿍 고마워.
4. 글쓰기
많이 쓴 것 같기도 거의 못 쓴 것 같기도 하다. 확실히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나다워진다. 많은 게 변했어도 글을 쓸 때의 내 모습만큼은 고등학생 때 문예부 시절 그대로인 것 같다. 사실 많은 곳에 손에 잡히는 대로 기록해 왔다. 가영언니(사다인작가님)와 연재를 할 때는 브런치에, 미엘이의 육아일기는 직접 노트에, 가끔씩 떠오르는 단상은 메모장 앱이나 다이어리에, 다듬어진 짤막한 글들은 인스타그램에. 집 청소뿐만이 아니라 기록도 정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쯤 단단님의 밑미 줌 강연을 듣게 되었고 앞으로 기록을 체계화하고 주간, 월간 회고를 이어가며 콘텐츠화 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꾸준히만 하기.
5. 건강
폐렴과 함께 시작한 새해였다. 폐 CT는 처음 찍어보았는데 무슨 희어멀건한 나무 같은 게 있었다. 육아를 제외한 모든 일정을 일주일 중단하고 며칠 내내 수액을 맞고 집에서 쉬었다.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침과 무기력의 조합은 참 별로였다. 봄에는 인후염으로, 여름에는 부비동염으로, 최근에는 축농증으로 고생했다. 면역력을 되찾자며 영양제도 참 많이 털어먹은 한 해다. 알피의 경우 학교 출근할 때는 감기를 늘 달고 살았는데 퇴사하고 데스파파예를 하면서는 아픈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속초에 함께 갔다가 계단을 헛디뎌 발에 금이 가서 6주간 깁스 신세가 되었다. (아직도 4주 남았다) 다행히 미엘은 비교적 건강하게 한 해를 보냈다. 그저 평범하게 건강한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새해에도 주변 사람 모두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6. 변화
동생 유정이가 영국으로 일 년 동안 유학을 갔다. 한국에 있을 때도 서로 바쁘니 자주는 못 봤지만 한국에 없다니 한 일주일은 기분이 이상했다. 미엘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신다고 할 때마다 이모는 안 온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이모는?”하기도 하고, 비행기를 볼 때마다 런던 가는 비행기라고 말한다. 또 다른 변화는 내년 3월쯤엔 부모님께서 30년을 넘게 사시던 안양을 떠나 같은 화성시민이 되신다는 것. 나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연립주택 단지가 통째로 재개발이 되면서 고 1 때 옆 아파트로 이사 갔지만 여전히 같은 버스정류장에서 학교를 다녔던 곳, 그리고 아빠가 30년을 시무하신 교회. 은퇴하셨지만 그 집에 계속 살고 계시니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싱숭생숭한 기분이랄까. 물론 부모님께서 가까이 이사오시는 건 너무나 든든한 일이다. 함께 할 2026년이 기대된다.
7. 감사
감사의 제목은 너무나 많지만 그중 하나는 올 가을 자차가 생겼다는 것. 그동안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잘 타고 다녔으니 딱히 답답한 건 없었는데 데스파파예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차 없이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근데 마침 유정이가 8월 유학일정이 확정되었다며 차를 넘겨주고 가겠다는 거다. 그때도 그 마음이 너무 고맙긴 했는데 두 달여간 차를 타고 다니며 그 고마운 마음은 배가 되는 것 같다. 그동안 차 없이 어떻게 살았지 싶을 정도. 그래도 눈이 가득 쌓인 길을 유모차를 밀고 등원하며 깔깔 웃던 겨울, 우렁찬 매미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73번 버스를 기다리던 여름, 정류장에서부터 버스 번호를 읊으며 재잘대는 미엘을 예뻐해 주시던 버스 안 할머니들. 차가 없던 나날들, 조금은 부족했던 나날들도 썩 나쁘지 않았다. 지금도 풍족하지 않지만 채워나가는 기쁨이 있는 꽤 괜찮은 하루하루.
8. 다짐
그동안의 추구미가 경험과 성장이었다면 새해에는 선택과 집중이고 싶다. 그동안 나를 키운 다채로운 경험들과 그렇게 다져진 나 자신의 에너지를 원하는 곳에 집중해서 발산하고 싶다. 마음먹은 건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래서 겁 없이 경험하고 도전했던 20대와 30대를 지나 40을 바라보는 지점이 되니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걸 찾기보단 깊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좀 더 정돈하고, 비우고, 모르는 건 배워나가고 회피하지 않는 한 해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