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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자연 Mar 02. 2019

크루즈를 떠나며

나는, 그리고 우리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원하게 된 것뿐이다.



“We are not quitting. We are graduating.”

우리는 그만두는 게 아니야. 졸업하는 거지.


크루즈를 떠나기로 결심한 날 A에게 말했다. 막상 말로 내뱉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초등학교 6년, 중, 고등학교 합해서 6년, 대학을 2006년에 들어가서 2012년에 나왔으니 또 6년. 그리고 크루즈에서의 6년 9개월. 그러니까 졸업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도 하다. 그래, 사실 퇴사라는 말보다는 졸업이라는 말이 좋다. 사표를 내는 모습은 어딘가 쓸쓸해 보이지만, 졸업이라고 하면 보통 졸업식이 있고, 사람들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서 축하해주니까. 그리고 졸업이라는 건 어떤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만한 자격이 된다는 걸 뜻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되려 뿌듯하기까지 하다. 단지 단어 하나를 바꾸었을 뿐인데 이렇게 다른 느낌이다.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이 졸업식 후에는 뭐가 있을까. 애프터 파티가 있을 것이고, 그럼 그 후에는? 또 우리는?






초등학교 4학년에 막 올라가던 때 같다. 봄방학식 날, 새로 배정받은 반이 적힌 종이를 받고 교실에 모여서 새 학년 새 학기를 함께할 선생님과 친구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시간이 있다. 그때는 늘 꽃샘추위가 한창인 2월의 어느 날이었고, 그동안 비어있던 교실에서는 마룻바닥에서 나는 왁스 냄새와 분필 냄새의 조합이 희미한 긴장을 자아내곤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장면은 어깨에 맨 양쪽 가방끈을 꼭 쥔 열한 살의 내가 교실 안에 들어가며 클로즈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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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다른 반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혼자였던 아이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연다. 커다란 미닫이 문을 드르륵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모습. 바로 그 장면. 조그만 아이는 눈에 힘을 주어 크게 뜨고 입술을 앙다물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낯선 교실의 생경한 분위기, 오며 가며 마주쳤던 얼굴들이 드문드문 껴있는 교실. 새 교과서의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와 같은 기분 좋은 두근거림과 낯선 곳에 내 힘으로 홀로 착륙한 것만 같은 은밀한 자랑스러움이 작은 가슴에 가득 차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귀엽고 웃기지만 그때의 당당함은 우주도 정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강도의 단단함이라 정말이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살아오면서 용기가 필요한 순간마다 그때의 나를 불러내곤 했다.  








처음 승선했던 날도 그랬다. 


4월의 뉴올리언스. 아침 공기를 가르며 커다란 23킬로짜리 가방 두 개를 끌고 항구까지 걸었다. 함께 승선하는 또래의 한국인 두 명이 더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나는 혼자였고, 그 느낌이 퍽 좋았다. 크루즈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었고 앞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어떤 일을 하게 될지도 감이 잘 안 오는 상태였는데도 이미 잘 쓰인 책을 처음부터 읽는 마음이었달까. 아직 끝까지 안 읽어봐서 모르지만, 이건 재미와 모험이 가득한 책이며 게다가 해피앤딩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있었다고나 할까. 나 혼자 써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아닌, 나에게 주어졌다는 평안함. 지금 생각하니 그건 아마도 나 보다 큰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을까.  


처음 몇 년은 작은 일이라도 영어로 그 일을 해내는 성취감이 쏠쏠했다. 뷔페를 찾는 승객에게 “쭉 걸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으로 가면 있어요”와 같은 사소한 말 한마디도 유창하게 말한 날은 어깨가 으쓱해져서 혼자 그 말을 반복해서 또 말해보곤 했다. 화가 잔뜩 나서 큰 소리로 컴플레인을 하는 게스트를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 었다. 그저 내가 영어로 이 사람들을 상대하고 월급을 받는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나는 그 일을 꽤 잘했다. 솔직히 말하면 생글생글 잘 웃는 어린 아시안 여자에게 사람들이 관대한 덕도 있었다. 함께 일하면서 나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된 친구 중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있잖아. 너 게스트 상대할 때 보면 되게 진심인 것처럼 보이는 거 잘하는 거 같아. 아니 아니 욕이 아니라, 그런 거 있잖아. 예를 들어 고객님 죄송합니다. 하는데 우리가 실제로 죄송한 건 아니잖아. 너 솔직히 진짜 죄송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근데 이상하게 네가 말하면 진짜 엄청 가슴 깊이 죄송해 보이면서 상대가 화를 못 내게 만드는 아무튼 그런 게 있다니까”


어쨌거나 그런 나의 장점?을 발전시킨 덕에 게스트와 가장 친밀해질 수 있는 포지션인 컨시어지로 승진을 했는데 정말이지 나에게  딱이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사교적이라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는데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스스럼없고 사교적이었던가?"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다.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고 헤어지고 이런 루틴의 반복이었다. 물론 그들의 컴플레인을 처리하는 것도 주요 업무였지만 대부분은 컴플레인을 걸더라도 말이 되는 종류의 것들이었으며 존중받는 기분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어쩌다가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곤 했다. 여행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자기 안방처럼 편하고 입맛에 딱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랬다.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탈탈 털어서 컴플레인하는 걸 매일 20분씩 듣고 있으면 유체이탈을 몸소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또 다정하기 그지없는 좋은 사람들 덕분에 싹 잊고 다시 즐겁게 일하다가 퇴근하는 식이었지만, 그렇게 6개월 정도를 보낸 후 휴가 갈 때가 되면 정말이지 기가 다 빨리곤 했다. 






나의 다정한 사람들. 퇴근도 잊고 저녁식사도 거르고 늦은 밤까지 이렇게 웃고 떠들곤 했다.





이런 고민을 캐시 할머니에게 말했더니 그녀는 말했다. 


“서비스직이라는 게 그래. 나도 간호사 생활을 오래 해봐서 잘 알아. 우리가 하는 거라고는 주고, 주고, 주고, 또 주고, 주는 게 당연한 일이라서 정작 우리의 감정이 너덜너덜해져도 곧잘 알아차리거나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거든” 


캐시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주는 것보다 받는 게 더 많았던 나날들이었으니까. 






스물다섯의 나는 늘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따뜻한 집과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한국이었지만 난 행복할 자신이 없었다. 영어로 대화할 때의 캐주얼한 유쾌함과 누구와 대화해도 평등한 느낌인 분위기가 좋았고 그 안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세계 곳곳을 다니고 싶었고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경험. 그땐 그게 내 삶의 1순위 었다. 


그러니까 배 생활이 싫어졌다거나 갑자기 내 직업이 별 볼일 없이 느껴졌다거나 서비스업이 지긋지긋해진 건 아니라는 거다. 이 곳이 학교라면 나는 이제 졸업할 때가 된 것이다. 난 내가 원했던 삶 속에 풍덩 빠져서 실컷 헤엄쳐보았고, 또 어느새 내가 꿈꿔왔던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러니 나의 우선순위도 바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집 안에 잎이 넓고 파란 식물을 키우고, 매일 아침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집에 돌아오면 정신없이 달려들며 반기는 개 한 마리를 키우는 그런 사소한 삶이 그리워진 것도 인정한다. 비록 그것은 일상의 한 조각일 뿐이고 실은 더 감내할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크루로서의 삶과는 안녕을 고할지언정 크루즈와 안녕은 아닐 것이다. 나의 첫사랑이고 우린 아직까지 좋은 친구이니까. 크루즈에서의 6년 동안 내가 기대했던 것들을 난 만족스럽게 배웠고, 그것을 반복해서 배우는 대신 나는 그것들을 바탕으로 더 큰 세상에 나가 더 많은 것을 펼칠 생각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더 큰 세상’은 내가 답답해서 떠나온 한국이 될 터였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원하게 된 것뿐이다.






하선하기 전 어느 날 우리는 가장 좋아하는 와인 오베론과 몰래 반입해온 뉴칼레도니아 치즈, 라운지에서 손님들이 눈치 못 채도록 종이컵에 넣어온 포도 등을 늘어놓고 작은 졸업식을 거행했다. 그래 봤자 좁은 방 안에서 와인잔을 부딪히며 다가올 날들을 위한 건배를 하는 게 다였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우리는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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