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 혹은 살구

7월 7일, 소서(小暑)

by missingcow

초봄, 새로 이사 온 집의 공동 정원에는 이름 모를 나무와 풀들이 작은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제멋대로 자리 잡고 있었다.

두어 달쯤 지나자, 그중 한 나무에 매실을 닮은 연둣빛 작은 열매들이 옹기종기 달리기 시작했다.


매실나무인가 싶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작은 열매 하나를 따 한입 베어 물었다.

강한 신맛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역시 매실이구나 싶었다.

매실장아찌, 매실청…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매일매일 지나는 정원에서 하루가 다르게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내어주는 모습이 내심 기특해 보였다.

매실이 충분히 익으면 무엇이든 만들어 보자, 마음먹는다.


시간이 흘러 며칠이나 지났을까?

여린 초록의 열매들이 점점 밝은 노랑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내가 알고 있던 매실이 아닌, 다른 매실 종류는 아닐까 싶어 찾아보니 역시나 청매실이 익으면 황매실이 된다는 것이다.

독특한 매실을 볼 수 있다니, 행운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다시 몇 주가 지나고, 매실은 점점 동그랗고 불룩한 배를 지닌 통통한 몸매로 변해가고 색은 점점 짙어져 밝은 오렌지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것은 살구였다.


이 미스터리가 풀리기까지 나는 매실에 관해 연구했었다.

매실이 주는 효능, 매실을 말리거나 절이거나 심지어 빻아서 할 수 있는 것까지. 이제 나는 살구에 관해 연구해야 한다.

우선 머리에 우선 든 생각은 ‘살구잼’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긴 하지만 정원에 대한 지분이 나에게도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나무에서 떨어진 살구들만 주워 모으기로 한다.

성마른 나의 손은 떨떠름하지만 황금빛만은 일품인 한 병의 어린 살구잼을 뚝딱 탄생시킨다.


하지만 정확히 소서(小暑)가 지나자 과일들은 세상없이 고운 빛깔을 띠기 시작했고, 땅에 떨어진 살구에는 개미들이 줄지어 몰려 있었다.

그렇게 다시 주어모은 살구들은 이제 손바닥에 두 개만 쥐어도 꽉 찰 정도로 커져 있었고, 전보다 훨씬 달고 신선했다.


통통한 살구 몇 알을 들고 물로 깨끗이 씻어 물러진 부분은 칼로 도려내고 부드러운 속을 반으로 잘라보니 과육에 박혀 있던 애벌레가 놀란 듯 황급히 도망을 친다.

어쩌면 저리도 빛깔이 고울까 싶은,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맑은 주. 황. 색의 애벌레였다. 세상에 태어나 먹은 게 살구뿐이었으니 당연한 몸빛이겠지만, 너무나 곱고 청량한 빛깔로 앙증맞게 꿈틀거리며 도망가는 오동통한 애벌레를 한참을 바라보니, 문득 용기를 잃고 깊은 상실감으로 흘려보낸 지난 몇 년간이 스쳐 지나간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던 그 변화의 시간을 등지고,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나 자신과 애벌레의 힘찬 발버둥이 묘하게 겹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두려움의 발버둥이 아니라, ‘가야 할 곳이 있으니 나를 그만 놓아줘’라는 힘이 잔뜩 들어간 활기찬 움직임이었다.

이제 그 살구벌레는 다른 존재로 변화해야만 한다.

어떤 모양으로 변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찬란하고 영롱한 색은 어딘가에 꼭 남아 있기를 바라며 정원 한 귀퉁이에 놓아준다.


곧, 비바람이 부는 장마가 시작될 것이고, 햇빛이 닿으면 야광 탁구공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던 살구들은 제 사명을 다하고 또다시 내년을 기다리겠지.

그러면 나는 또 살구잼을 만들기 위해 떨어진 열매들을 주울 테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