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7월 22일, 대서(大暑)

by missingcow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진다. 장마가 시작된 건가 싶다가도 잔뜩 뿔이 난 아이처럼 비를 한바탕 쏟아붓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후텁지근한 바람으로 잠시 멈추기를 반복한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너도나도 퍼다가 나른 온라인 영상 속에는 흙탕물이 도로 위를 출렁거리고 있는데도 비상등을 켜고 조심조심 출근을 시도하는 차들로 도로는 뒤엉켜 있다.

위험을 자초하는 차들을 두고 조롱하는 댓글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나는 흙탕물 범벅이 되어버린 도로를 바라보며 지난 몇 년간의 홍수와 사건들을 떠올린다.

대청댐 수문 여섯 개가 동시에 열리던 날의 위협적인 물살, 폭우 속 출근길에 다리를 건너던 중 다리가 붕괴하며 사라진 젊은 청년, 그리고 나의 중학교 여름 캠프의 기억 말이다.


말수가 적고, 숫기가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늘 혼자 다니기를 즐겼다.

그런 내가 어떤 이유로 여름 캠프에 가게 된 건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영원히 잊히지 않는 것은 절벽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계곡 물가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신난 아이들이 너도나도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홀로 물속에 잠겨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시끄러운 고함과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첨벙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사이에 나는 발이 닿지 않는 작은 웅덩이에 갇혀 숨이 헐떡이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두어 번 물을 마셨을까. 순간 비친 햇살이 잿빛 하늘을 이내 파랗게 물들이고, 나의 이름 세 글자가 새파란 하늘에 붉은색으로 한 글자씩 새겨지며 아찔할 만큼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짧았던 유년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던 찰나, 누군가 나의 머리채를 감아 잡아 올렸다.

물미역마냥 헝클어진 젖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내 주변으로 작은 소란이 일어났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금세 소동은 가라앉았다.

물론 나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도 홀연히 사라지고 말이다.

아마도 나의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물놀이를 즐기는 모양새로 보였을 것이고,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 아이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나를 살려 낸 것이다.

그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도 장마철이 되면 종종 생각한다.


대서(大暑)가 지나자마자, 지난밤 사이의 물난리와 죽음들은 픽션이 아니었겠냐는 듯, 해가 쨍하고 나타났다.

물속에 갇혀 숨을 못 쉬던 기억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공포의 순간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문득, 고속도로 한복판에 바짝 말라비틀어진 로드킬의 흔적을 발견하곤 버릇처럼 가슴팍에 작은 십자가를 긋는다.


'좋은 곳으로 가렴.'


그 형체 없는 죽음에 겹치는 건,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였다.

불과 몇 초를 사이에 두고 두 세계를 가르는 순간들.

마치 내장과 뼈, 근육을 얇은 피부로 몇십 년을 보호하는 강인한 신체가 언제라도 해체될 수 있다는 그 연약함, 총성 한 번에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 잘못 들어선 길에 돌진하는 차를 마주한 순간, 갑자기 푹 꺼진 도로 위의 위험을 알아차린 찰나, 그 아슬아슬한 생사의 경계가 도처에 있다.


작열하는 태양과 시끄러운 새소리가 가득한 아침부터 열기로 푹푹 찌기 시작한다.

에어컨을 틀까 말까 망설이다가 차가운 커피를 만들어 홀짝이면서 어제 사다가 삶아놓은 옥수수를 흘낏 바라본다.

아직은 어린 옥수수라 완전히 영글지는 않았지만 맛은 기가 막히다고 상인이 너스레를 떨던 옥수수를 한입 베어 무니 정말이지 연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다.

그렇게 일 년 중 삶의 에너지가 가장 충만한 한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