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하는 오해

8월 7일, 입추(立秋)

by missingcow

그러니까, 2년 만에 심리검사를 다시 받게 되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산뜻한 여름용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자그마한 체구의 상담치료사가 버튼을 눌러 현관문을 열어 준다.

투명한 유리문이 스르륵 열리면 왠지 정신 병동의 출입문 같다는 생각을 한 지가 벌써 아홉 번째다.


여느 때처럼 밝은 미소로 맞이하는 그녀가 내가 상담실에 들어서자마자 묻는다.


"이번 주에 정서검사를 하기로 했었지요?"


서둘러 들춰본 나의 노트에 그런 단어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적은 포스트잇을 보여주며

"제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요?" 하고 가늘고 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네, 그런 말은 안 하셨지만 상관없어요, 검사해도요."라고 나는 대답한다.


아마도 여덟 번째 상담에서 그녀는 ‘정서검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무의식적으로 그걸 적어두고는 나에게 말했다고 착각한 것 같다.

우리는 지난 만남에서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목표’나 ‘목적’이 전부였던 한 인간의 진부한 인생이야기에 덧붙여야 할 단어였다.


"방향이 잘못됐다고요?"


"아니요, 방향이 잘되고 못되고가 아니라

방향성을 말하는 거예요."


갑자기 사방이 안개로 가득 찬 듯 뿌옇게 흐려지며 모든 것이 일시 정지되어 버렸다.

그 말이 비난도 힐난도 아님을 알면서도,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 숨 쉬기 어려웠다.

내가 평생 공들여 꼭꼭 숨겨두었던 통제와 강박, 집착이라는 수많은 부정적인 이름으로 완성된 나만의 비밀정원이 한순간에 활짝 열려 버린 기분이었다.

영민한 이 작은 체구의 전문가는 이미 그 존재를 눈치채기 시작한 듯했다.

그 정원은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는 감각이며 경험이고 또 내 몸을 통과해 낸 시간의 집합체이다. 그걸 알아차렸다고?


둥그런 테이블에 가득한 빈 종이들이 보였다. 무심하게 그러나 필사적으로 문항에 답을 하고 성심껏 그림을 그리고 검사는 마무리되었다.

마치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어색한 마음이 들어 황급하게 쏟아지는 거리의 폭염으로 다시 나선다.

뜨거운 고층 빌딩들 사이와 녹아버릴 것 같은 아스팔트 위로 보이는 건, 신기루였다.


일말의 가능성과 함께 저 멀리 사라지는, Fata Morgana.


언제부터인가 바람도 쐬고 엄마가 좋아하시는 과일도 살 겸, 2주에 한 번씩 엄마를 모시고 가까운 농수산물시장에 다녀온다.

달고 맛있는 음식에 진심인 엄마와 단맛이라면 질색하는 나이지만 애써 엄마의 취향을 존중하는 편이다.


물이 오른 복숭아들이 보이고 제철 수박도 보인다. 몇 발짝을 걷다 보니 청사과 한 묶음이 보인다. ‘여름 사과가 나왔네? 살까요?’라고 하자마자, 엄마는 단박에 “아이, 시고 맛없어”라고 하신다.

나는 샐쭉해져서는 “내가 젤 좋아하는 과일인데”라고 작게 웅얼거린다.

엄마는 “그래? 몰랐네..”하고는 씹듯이 말을 삼켜 버리신다.


팔순을 훌쩍 넘겨 이제는 노모가 되어버린 엄마는 지금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엄마는 한국전쟁을 겪은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예쁜 것을 좋아하고 여성스러운 성격에 그녀 인생의 중심에는 여느 평범한 엄마들처럼 오로지 자식들만 존재할 뿐, 남에게 크게 관심도 호기심도 없어 보일 때가 많았다.


어린 시절 예를 들면, 복잡한 버스에 빈자리라도 생기면 코앞에 노인이 구부정히 서 있어도 굳이 빈자리에 자기 자식을 앉히고야 마는 몰염치를 감수한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자식의 취향에는 관심이 없고, 방향이 어긋난 사랑을 맹목적으로 퍼부었던 엄마를 나무라기 위해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가정이 그러하듯 가족이라는 굴레가 주는 크고 작은 갈등과 상처는 누구도 피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이 거부하는, 이 알 수 없는 현상을 이해하려는 나의 노력과 관찰의 일부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국 각자의 생김새가 다름을 인정하고, 적당히 선을 긋고 그 영역을 지켜주는 것이 가족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한 결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일본의 독설로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이렇게 말했다.


"가족은 누가 안 보면 버리고 싶다."


음,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바이다.

가족이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면서 제 꼬리를 삼키고 있는 뱀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입력 없는 출력은 없어요”라고 말하는 상담사는 암에 걸려 있다.

그녀도 나처럼 삶의 대변환기에서 앞만 보고 달리던 삶의 고삐를 느슨하게 잡고 전과는 다른 일상을 살고 있다고 했다.

일과 가족의 순서도 바꾸고 조금씩 많은 것들을 덜어내고 있다고 말이다.

나도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뿌리 깊은 치부와 유년의 상처와 오해의 기억들을 그녀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치유됨을 느낀다.


그날, 끝내 집어 들지 못한 청사과 한 봉지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청사과를 먹는다는 건 여름의 정점을 지나 천천히 다른 계절로 접어드는 시기에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것이다.

풋풋하게 연하면서 너무 달지 않은 과육을 한입 베어 물면 그런 기분이 든다.

동시에 화려한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쓸쓸한 기분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나만의 의식에 나의 친애하는 엄마가, 가족들이 동참해 준다면 꽤나 즐거울 것만 같다.

물론 그렇지 않다 해도 전혀 상관없지만 말이다.


입추(立秋)가 지나니 낮에는 매미 떼가 죽을힘을 다해 울어 대고, 해 질 녘에는 슬그머니 쓰르라미가 적요한 밤의 시작을 알린다.


시간의 자리마다 빼곡히 차 있는 자연 현상이 정확하게 제시간에 임무를 완수하고 교대하는 것에 매번 감탄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지난 기억과 아물지 않는 시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 인간의 집착이 마뜩잖다.


연한 초록색 껍질을 깎지 않고 씨들을 골라 접시에 가지런히 담아둔 청사과 한쪽을 포크로 찍어 허공에 빙글빙글 돌려본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포크가 반짝하고 공중에 궤도를 그린다.

우리의 오해가 언제나 그러하듯이 순간 반짝이다가 이내 사라져 버린다.


여름의 끝자락은 그렇게, 같은 계절 안에서 각자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