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3일, 처서(處暑)
동그란 까까머리에 안경 너머로 호기심을 가득 담은 반짝이는 눈빛의 그는, 누군가의 아들이자, 형제, 그리고 사회인이며 동시에 영화감독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서울 북쪽의 고즈넉한 한옥 거실, 중앙에는 오랜 세월을 품은 기다란 원목 테이블이 자리했다. 양쪽으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사람들 사이에는 조용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여남은 명쯤 모인 이 특별한 자리는, 그가 직접 요청해 마련된 자리였다. 영화 상영과는 무관하게 한국의 젊은 영화인들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싶다는 그의 바람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영화적 예술성은 이미 꽤 오랜 전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져 왔으나, 내가 그리 열광할만한 그런 종류의 것은 (감히!) 아니었는데, 졸음과 사투를 벌이느라 끝내 기억할 수 없었던 그의 출세작을 우연한 기회로 다시 접한 후, 그의 영화 거의 전부를 관람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일관된 작품세계에 박수를 보내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기꺼이 나도 구경꾼처럼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인 특유의 밝고 친밀한 분위기 너머로, 오랜 기간 명상을 해서인지 함께 풍기는 고요한 심성이 전달되는 대화 속에 인생을 달관한 듯한 내용들이 오고 갔다.
자그마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톤의 그는 요란하지 않은, 톤 다운된 열대풍의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열린 셔츠 사이로 쇄골과 바짝 마른 가슴팍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감독보다는 수도승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과 영화들이 형제처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는 물리적으로 한 살 차이였지만 인상적인 사유와 말투를 지닌 그가 겪어야 했을 수많은 난관과 좌절의 고비를 넘어 용케도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동년배이지만 여전히 미숙한 나에게 그는 이미 어른으로 다가왔다.
어른이란 먼저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솔선수범의 존재가 아닐까.
나는 70년대 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태어나, 시대의 흐름이 바뀌는 중간 파도를 타고 살아온 세대라고 할 수 있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공중전화에서 휴대폰으로, 그리고 손편지에서 이메일로 시대가 적응하는 순간들의 목격자로 살아왔다.
어쩌면 사회적 시스템이 정착하기 전후를 보고 자랐으니 가장 자유주의적인 세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선배들이 민주화 운동을 위해 학교밖에서 최루탄과 싸움을 하는 마지막 데모의 순간에 동참하였지만, 그 모든 영광은 선배들의 몫이었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한 후배들에 치여 말 그대로 '낀' 세대인 셈이다.
존경할만한 어른이나 멘토의 존재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나, 소설, 철학책에서 찾아 헤매던 시기였다.
선배들은 야박했고 후배들은 무관심했다.
그날 그는 한국의 미술관에서 준비한 그의 영화 중 한 장면이 담긴 싱그러운 초록과 푸른빛이 감도는 듯한 포스터를 답례품으로 준비해서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일일이 간단한 문장과 이름을 적어서 돌려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어떤 이는 감독의 책을 들고 와서 사인을 받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책이나 작품집을 선물하기도 하는 무척이나 훈훈한 분위기였다.
내 차례가 되어 감독과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그는 대화 중에 본인은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고, 그중에서도 애인과의 관계가 가장 어렵다고 우스개 소리처럼 토로했다.
딱히 할 이야기 없었던 나는 그에게 "모쪼록 애인과 잘 지내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자 그가 거침없이 포스터에 덕담과 함께 하트 모양을 크게 그린다.
유쾌하고 따뜻한 메시지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가을의 문턱에 막 들어섰지만 여전히 꽤나 무더웠던 그날도,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달이 밝아 오랜만에 뒷마당에 나가 어두운 정원을 들여다보니, 무성하고 생기 넘치던 정원이 해쓱한 얼굴로 막바지 여름을 넘기고 있는 모양새이다.
정원 한편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키 작은 포도나무가 헝클어진 포도잎과 넝쿨 사이사이로 포도송이들을 품고 있는데, 햇빛을 듬뿍 받은 바깥쪽의 포도는 이미 검게 익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수북한 이파리 그늘아래의 포도들은 여린 초록색에 머물러 있다. 성숙한 열매가 되는 일은 어른이 되는 것만큼 쉽지 않은가 보다.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 처서(處暑)가 코앞인데 기대와 달리 '처서 매직'은 실종 중이다. 활짝 열어 놓은 현관문 너머, 위층의 에어컨 실외기 작동소리에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늦게 찾아오는 가을에 덜 여문 포도송이들이 조금 더 영글어 갈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라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