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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리절트 이승민 Oct 17. 2023

주식으로 4억을 잃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에게 배우다 (1)

고등학교 교사 재직 시절, 학생들이 발표하는 수업이었다. 한 여학생이 발표 대본을 빽빽하게 적어온 걸 보았다. 평소 꼼꼼하고 세밀한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학생답게. 지난밤, 완벽한 발표를 위해 대본을 외우고 또 외웠으리라. 내심 걱정도 됐다. 실수 없이 해야 할 텐데.


역시나 물 흐르듯 거침없이 발표했다. 안심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발표를 따라가던 순간, 당찬 목소리 사이로 삑사리가 흘러나왔다. 여학생은 적잖이 당황했다. 얼굴은 붉어지고 이어지는 발표는 여기저기 막히며 매끄럽지 않게 흘러갔다.  


초등학교 시절, 받아쓰기 시험에서부터 우리는 실수하지 않아야 함을 배운다. 수학 개념을 다 이해하고 있지만 단순히 계산 실수를 한 학생이나 개념을 아예 모르는 학생이나 5가지 선택지 중 잘못된 답안을 고르면 그저 틀린 것으로 간주되는 건 매한가지다. 수능 시험에서 하나의 실수로 4년 동안 출입하는 대학 정문이 달라지기도 한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교사 시절, 시험 문제 출제에 있어 양질의 문제를 고안하는 것보다 문제의 오류가 없어야 함이 우선이다. 양질의 문제가 아니어도 된다.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저 실수하지 않으려 조심할 뿐이다. 결국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서성인다.


얼마 전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나온 유퀴즈를 보았다. ‘아시아인 최초’, ‘최연소’ 등의 화려하고 거창한 수식어를 보유하는 음악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차분하면서도 소탈한 그의 인터뷰에서는 배울 게 참 많았다. 


MC 유재석이 질문한다. 
“대회 내내 미스터치가 한 번도 없었다고 그래요?”

조성진이 대답한다.
“있었던 거 같아요. 미스터치는 거의 매번 나오죠. ‘음’이 너무 많으니까.”


세계적인 거장이 되어가는 대단한 피아니스트도 공연 때마다 미스터치를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조성진 수준의 피아니스트라면 엄청난 연습을 통해 100% 정확한 연주를 해낼 거라 생각했다. 미스터치가 있다면 대회에서의 우승은 불가능할 거라 지레짐작했다.  


이어서 조성진이 이야기한다.


“그래도 그게 목적이 되면 안 되다고 생각해요. 음악이 먼저 들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나하나보다는 전체가 중요해서. 클라이맥스가 어디인지, 큰 그림이 보이게 연주하려고 해요.”
tvN '유퀴즈' 캡처


조성진의 솔직한 대답은 나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나 역시 실수 없이 완벽하게 주어진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의도치 않은 실수는 종종 따라붙기 마련이다. 실수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지만 실수에 짓눌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더더욱 안 된다. 미스터치 때마다 연주를 멈춘다면 클라이맥스에 도달해 보지 못한 채 늘 도입부에서 서성이지 않을까? 




어떤 실수는 그에 따른 결과가 끔찍이도 비참하여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30대 중반, 우연히 친구들 모임에 갔다가 현타가 세게 왔다. 예전에는 공부도 못하고 소위 말하는 별 볼일 없던 친구들이 사업에, 투자에 성공하여 꽤나 잘 나가는 듯 보였다. 번쩍이는 시계와 고급스러운 외제차. 그 시절, 나는 둘째를 임신한 아내, 첫째 아들과 학교 기숙사 사감실에서 살았다. 사계절 내내 곰팡이가 피어나고 여름에는 온기, 겨울에는 냉기 가득한 그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당장 아파트 전셋값도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알 수 없는 조바심을 느꼈다. 일평생 처음 느껴 본 감정이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저 친구들 발등도 따라가지 못할 게 뻔했다. 그날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주식이 쉽고 빠르게 돈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했다. 주식 관련 책을 몇 권 대충 읽어보고는 투자를 시작했다.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수익률이 꽤나 괜찮았다. 빨리 부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과감하게 투자액수를 늘렸다. 결국 과감하게 망했다. 빚만 4억. 


10년이 지난 지금, 그 시절을 회상하며 담담하게 글을 쓰지만 그때는 정말 뼈아팠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재기는 불능으로 보였다.


어쩌겠는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교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실수에 짓눌려 있다간 땅 밑으로 꺼질 뿐이다. 실수를 딛고 일어서야만 하는 절박함은 나를 움직이고 또 움직이게 했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지금, 교사하던 시절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온라인마케팅 대행사를 운영하며 고객님들의 사업이 번창하는데 일조한다. 젊은 직원들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면서 신명 나게 일한다. 


성급하고 분수에 넘치는 과감한 주식 투자는 분명 실수였다. 근데 그 실수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예상치 못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한다.    


매시도 헛발질을 한다. 타이거 우즈도 슬라이스 날 때가 있다. 이세돌이라고 모든 대국에서 단 한 번의 ‘악수’가 없었을까? 이런 실수가 있음에도 기세를 잃지 않고 우승을 거머쥐는 이들을 보면 짜릿함을 넘어선 전율이 느껴지기도 한다. 


삑사리 때문에 발표를 망친 여학생 또한 실수를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한 그녀. 이제는 발표하다 삑사리가 새도 당황치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잠시 음 이탈이 있었네요’라고 웃어넘기는 여유를 지닌 베테랑이 되었다.



거장도 미스터치를 한다. 



미스터치에서 멈추지 말고 당신의 클라이맥스를 꼭 들려주길.



*배경출처: 영화 '돈'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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