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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Sep 30. 2015

29살, 나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75일간의 유럽여행 (서늘한 북유럽부터 뜨거운 크로아티아까지...)


29살, 나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불현듯이 찾아오거나, 운명적인 무언가에 이끌리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아니었다. 오랜시간 마음 한 곳에 응어리져 있던 것들이 온몸 가득 허우적거리며 바둥거리다 드디어 손 하나를 밖으로 불쑥 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손은  마음 속 깊은 용기의 손을 잡아 주었고, 다부진 목소리를 끄집어 내 주었다. 나는 직장 생활 내내 망설이다 드디어 내밀어 준 그 손길에 기쁘게  응답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 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정해졌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꼭 학교에서 정해 준 여름방학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내가 하지 않으려 해도 하지 않을 수 없고,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규칙. 하지만 매우 행복하고, 신나고, 설레는 규칙 ‘여름 방학’.   

급히 색연필을 쥐고 시간표를 짜 보아도 결코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걸 안다. 마지막엔 어영부영 ‘인생의 교훈’이라던가, ‘자아의 발견’같은 거창한 방학숙제를 해내려 머리만 굴리다가 이내 포기할 것도 안다. 그나마 미루지 않고 일기를 쓰는 것 정도가 이번 방학의 소소한 목표지만 이도 잘 모르겠다. 방학 동안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자고, 잘 뛰어 놀면 키도 크고 건강해진다던 초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이제 키는 클 수 없지만, 잘 먹고, 마시고, 푹 자서 찌든 낯빛이라도 바뀌고 돌아오면 좋겠다는 묻는이 없는 혼자만의 대답을 하며 베실베실 웃었다. 


언제부턴가 하루 하루가 매일 똑같이 느껴졌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잠이 들고, 금요일인 것 같더니 또 월요일이다. ‘아우 더워’가 순식간에 ‘왜 이리 추워’로 바뀌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애로 충만했던 나는 어느새 진짜 집에서 독립을 하게 되었고, 혼자 벌고, 혼자 살고, 혼자 생활비를 충당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20대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지나가는 시간을 즐기기는커녕, 그 속도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흐름을 따라잡기조차 힘들어 온몸을 뒤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입에선 “시간 참 빠르다.”란 말이 찰싹 달라 붙어 그 말에 조종이라도 당하듯 눈을 감고 앞으로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카이프에 정말 오랜만에 독일인 친구 토마스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무려 7년 동안 만나지 못한, 사실 연락도 자주 하지 않았던 런던 어학연수 시절의 친구. 하지만 그 친구의 메시지로 이런 나의 어리지만 간절한 바람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뭐 그렇게 고민이 많아? 그럼 우선 회사를 그만둬. 그리고 독일로 놀러 와. 우리 집에서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좋아.” 



나의 아름다운 사람들

요즘 대학생들은 어학연수가 필수적이 되었고, 워킹홀리데이 및 유학도  보편화되었다. 허나 사실 나는 22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이 나라를 떠날 기회가나에게 올 것이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외출할 땐 가족들의 눈치를 보는 가부장적인 집안의 딸, 서울도 제대로 가본 적 없는 부산여자.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무턱대고 집을 떠나 런던으로 갔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였는지, 어떠한 용기가 어디서 솟아났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이지만, 그저 막연히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런던에서의 생활은 지금은 곱게 포장되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판타스틱 어드벤처로 기억되지만 분명 그 당시에 나는 아빠를 잃은 소공녀 세라처럼 열심히 일했다. 부모님께 도움 없이 잘 살고 오겠노라 큰소리를 치고 왔던지라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2개의 아르바이트와 어학원을 병행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런던임을 감사함과 동시에 한국과 똑같은, 혹은 더 뻑뻑하지만 빠르게 돌아가는 기름기 없는 톱니바퀴 사이에 이불을 펴 누운 듯한 불편함과 혼란을 느끼곤 했다.  

그런 톱니바퀴의 바퀴를 밀어내고 미끄럼틀을 만들어 준 이들이 있다. 나의 아름다운, 오랜 친구들이자 이 여행을 시작하고 아름답게 끝내게 해 준 독일의 토마스, 프랑스의 실비. 


어학원의 친구들과의 관계는 한정적이다. 만남과 동시에 헤어짐이 정해져 있다. 마치 떠도는 새 같기도 하고, 유랑하는 뗏목 같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 웃으며 만나고 웃으며, 혹은 울며 헤어졌다. 그게 매일같이 반복되어 웃고 우는 것이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하는 것만큼 당연해졌다. 우리에게 런던에서의 우정은 순간은 너무 특별하지만 금방 빛을 잃는, 유행하는 모조 보석 같기도 했다. 허나 그 와중에 낯선 바다에서 주운 아름다운 돌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를 떠올려준 이 고마운 우정이 있어 나는 이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또한 호스텔에서 만난 여러 국적의 홀로 여행 온 여행자들, 처음 만나 식사도 하고 함께 술과 아이스크림을 먹어준 친화력 넘치는 여행자들, 호스텔의 수많은 나의 룸메이트들, 나에게 길을 안내해준 셀 수 없이 많은 현지 사람들. 세르비아인 교수님 부부와  오래전 내 집주인이었던 런던의 이든과 린다. 

막연하지만 새삼스럽게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기분 좋게 깨닫게 된다. 무인도처럼 스쳐가고 이름 모를 철새처럼 머리 위를 스쳐갈 지언정 확실하지 않은 형체 없는 믿음이더라도, 우리는 분명 오늘도 아름다운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가고 있다. 계절이 바뀜을 알리는 바람과 낙엽처럼 우리가 쉽게 깨닫지 못할 뿐인 것처럼.  

먹고, 마시고, 춤추자! 



퇴사를 하고 딱 일주일 만에 출국을 했다. 사실 그때는 엄청난 불안감과 두려움이 함께했다. 그저 신나게 짐을 싸고 계획을 싸기엔  그동안 냉랭히 굳어 사무적으로 변한 나의 안면근육도 다 녹아나지 않은 상태였다. 퇴사를 한다고 해서,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고 해서 내가 순식간에 변화되진 않았다. 허나 여행을 준비하며 엄청난 설렘 사이에 낀 불안감을 적당히 포장하고 스스로를 달랠 만큼의 여유가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조금의 여유가 내 여행의 끝은 더욱 풍요로울 것이란 청사진을 투영하는 것 같아 나는 그 긴장감을 즐기기로 했다.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순간부터 틈틈이 여행 준비를 하긴 했지만 체계적인 준비를 하기엔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우선 가고 싶은 나라들을 종이 위에 적어 내렸고, 그 나라들 중에서도 가고 싶은 장소가 있는 곳을 우선순위로 정리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작품, 영화 속 배경이 된 곳들, 취미에 부합하는 장소들이 추려졌다. 그리곤 그 곳에서 하는 콘서트와 페스티벌을 검색해 춤추고 노래 부르고 즐길 수 있는 곳들을 검색했다. 

젠가에서 블록 하나를 빼내 듯, 점점 가야 할 곳들이 좁혀졌다. 

맛있게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이번 여행에서 무언가를 찾는 다던지, 깨달을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애초에 거창한 목표 보다는 방학 동안 다른 도시에 놀러 간 초등학생처럼 진짜 신나게 놀고 수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전체 여행 일정 (총 75일)

독일-> 덴마크-> 스웨덴-> 에스토니아-> 핀란드-> 노르웨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영국-> 프랑스->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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