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모르는 이민 계약. 2

by 미쓰김 라일락

이주공사는 강남에 있었다. 나는 강남에 차를 끌고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는 길이 막히기도 하고 도착해도 주차 공간이 없거나 매우 협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약을 하러 가는 그날은 그런 불편한 감정 따위는 문제 되지 않았다. 나는 영주권을 딸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힘든 일도 감사히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 한 명이 영주권 받게 되면 나의 배우자와 자녀들은 동반 가족으로 함께 영주권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또 캐나다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들은 무료로 다니는 공립학교도 유학생으로 갈 경우에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나의 아이들은 이것을 무료로 다닐 수 있게 된다. 나 한 명의 노력으로 우리 가족이 캐나다에서 안정적인 거주자의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니.... 집에서 밥 한 끼 거하게 차려 낼 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설렘과 뿌듯함에 가슴이 벅찼다. 아마도 나는 이 감정에 취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민 과정을 끝까지 해낼 수 있게 해 준 힘이 되어 주었다.



차가 막혀 시간이 좀 오래 걸렸지만 약속 시간에 늦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주차 공간이 협소 하긴 했지만 주차장을 관리하시는 분께서는 나의 자리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 주셨다. 인생이 바뀌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긴장한 걸까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이주공사는 신사동 한 건물 6층에 있었는데 올라가자마자 화장실에 먼저 들렀다. 내가 화장실에 있는 동안 밖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주 공사 직원인 걸까?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내 두려움과 긴장을 화장실에서 내려 보내고 나와 한 호흡 크게 쉬고는 조심스럽게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파티션이 처져 있는 사무실에는 꽤 여러 명의 직원 분들이 근무를 하고 계셨다. 나와 가까운 곳에 계시는 여자분 께서 나를 발견하고는 밝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나를 아무도 없는 작은 회의실로 안내해 주셨다. 모든 직원 분들이 내가 오는 걸 알고 계셨던 것 같았다.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나와 통화를 했던 팀장님께서 들어오셨다 그리고 대략적인 설명을 해 주셨는데, 이 프로그램에 들어갈 때 자리는 방금 전 주차장에서 기가 막히게 만들어주신 주차공간만큼이나 기가 막혔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기가 막히게 운이 좋았다.



이주 공사가 진행하는 이민의 시스템은 마치 일자리 중개소와 같은 느낌이다. 캐나다 현지에서는 영주권을 지원해 주면서까지 노동력을 끌어 와야 하는 인력이 부족한 회사를 찾고 한국에서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위해 기꺼이 노동자가 될 한국인들을 찾아 이들을 연결해 주고 그 절차에서 필요한 업무를 대신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들의 소개를 받아서 나는 캐나다 시골 마을의 한 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회사는 나를 안정적으로 고용하기 위해 정부 기관에 나의 영주권을 요청하여 내가 영주권 자가 될 수 있게 지원해 준다. 이주공사도 이민을 가려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려면 먼저 현지에서 회사를 찾고 계약을 해서 일자리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계약이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자리는 대기 중인 사람들의 순서대로 채워지므로 나의 차례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계약을 할 수 있게 된 그 자리는 사실 내 자리가 아니었다. 원래는 한 모녀가 내 앞 순서에 있었는데 문제는 자리는 한 개인데 이 모녀는 엄마와 성인이 된 딸이라서 두 개의 자리가 필요했다. 성인이 된 자녀는 독립한 것으로 인정되어 동반 영주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두 명. 자리는 한 개. 이 자리에 누군가 한 사람이 들어가면 모녀는 각각 떨어져서 서로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이민 초기는 낯선 땅에서 뭐가 뭔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데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모녀가 각자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을 리가 없다. 그들은 이 한 자리를 포기하고 함께 갈 수 있는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고, 한자리만 필요했던 나에게 그 차례가 온 것이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딱 한자리 남았고 다음 차례에 꼭 붙어서 타려는 커플이 있어서 혼자 타려는 손님을 수배하는 상황에 마침 내가 그 혼자 온 손님 중 첫 번째라 내 앞의 커플보다 내가 먼저 타게 되는 짜릿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감사하며 롤러코스터에 탑승했다.



계약서를 쓰고 집에 가서 그날 중으로 계약금을 보내기로 하고 도파민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계약금을 이체했다. 부끄럽지만 내 통장에 잔고는 보통 거의 바닥이었다. 모아둔 돈도 없었고 살림은 남편 계좌의 돈과 카드로 했기에 나에게 계약금을 보낼 만한 돈이 없었는데 그때는 운이 좋게도 내 통장에 돈이 있었다. 전업 주부였지만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무엇이든 해 보고 싶었고 이런 나에게 주식 투자를 해 보라며 며칠 전 남편이 투자금으로 좀 준 것이다. 돈을 받을 때는 이 돈이 이주 공사 계약금으로 쓰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주식을 해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돈이 이렇게 쓰이다니. 타이밍이 좋았다. 남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 뭐. 가족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데 쓰였으니 그 쓰임의 결은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쯤에서 문득 가슴 아픈 진실이 나를 때렸다.


나는 왜 이 나이가 되도록 '내 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돈이 한 푼도 없는 걸까?


나는 도대체 지금껏 무엇을 하며 살아온 걸까?

월요일 연재
이전 03화남편은 모르는 이민 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