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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May 25. 2023

크로바레코드 1

1. 반쪽짜리 하트

크로바레코드 봄봄화실


 우측 서가 뒤편엔 작은 통창이 있고, 그 창으로 벚나무가 보인다. 유리에 갇힌 벚나무는 스노볼처럼 고요하고 반짝거린다. 점점이 잎을 떨구는 벚나무 밑으로 네가 걸어온다. 이편을 본 것도 아닌데 공연히 한발 물러나서 서가에 숨는다. 두근대는 심장도 같이.

 보송보송한 흰 스웨터에 베이지색 바지, 천연 곱슬머리일까 파마머리일까 부드럽게 웨이브 치는 머리, 엄지와 엄지 사이에 받쳐보고 싶은 가파른 턱. 가까이서 보는 네 눈동자는 갈색일까, 짙은 어둠일까. 못 보던 책이 눈높이에 꽂혀있다. 음, 이건 도서관 책이 아닌데, 더듬더듬 책을 꺼내 펼쳐본다. 연보라색 내지에 연필로 쓴 글씨.      


‘나도 여기서 보는 벚나무를 좋아해 –하니’    

 

 눈을 감으면,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종이를 달려가는 사각사각 연필 소리, 그리고 네 발소리. 

“이 책 정리하면 될까요?” 

연보라색 내지를 찢어 주머니에 넣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가지런한 책머리 너머로 너를 훔쳐본다. 어깨높이로 쌓인 책 중에 이 서가에 꽂힐 책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로 도망친 건지도 몰라. 

이번엔 책을 빌리지 않고 나왔다. 당분간은 도서관에 오지 못할 것이다. 


카디건의 소매를 걷어 올린다. 접어 올린 바짓단으로 봄바람이 느껴진다. 도서관은 모든 계절이 다 좋다. 특히 봄이 좋다. 마음껏 설레도, 날씨 탓을 할 수 있는 봄이 좋다. 



“하루 더 있다가도 되는데.”

볕이 방 너머까지 뻗는다. 빨래가 잘 마르는 방이었는데, 조금은 아쉽네. 몇 안 되는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주인아줌마가 자양강장제를 들고 왔다. 집 상태도 살필 겸 왔을 것이다. 싱크대도 깔끔하고, 화장실도 보송보송하다. 창틀에 앉은 먼지를 빼면 이사 올 때와 달라진 게 없다. 내 마음이 빈곤해진 걸 빼면.


“그간 감사했습니다.”

“나야말로, 아가씨처럼 조용하고, 깔끔한 사람은 없었는데, 아쉽네.”

있는 힘껏 병뚜껑을 돌린다. 쏟아붓듯 음료수를 마시고, 가방 손잡이를 잡는다. 떠날 시간이다. 

“참,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었어. 좀 들리라던데.”

“오늘요?”

“그래, 두 시까지 와달래. 아가씨가 전화를 통 안 받는다고,”

 무음으로 해두었으니 그랬겠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부재중 전화가 20통이 넘는다. 30분 쯤 남았으니, 시간은 충분하다. 그나저나 계약이 만료된 세입자를 뭣 하러 부를까. 

“신분증하고 도장 챙겨오라던데.”

“도장이요?”

 주근깨인지 기미인지 구분은 되지 않지만, 웃으면 제법 말괄량이 같은 주인아줌마가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가방을 들지 않은 손으로 나도 따라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작년 여름에 주셨던 시원했던 수박, 감사해요. 바퀴벌레와 쥐도 종종 나왔지만, 그래도 좋은 집이었어요. 


깨진 포석 위에서 바퀴가 요란스레 굴러간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정말 든 게 없긴 한가 보네. 부동산엔 나 말고 세 사람이 모여있다. 사장이 서둘러 자리를 권한다. 엉겁결에 앉았다. 

“대통령보다 모시기 힘드네.”

“무음으로 해놔서요.”

내가 이렇게 격식을 갖춘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만날 일이 있었던가. 아무래도 잘못 왔지 싶다. 가방을 구석에 세워놓고, 어깨에 멘 기타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어머님께 연락은 받았지?”

“아니요.”

“그럼,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거야?”

네, 그렇습니다. 엄마가 내게 이러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전세금을 빼서 낯 모르는 친척의 병원비로 송금했을 때도 이런 식이었다. 사양할 틈도, 꾀를 부릴 틈도, 심지어 애도할 틈도 없이 절벽으로 내모는 게 엄마의 방식이다. 


“그럼, 자세한 얘기는 어머니께 듣기로 하고, 일을 진행 시키도록 하죠.”

하나는 마르고, 하나는 더 말랐다. 그중 어묵꼬치처럼 마른 사람이 서류를 내 앞으로 돌려놓았다. 

“김 곰 씨에게 2억 빌려주신 거 맞으시죠?”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비 명목으로 돈을 빌려간 먼 친척의 이름이 곰인 건 몰랐지만, 2억이 까인 건 맞다. 5년간 뼈 빠지게 모은 돈과, 할머니의 유산, 대출까지 끼고 있던 전세보증금까지 탈탈 터니까. 얼추 2억이었다.

 

어묵꼬치 사내가 내민 서류엔 모월 모일 돈이 흘러간 내역이 상세히 나와 있다. 이번엔 나무젓가락의 차례인가 보다. 내 나이의 갑절은 묵어 보이는 종이뭉치를 건넨다. 등기필증, 매매계약서, 기타 등등 봐도 모르겠는 서류뭉치를 건성건성 보고 있자니 다시 차례가 돌아온 어묵꼬치 사내가 붉은 도장이 찍힌 종이를 내민다. 문제의 곰 씨가 참으로 반듯하게 도장을 찍어놓았다. 

“도장 가져오셨죠? 여기 찍으시면 됩니다.”

가만, 이러다가 나 장기까지 탈탈 털리는 거 아냐? 시키는 대로 유순하게 도장이나 박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이게 뭐죠?”

“대물변제계약서입니다.”

“대물변제… 뭐요?”


어묵과 젓가락이 잠시 마주 본다. 이 정도로 바보인 줄은 몰랐겠지. 그래요. 제가 2억을 떼먹힌 멍청이거든요. 당장 한강에 가도 이상할 게 없는 바보라구요. 마음의 소리를 다시 서랍장에 넣어두곤 순진하게 웃어 보였다.

“채무자께서, 그러니까 김 곰 씨께서는 빌려 가신 돈 대신, 이 건물로 빚을 갚겠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에게 얘기하듯, 아주 친절하고, 인내심 있게 어묵 사내가 말을 골랐다. 

아, 그거 감사한 일이네요. 아니, 잠깐, 애초부터 건물이 있었다면, 건물을 담보로 돈을 빌렸으면 될 것 아닌가. 왜 피 같은 내 돈을 가져가고, 대신 건물을 준대? 아무것도 안 주는 것보단 낫긴 할 테지만, 설마, 귀신이 나오는 폐가나, 이름뿐인 상가인 거 아닌가. 서둘러 계약서를 들춰본다. 


“다소 변두리에 있긴 하지만, 빚을 변제하고 남을 만큼의 건물은 맞습니다.”

나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 머릿속 생각이 말로 되는 과정이 남들보다 더딘 사람이다. 남들은 뜀박질을 하듯 말을 이어가지만, 나는 몇 개의 터널을 지나, 잔디를 가로질러, 비로소 길로 들어선다. 그 덕에 내가 말을 할 때쯤엔 고맙게도 상황이 정리되어 있을 때가 많다. 

“걱정할 거 없어. 아주 멀쩡한 건물이니까. 곰 씨가 입원하기 전까진 영업도 했다더라. 2층짜리 건물인데, 1층은 곰 씨 가게이고, 2층은 세 줬대.”

더는 나빠질 것도 없겠지. 도장을 꾹 찍는다. 내 소유의 건물이라면 오늘부터 자도 될까. 당장 갈 데도 없는데. 


“부족한 서류는 이번 주 내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젓가락 사내가 필요한 서류가 적힌 메모지를 다른 서류들과 함께 챙겨준다. 바보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배우고 오신 분 같으시네요. 감사의 표시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그리 착하게 살더니, 정말 하늘에서 복을 내려줬네.”

복이 될지 재앙이 될지 아무도 몰라요. 정말 건물이 있는지. 너덜대는 비닐하우스가 있는지도 모르구요. 

“얼굴도 모르는 친척이라며.”

“네.”

호구 인증을 하는 것 같아 목소리가 저절로 기어들어 간다. 그래도 제법 야무지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기도 안 당하고, 다단계도 피해가고, 종교집단에 끌려간 적도 없는데, 친척에게는 속수무책으로 털렸다. 아니, 이 주소에 정말 건물이 있기만 하다면, 호구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나, 횡재한 건지도. 


젓가락 사내가 열쇠꾸러미를 건네주었다. 열쇠만 봐도 연식이 느껴진다. 지금 연식을 따질 때가 아니지. 이 지친 몸을 뉠 수만 있다면, 헛간이라도 반갑겠다. 

“수수료는 걱정할 거 없어. 김 곰 씨가 내주기로 했으니까. 뭐, 그 정도 돈은 있는 모양이지.”

아마, 그 돈도 제 돈일걸요. 빈 수레에 계약서 일체를 눌러 담고 부동산을 나왔다. 세 사람이 배웅한다. 내가 위태롭고 불쌍해 보여서인가? 아니면 쓸쓸한 바보의 뒷모습을 감상하고 싶어서인가. 


길가 벤치에 앉아 핸드폰으로 주소를 검색했다. 두 시간 정도, 전철을 타고 가면 되겠다. 역에서 내려서 20분은 걷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중요한 건 그 건물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친절하게 건물 외향까지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가는 길은 꼼꼼하게 나와 있다. 


주머니 속 열쇠가 짤랑댄다. 연보라색 종이가 같이 달려 나온다. 다시금 달아오르는 얼굴. 그가 내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 숨는다고 숨었는데, 들킨 걸까. 단정한 글씨를 다시 한번 읽어본다. 이렇게 운이 좋으면 안 되는데, 억세게 운이 좋다가 낡아빠진 건물 지하에서 시체라도 발견하면 어쩌지.


 불길한 생각은 봄바람에 날려 보내자. 봐, 민들레도 웃잖아. 개똥도 구르잖아. 구름도 덧없이 흩어지잖아. 열쇠 끝에서 반쪽짜리 하트가 달랑거린다. 열쇠고리치고는 너무 서정적이다. 이렇게 감수성 충만한 분께서 시체를 숨기시진 않으셨겠지. 


저 멀리 토스트 가게가 보인다. 안 좋은 생각들이 나는 건 역시 허기 때문이다. 마가린 향을 향해, 분연히 일어섰다. 너, 허기 네 방종도 여기까지니!



#달달로맨스 #힐링소설 #크로바레코드 #현로 #웹소설 


23화까지 완결된 소설입니다.  3-4개씩 뭉텅이로 올릴 예정입니다. 

잔잔하면서도 달달한 글입니다. 부디 즐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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