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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May 25. 2023

크로바레코드 2

2. 연보라색 내지-H 

   

 그녀가 서성이던 서가로 향한다. 아련한 복숭아 향이 마음을 간질인다.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벚나무 밑에서 멈춰선 그녀가 망설이듯 돌아본다. 몇 개의 꽃잎이 너를 스쳤을까. 그 꽃잎에 내 마음도 몇 장 띄워 보낸다. 

붉은색 장정판을 꺼냈다. 헌책방에서 고른 표지가 예쁜 책이다. 물론 설레는 내지도 맘에 들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냥 네게 주고 싶은 책이라 생각했을 뿐. 달아오른 뺨을 책으로 식힌다. 공연한 짓을 한 걸까. 

“속 터져 죽겠다.”

근로장학생 주제에 마구 덤빈다. 내가 이래서 아는 사람을 뽑는 걸 싫어한다. 특히 오래된 친구 놈은 결사반대다. 

“그런 바로크 시대 방식으로 접근하지 말랬잖아.”

반납도서를 정리하고, 잠시 숨을 돌리러 나왔다. 아까부터 내 행동을 주시하던 근로장학생, 아니 악질동창생도 따라붙었다. 이름은 유성. 친구들끼리는 매직이라고 부른다. 자판기에서 뽑은 시원한 매실차를 입막음으로 건넨다.

“일 단계일 뿐이야.”

“이게 무슨 다단계냐. 고백은 시너처럼 화끈해야 하는 법! 그렇게 미적거리다가는 2단계 가기도 전에 끝난다고. 피시식.”

“고백이 무슨 분신자살이라도 되냐.”

“그럴 각오로 임해야지!”

그러시구나. 그래서 그리 숱한 여성 동지들을 울렸구나. 달달한 매실차가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커버를 넘긴다. 고운 내지가 무참히 찢어져 있다. 내 마음은 주머니 속에 담겨있을까. 종이배로 접혀 노을 진 강변을 떠다닐까. 버리려고 했으면 찢지도 않았겠지. 나라면 그럴 텐데. 

“싫진 않은가 보네.” 

매직이 요리조리 책을 살펴본다. 

“근데 너 그거 아냐? 오늘은 책을 빌려 가지 않았어.”

“그게 뭐?”

“날마다 노새처럼 책을 이고 가는 그녀가, 단 한 권도 빌려 가지 않았다고, 반납은 산더미처럼 해놓고 말이지.” 

“어디 가는 길일 수도 있잖아.”

마음이 답답해진다. 오래오래 책을 고르고, 산 같은 책을 등에 짊어지고 가던 그녀가 오늘은 꽃잎처럼 가볍게 나갔다. 연보라색 내지만 찢어 들고.

“가는 길은 맞겠지.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길이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길.”

“야!”

“고로 너의 2단계는 기약 없이 멀어졌다고.”

2단계를 체계적으로 준비한 건 아니지만, 막상 기회조차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멍해졌다. 비약이 심한 녀석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황당무계하진 않다. 그녀는 정말 먼 길을 떠난 걸까. 

“다음에 혹시 기회가 있다면 말이다. 그땐, 다짜고짜 밥부터 먹자고 해.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말고, 밥!”

“밥?”

“모든 연애의 시작은 밥부터라고,”

왜 그런 논리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밥이 포인트가 아니라, 다음이 포인트다. 밥 먹을래요? 다음이 된다면요. 

 책을 등록하고, 독촉 전화를 걸고, 다른 도서관으로 갈 책을 노끈으로 묶어 정리했다. 기계적으로 일을 하는 내내 복숭아 향기가 떠다녔다. 서가를 두고 그녀를 바라본 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지만, 동시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가에 앉아, 눈을 감고 소리를 듣는다. 손끝으로 책장을 넘기는 소리, 기계식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 프린터기가 돌아가는 윙 소리, 그녀는 백색소음을 사랑한다. 복숭앗빛 그녀가 붕 뜬 두 발을 살랑살랑 흔드는 그 기척을 나도 사랑한다. 


“하니 사서, 퇴근 안 해?”

선배 사서가 책상을 두드려서 깨어났다. 매직이가 기다리는 것도 잊고 또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 사람이 퇴실했다.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 매직이는 도서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는 아니다. 매직이를 좋아하는 아동실 사서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보채지 않았구나. 

“하니 사서, 같이 밥 먹을래?”

“좀 체한 거 같아서요.”

“어머, 그래서 안색이 안 좋구나.”

남의 데이트에 끼는 건 돌이키지 못할 바보짓이다.

“저도, 오늘은 사양할게요.”

매직이까지 식사초대를 거부하니, 이편이 난처해진다. 분명 호시탐탐 단둘이 될 기회를 노렸을 텐데. 이거 어쩌나.

“그래? 그럼 나중에 같이 할까.”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그녀가 돌아선다. 매직이와는 다섯 살 정도 차이가 날까. 물론 연상이다. 동글동글한 얼굴이 그보단 어려 보이긴 하지만, 서른을 넘겼다고 들었다. 

“약속한 거 아니었어?”

“아니, 일방적으로 기다린 거야.”

“내일부턴 차에서 기다려.”

“그게 답답해서 말이지. 날도 이렇게 좋잖아.”

그러게, 선선한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까지. 차에 틀어박히고 싶지 않은 날씨네.

“다정도 병이다.”

“공감. 이 얼굴에 다정까지 겸하니, 다들 상사병이 드네.”

“죽인다.”

매직이의 옆구리에 어퍼컷을 날린다. 서글서글 미남형 얼굴을 납작납작 수제비처럼 만들어줄까 보다. 

“나는 계속 봐야 할 사람이니까, 울리지 마.”

“나도 공과 사는 가리거든. 폐 안 끼칠게.”

“고맙다.” 

널 근로장학생으로 뽑은 걸 후회 할 뻔했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골목길을 걸어간다. 중학교 담장을 지나서 주택가 골목으로 접어든다. 오 분쯤 걷다 보면 단출한 상가건물이 보인다. 상가건물이라고 하기보단 소형주택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지만, 그래도 간판을 내건 가게는 맞다. 1층은 레코드 가게, 2층은 화실. 지금은 둘 다 문이 닫혀있다.

“반상회에서 얘기가 나왔다던데.”

“무슨 얘기?”

“사람이 안 사니까, 범죄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지.”

담배를 문 학생 몇을 화실 계단에서 본 것 같긴 하다만, 고작 그런 일로 범죄의 온상이라니, 지나친 기우다. 

“그래서?”

“다행히 곰 아저씨랑 연락이 닿았다나 봐.”

어느새 상가 앞에 주저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 옛날 꼬마 시절. 종일 뛰어놀다 땟국물 든 손으로 하드를 빨아먹곤 했는데. 그늘진 차양 밑이 시원하고, 음악도 좋았다. 가끔 꼬마들에게 맞춰 동요나 애니메이션 OST도 틀어주었다. 좀 더 커서는 빵빵한 와이파이 때문에 앉아있곤 했지만. 

“수술은 무사히 끝났나 봐. 이 가게도 곧 문을 연다고 했대.”

“아,”

정말 다행이다. 셔터가 내려간 가게를 돌아본다. 일 년 가까이 되었으니, 마을 노인들이 우려할 만한가. 아마도 걱정의 다른 표현 방법이겠지. 시끄럽다고 타박을 하면서도 신청곡을 주문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걸핏하면 들려서 공짜 차를 얻어 마시는 것도. 그리 대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다 건강하신가. 이 가게가 문을 닫은 후엔 안부를 알 길이 없어졌다. 배호의 노래를 좋아하던 우리 할아버지도 그 사이 돌아가셨다. 

“이젠 음악을 틀어놔도 쫓아 올 사람이 없겠네.”

마음이 통했나 보다. 하긴, 우리가 이 골목에서 보낸 세월이 거의 평생이다. 매직이는 우리 집 건너에 산다. 걸음마를 떼던 시절부터 함께 했으니, 모르는 거 빼곤 다 안다. 심지어 시시콜콜한 연애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특히 내가. 

“빈집이 늘었지?”

“뭐, 그렇긴 한데, 금방 다시 찰 거야. 팔린 집도 있거든.”

배꼽시계가 울려서 일어났다. 정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따뜻한 등이 켜지면, 다시 놀러 와야겠다. 이 가게에서만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이 그립다. 이제는 절판되어 버린 추억들이 그립다. 

“넌 공무원을 할 게 아니라, 백화점 명품관에서 가방을 팔아야 해. 그게 아니면 방문판매를 하거나.”

“뭔 말이냐?”

대답 대신 턱으로 가리켰다. 매직이의 집 앞에 안면이 익은 여자애가 기다리고 있다. 몇 번인가 술자리에서 본 기억이 있다. 

“아,”

“이참에 호스트라도 해보지그래? 대성할 것 같은데.”

“나도, 괴롭다. 분명 마음에 없다 했는데.”

“그 말조차 다정하게 했겠지.”

“아마도.”

“그럼, 나 먼저 간다.”

“구원해줄 생각은 없고?”

“응.”

 널 구원해주려다, 뺨따귀 맞은 게 어디 한두 번이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재빨리 스쳐 지나간다. 부디 무사하거라.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봄바람이 웅성대는 창문을 열었다. 손엔 이슬이 맺힌 맥주 캔 하나.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그만이다. 2층 내 방 창으론 야트막한 집들의 옥상 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좋다. 깜빡하고 걷지 않은 빨래나, 초록 넝쿨을 뻗어 올리는 한철 화분 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드물게 보이는 별이나, 반짝이는 비행기 불빛이 정겹다. 물론 맞은 편에서 실랑이를 하는 남녀도 의도치 않게 보게 되지만. 인근 카페라도 갈 줄 알았더니, 아직도 저 아래에서 두런거리고 있다. 더 이상 시간을 뺏기기 싫은 매직이의 마음이겠지. 다정은 다정일 뿐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매직이는 정말로 좋아하는 여자한텐 무뚝뚝하다. 그런 방식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건 나름 좋은 방법이다. 그게 가까운 내 가족이라면 말이다. 매직이는 우리 누나를 좋아한다. 같이 목욕탕을 가고, 홀딱 벗고 물장구를 치던 시절부터 그랬다. 바람둥이 주제에 그 마음만은 한결 같아서, 다른 곳을 기웃대다가도, 금세 주인 곁을 맴도는 강아지처럼 달려오곤 한다. 하여간, 재능 낭비형 인간이다. 인기척을 눈치 챈 매직이가 위를 올려다본다. 가볍게 손을 올려 축배를 들고는 창을 닫았다. 너 때문에 봄바람도 맘대로 못 쐬지, 내가.     


#달달로맨스 #웹소설 #크로바레코드 #현로 #힐링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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