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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May 25. 2023

크로바레코드 3

3. 크로바 레코드-J

   

물어물어 찾아온다. 토스트는 벌써 침몰하였는지, 해적 같은 허기 놈이 다시 기승을 부린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마트에서 먹거리를 산다. 5kg짜리 쌀이랑, 김치, 김. 당장은 이걸로 족하다. 손잡이 떨어진 냄비 정도는 있겠지. 생쌀을 씹어먹을 일이 없기만 바란다. 

 

이 길을 쭉 따라 올라가면 있댔다. 중학교 담장을 따라 걷는다. 헌 옷가게를 지나, 방앗간을 지나, 꼬치구이집을 지나, 우측 골목이다. 차 한 대도 들어가기 힘든 비좁은 골목이다. 고무대야에 심어놓은 꽃가지들 덕에 더 좁고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 

이런 구석에 무슨 가게가 있다는 걸까. 발걸음을 재촉한다. 조금이라도 밝을 때 도착하는 게 좋겠다. 그래야 전등 스위치라도 찾을 수 있다. 물론 있을 지도 모르는 시체도. 


가로등이 일시에 켜진다. 명랑한 실로폰 같구나. 이른 가로등 불빛 아래 정말로 있다. 크로바 레코드! 초록색 바탕에 촌스러운 흰 글씨가 가로등 불빛에 도드라진다. 올려다본 2층 화실엔 간판 대신 유리에 시트지가 붙어있다. 봄봄 화실. 여기가 맞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앉은 자리에 온기가 느껴지는 건, 봄이기 때문이겠지. 골목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다면 누군가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오늘은 연보라색 내지로 족하다. 더는 내 심장이 놀라선 안 돼. 반쪽짜리 하트가 달랑이는 열쇠를 꺼냈다. 친절하게 이름표까지 붙여두었다. 이게 셔터 열쇠. 이게 가게 문, 나머진 2층 열쇠다. 셔터엔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녹이 슬어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몇 번 만에 열렸다. 반만 올리려고 했는데, 드르륵 소리와 함께 시원스레 말려 올라갔다. 

그 덕에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생각보다 넓구나. 어스름이 내린 가게 안엔 페브릭 소파와 동그란 등나무 테이블 몇 개, 그리고 계산대와 정수기가 보인다. 어둠 저편엔 다른 뭔가가 더 있겠지만, 허기와 함께 공포심도 잠시 넣어두고, 열쇠를 과감하게 꽂았다. 


전등 스위치는 입구에서 바로 찾았다. 환하게 불이 들어오자, 공포심도 냉큼 달아났다. 어둠 저편에 있던 실루엣은 일렉기타와 전자피아노였다. 보면대와 턴테이블도 시치미를 떼고 서 있지만, 한 패인 걸 안다.

 가게 안쪽 문은 화장실인가? 아니다! 작은 싱크대가 놓여있는 방이다. 상자가 쌓여있는 걸 보면 창고로 썼겠지만, 가스도 놓여있고, 물을 틀어보니, 몇 번 기침 끝에 콸콸 흘러나온다. 이참에 보일러도 돌려본다. 윙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살아있다. 손에 얼굴을 묻는다. 2억을 날리고 방황하던 날들이여, 안녕! 웃음인지 흐느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손 틈으로 새어 나온다. 역시 밥을 먹어야겠다. 서둘러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안친다. 냉장고에 든 반찬은 먹으면 죽을 것 같고, 찬장에 든 깡통들은 아직 괜찮을 것 같다. 


밥이 익는 냄새를 무기 삼아 가방을 정리했다. 당장 입을 옷과 변변찮은 살림들을 늘어놓고, 방 옆에 붙은 화장실도 점검했다. 비좁지만 쓸만하다. 샤워기는 없지만, 쪼그리고 앉아 씻으면 된다. 


구석구석 탐방을 하고 나니, 전기밥솥에 초록 불이 들어왔다. 쟁반에 김치랑 구운 햄, 그리고 고봉밥을 담아 가게 테이블로 나왔다. 몇 술 뜨자, 가게 안이 제대로 보인다. 빽빽하게 꽂힌 게 LP로 구나. 아깐, 벽을 메운 무늬로 보였는데, 많기도 하다. 저쪽 벽은 테이프다. 나야 기껏해야 CD를 몇 번 구매한 게 다이지만, 엄마네 미용실은 오래된 전축이 있어서, 간혹 LP를 돌리곤 했다. 


그나저나, 곰 씨는 뭘 해서 먹고 살았을까. 설마 이 LP 판을 팔아서 지금껏 먹고 사신 건 아니시겠지. 고봉밥이 금세 사라졌다. 가게 불을 끄고 들어왔다.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라도 손님이 오면 난감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파는 물건인지도 모르겠고, 가격 또한 가늠할 수 없다. 일단 내일 생각하자. 

그릇을 헹구고, 마실 물을 끓이는 데 문자가 왔다. 엄마다. 


‘옷장을 열어보면, 새 이불이 있을 거다. 문단속 잘하고.’


참 엄마다운 문자다. 자초지종은 하나도 없이 이불 타령이구나. 답문을 건너뛰고, 옷장을 열었다. 아직 비닐에서 뜯지도 않은 새 이불이 보인다. 

한 김 식은 물을 물통에 담아두고, 미지근한 바닥에 발랑 누웠다. 이불은 아직 비닐에 싸여있다. 눈을 감는다. 방을 메우던 밥 냄새가 사라지자, 낯선 이의 체취가 느껴진다. 내일은 디퓨저를 사 와야겠다.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가 흥건히 젖어있다. 낯선 곳에 와서 잠들 때면 늘 같은 꿈에 시달린다. 버스를 탈 땐 분명 누군가 같이 있었는데, 내리고 보니 혼자다. 어딘지도 모르는 역에서 울고 있자니, 긴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언니가 다가온다. 

“니가 제이니?”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언니는 나를 알아본다. 울고 있는 내 손을 잡고, 자꾸만 모르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 할머니는? 내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차게 식힌 보리차를 꺼내 컵에 따른다. 목울대를 울리며 꿀꺽꿀꺽 마신다. 주머니에서 연보라색 내지를 꺼내 다시 읽는다.      


 ‘나도 여기서 보는 벚나무를 좋아해 –하니’     


텔레비전 밑 서랍에서 테이프를 찾아냈다. 누우면 보이는 벽면에 종이를 붙였다. 부적처럼 나를 지켜주렴. 비닐을 뜯어내고, 이불을 덮었다. 석유 냄새가 났다. 누군가의 체취보다는 편한 냄새. 막 나온 책에도 이런 냄새가 난다. 다시 그가 보고 싶다.


누군가 문을 두들긴다. 그 반동으로 유리문에 붙은 구리 종도 흔들린다. 쿵쿵, 딸랑, 쿵쿵, 딸랑. 근데 여긴 어디지? 수면 상태의 뇌가 제 자리로 돌아오는 사이 종소리가 사라졌다. 그래, 빚 대신 건물을 물려받았었지. 보일러를 켜고 자서, 온수가 콸콸 나왔다. 그 덕에 호사스럽게, 몸을 씻기기로 했다. 샤워기 대신 호수를 쓰는 것도 나름 좋구나, 수압이 아주 끝장이다. 겸사겸사 화장실 청소도 마치고, 수건도 빨아 널었다. 


어제와 다를 게 없는 밥을 먹고, 신경 써서 옷을 입었다. 모든 게 처음인 곳에서 첫인상부터 나쁘면 안 될 것 같다. 가방에 처박혀있었음에도 찰랑찰랑 주름 하나 없는 연분홍 시폰 원피스에 흰 카디건을 입는다. 화장은 선크림에 립밤까지. 다소 창백해 보여서 블러셔를 할까 하다 관뒀다. 봄바람에 금세 상기되겠지. 반 곱슬머리는 털기만 해도, 적당히 예쁘다. 미장원에 자주 갈 일이 없는 나에겐 최상의 머리카락이다. 


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먼지들이 낮에는 아주 선명하다. 디퓨저를 사 오는 김에 청소도구들도 사 와야겠다. 

뭐부터 할까? 호기롭게 전입신고부터 할까. 동네를 얼쩡거리며 아르바이트라도 구해 볼까. 이 궁리 저 궁리 하며 보리차를 홀짝이는데, 다시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유리문 너머로 그림자가 아른댄다. 단정한 복장의 남자다. 


“할머님들이 벌써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시죠.”

“네?”

“주민센터에 나오시는 날이잖아요. 수요일 10시,”

“?”

“이 기타 맞죠? 자, 어서 서두르세요. 지금 가면, 안 늦어요. 자세한 건 차에서 얘기하죠.”

남자가 통기타를 덥석 들더니, 밖으로 나갔다. 오늘처럼 말이 느린 내가 원망스러웠던 날이 없다. 자초지종도 모르고 주민센터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수요일마다 마을 어르신들을 상대로 노래 교실을 하셨더랬어요. 아프시기 전까지는 하루도 빠지지 않으셨지요.”

곰 씨 이야기인가 보다. 일단은 잠자코 듣기로 했다. 전후 사정을 알아야 반론도 할 테니까.

“입원 후에는 대체 할 사람을 알아보긴 했는데, 할머님들이 완강하게 반대하셔서요. 기다려야 한다고, 꼭 돌아온다고, 그게 의리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의리 좋다. 근데, 그 의리에 왜 내가 끌려가야 하나. 뭔가 착오가 있는 거 같은데. 

“저, 근데…”

“곰 씨가 가게를 물려주셨다면서요. 더불어 이 일도 맡기셨다고. 덕분에 한 시름 내려놨어요. 할머님들 성화가 장난 아니었거든요. 곰 씨가 맡기신 분이라면, 할머님들도 좋아하실 거고요.”

맡기다니요. 뭘요?

이놈의 말이 또 입으로 나오지 않는다. 


“자, 다 왔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죠. 다음엔 혼자 오실 수 있으시죠? 오늘은 초행길이실 것 같아, 모시러 간 겁니다.”

엉겁결에 네, 하고 답하고 말았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주체성 없이 휘둘리며 살았던가. 진즉에 의심하긴 했지만, 오늘 보니 확실히 마리오네트구나. 나란 인간. 단정한 복장의 주민센터 공무원을 따라 2층 계단을 올라갔다. 반쯤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뚝 멈췄다. 


“드디어 모시고 왔습니다. 곰 씨는 아니지만, 곰 씨의 피를 이어받은 따님이니, 노래 하난 끝내줄 거란 생각이 드네요. 모두 동의하시죠?”

박수 소리가 들려서, 나도 모르게 공손히 인사했다. 가만, 지금, 따님이라고 했냐? 왜 말이 그렇게 되는데? 

“근데, 뭘 해야 하는 거예요?” 

할머니들이 수런대는 틈에 물었다. 친절한 공무원님께서 보면대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웃는다. 

“아마, 다 아시는 곡일 거예요. 선창하시면 할머님들이 따라 부르십니다.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어주셔도 좋고요. 기교가 필요한 부분은 따로 가르쳐주시면 더 좋아하신답니다. 더불어 춤까지 추시면 금상첨화고요,”

그게 될 리가 있습니까! 


“이쪽에 노래방 반주 기계도 있으니까요. 필요하시면 쓰세요. 아마, 기타보다 더 반응이 좋을 거예요.”

교실을 메운 어르신들은 서른 명 남짓이다. 거의 다 여자분들이시고, 종종 남자분들이 끼어있다. 수다도 잠시, 이제는 이편의 동향만 쫓고 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최선을 다할밖에. 다시 한번, 귀족 풍으로 손을 가르며 인사를 했다. 

“많이들 기다리셨습니다. 아침은 든든히 드시고 오셨나요?”


떠들썩한 대답이 들려왔다. 좋다, 아주 반응이 좋은 학생들이다. 여세를 몰아붙여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트로트 메들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본격적인 떼창이 들려온다. 좋아, 좋아. 목부터 풀고, 오늘은 장윤정부터 하자. 할머니께 재롱 삼아 불러드리던 곡들이, 이런 데서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보람은 있구나. 꼭 할머니가 좋아해 주는 것처럼, 이 착한 학생들도 좋아해 줘서, 공연히 울컥했지만, 꾹 참고, 손이 떨어져 나갈 듯 기타를 쳤다. 


두 시간쯤 되자, 다시 그 공무원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그러지 않아도, 언제까지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모두 즐거우셨나요?”

격한 반응이 들려왔다. 이런 흥쟁이들 같으니라고, 

“저도 즐거웠습니다.”

다시금 귀족풍으로 인사를 하고, 공무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성미 급한 할머님들은 벌써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인사가 늦었네요. 소 세민이라고 합니다.”

친절한 공무원의 이름을 이제야 알았다. 소시민 같은 외모에 소시민 같은 이름이네. 나이는 서른 즈음, 

“송 제이라고 합니다.”

세민 씨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아버지로 추측되는 인물과 성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뭐, 그런 일도 종종 있으니까 하며 넘어가려는 눈치다. 그럼, 나도 그냥 넘어가야 하나. 결코, 이쪽은 딸 같은 게 아니라고.


“닮긴 닮았네. 특히 눈매가”

“무슨 말이여. 구먹구먹 아주 똑같구먼.”

“그르게. 곱슬머리도 닮고,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도 빼다 박았어!”

“그렇죠? 저도 보자마자 따님인 줄 알았다니까요.”

소 세민 님께서 가세하신다. 어딘가 닮긴 했겠죠. 그래도 먼 친척이니까요. 

“혼자 사나 했더니, 이렇게 과년한 딸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르게, 생각보다 응큼맞아.”

“사내는 사내였던 게지.”

“에고, 딸 앞에서 별소릴 다 했네. 미안, 곰 씨한텐 이르지 마.”

이르고 싶어도 이를 수가 없습니다. 누군지 알아야 이르든 말든 하죠. 할머님들이 깔깔 웃으며 교실을 나간다. 그제야 한숨 돌리고 뒷정리를 했다. 


“가시기 전에 서류 좀 작성해 주세요.”

“서류요?”

“네. 자원봉사에 가깝긴 해도, 재료비 명목으로 지원금이 좀 나오거든요. 뭐, 간단한 서류니까, 금세 작성할 거에요. 아, 이참에 전입신고도 하면 되겠네. 아직 안 하셨죠?”

앗싸, 전기세 벌었다! 다음 주부터는 더 가열차게 준비해서 와야겠다. 곰 씨 따위는 잊고, 나의 마성에 빠져보시라. 이참에 내 현란한 발재간도 좀 보여줘야겠네. 

서류 작성을 마치고, 전입신고까지 끝냈다. 

“지원금은 말일에 입금될 거에요.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건성 건성으로 보긴 했지만, 그래도 돌아가는 길을 알겠다. 워낙 가까운 거리니까 뭐, 타박타박 걷는데, 또 배꼽시계가 울려댄다. 너만은 날 잊지 않고 늘 찾아주는구나. 이 충직한 허기야. 분식집이라도 없나 기웃대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지금 외식을 할 때가 아니다. 잡화점에 들려 디퓨저랑 간단한 청소도구들을 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향 중에 제일 좋은 건 복숭아 향이다. 좋아하는 과일도 그렇고. 여름을 좋아할 수 있게 하는 과일이랄까. 콧노래를 부르며 복숭아향 디퓨저를 열었다. 아 달콤한 향기. 이 낯선 공간도 금방 좋아질 것만 같다. 밥솥에 남은 밥을 긁어 담고, 김치를 볶는다. 참치 통조림을 까서 통째로 넣고, 들기름도 듬뿍 넣는다. 벌써 침이 고인다. 

배불리 먹고 청소를 시작했다. 뒷집 담벼락이 보이는 창도 열어두고, 가게 문도 활짝 열었다. 바닥을 쓸고 닦는다. 선반에 켜켜이 쌓인 먼지도 정전기 청소포로 꼼꼼히 닦고, 가게 유리문도 유리 세정제를 뿌리고 신문지로 박박 문댄다. 신문지에 연신 검은 때가 묻어나는 것이 몸이 멀쩡하던 시절에도 이 문은 별로 닦지 않았나 보다. 


“곰 씨 딸이 왔다더니만, 참말이네.”

뒤를 돌아보니, 어딘지 모르게 조류를 닮은 아주머니께서 올려다보신다. 키가 엄청 작아서, 정말이지 참새 같은 인상이다. 

“아, 안녕하세요.”

“응, 곰 씨는 좀 어때?”

“수술 잘 마치고, 엊그제 퇴원하셨어요.”

이 또한 엄마한테 문자로 전해 들은 바다. 

“그럼, 한참 요양 중이겠네.”

“네.”

아마도요. 

“숨겨놓은 딸이 있대서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이었어, 그것도 이렇게 크고, 예쁜 딸이 있을 줄 우린 꿈에도 몰랐지 뭐야.”

저도 몰랐습니다. 여기 와서 제가 딸 노릇을 하게 될 줄은요. 

“난, 요 앞 방앗간 아줌마야.”

와, 관상은 사이언스라더니! 

“가래떡 좀 가져왔는데,”

그 말을 듣고도 계속 유리를 닦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안으로 모셨다.


“커피랑 녹차가 있는데, 뭘로 드릴까요?”

“커피믹스. 부탁해.”

내가 물을 끓이는 동안 참새 아주머니가 가게를 둘러 보신다. 

“동네 사람은 내가 처음인가?”

“네, 아까 주민센터 직원이 오시긴 하셨는데.”

“주민센터 직원? 세민이?”

“네.”

“그럼, 내가 처음이 아니겠네. 걔도 이 동네 사람이야. 지금은 아파트에 살긴 하지만, 예전에 여기 살았으니까. 가만 있어 봐.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노래 교실도 갔다 왔겠네.”

참새가 말을 한다면, 과연 이만큼 빠를 것인가. 커피를 내어주며 참새 아주머니를 새삼 바라보았다. 

“하여간, 빠르다니깐. 난 내가 처음인 줄 알고, 좋아했더니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뵙는 분은 처음인 걸요.”

“그으래?”

은근 좋아한다. 대체 내가 뭐라고,

“곰 씨를 닮긴 했구나. 그래 이름이 뭐라고?”

“제이입니다.”

성은 생략하기로 했다. 그편이 편할 것 같다. 이 낯선 곳에서 곰 씨의 딸로 지내는 편이 여러 면에서 편할 테지.

“제이? 곰 씨가 그 노래 참 잘 불렀는데.” 

커피를 홀짝이며 아주머니가 내 기타에 눈을 둔다. 뭐지, 한 소절 불러달라는 눈빛인데. 

“한 곡 들려드릴까요?”

“어머, 그래 줄래?”

그러려고 오신 것 같구만요. 아무래도 여기, 동네 사랑방이 아니었을까. 

이선희의 ‘J’를 불러본다. 그 맑고 청아한 음성을 흉내 낼 순 없지만, 그래도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목소리로 그 시절의 ‘J’를 소환한다.


부르다 보니 사람이 늘었다. 노랫소리를 듣고, 모인 것인지, 아까 참새 아주머니가 만지작대던 핸드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덕분에 차를 더 끓였다. 참새 아주머니가 들고 오신 가래떡도 같이 내어놓았다. 전에 쌀을 사다가 뵈었던 슈퍼아줌마와 초면인 세탁소 아줌마다. 지금 시간이 가장 한가한가 보다.

“점심 교대야. 집이 가까워서 잠깐 가서 먹거든.”

“한 시간은 채워야지. 빨리 가면, 손해야.”

“그러게. 우리도 복지가 있어야지.”

가족끼리 하는 가게여도, 분명 복지는 필요하다. 그래서 밥 먹고 돌아가시는 길에 여기에 들리시는구나.

“여기가 닫혀있어서. 복지고 나발이고 아주 죽을 맛이었어. 뭐, 낙이 있어야지.”

“제이가 와서 다행이야.”


기뻐해 주셔서 저도 감사합니다. 가위로 가래떡을 싹둑싹둑 잘랐다. 역시 서로 말을 맞춘 것인지, 세탁소 아주머니가 꿀을 덜어 가져오셨다. 슈퍼 아주머니는 통 크게 커피믹스 한 박스를 들고 오셨다. 곰 씨는 여성호르몬이 많으셨던 건가요. 이 수다를 어찌 견디셨나요? 잠시 대화에 끼어있다가, 슬그머니 걸레를 집어 들었다. 세 분은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어서 내가 자질구레한 일을 해도 개의치 않았다. 다행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늘 오셔도 괜찮겠다. 

유리를 마저 닦고, 조금 썰렁해진 것 같아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문들을 닫았다. 


“어제도 그 집 앞에 여자애가 서 있던데?”

“나도 심란해 죽겠어. 매직이가 늦는 날엔 아주 야밤까지 가질 않아.”

“집에 좀 들여.”

“미쳤어!”

“하긴 더 오해할라.”

“제이가 몇 살이지?”

드디어 신상 조사인가?

“25살입니다.”

최대한 공손히 답했다. 

“우리 아들이랑 동갑이네. 근데 이놈은 왜 이리 철이 안 들까. 아직도 졸업을 못 하고 학교에 다녀.”

세탁소집 아주머니의 푸념이 이어진다. 얼굴에 흰 김을 쬐는 직업들은 피부가 참 곱다. 요 앞에 앉은 참새 아줌마도 그렇고, 이참에 아부를 좀 떨까.

“어쩜, 피부가 너무 고우세요. 아직 30대도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대학생 아들이 있으세요?”

시무룩하던 아주머니의 얼굴에 어마무시한 폭죽이 팡팡 터져나간다. 

“어머, 정말?”

활짝 웃으니까, 한결 낫다. 정말 30대가 될 수도. 바짝 붙어 앉아 매끄러운 피부를 만져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팽팽하구나. 

“와, 화장품 모델 해도 되겠다.”

세탁소집 아주머니의 기분이 이로써 정상궤도에, 아니 그보단 상류 즈음에 도착했다. 

“아휴, 제이 같은 색시만 있으면, 내가 바로 며느리 삼는다. 이렇게 싹싹하고, 이쁘고, 성실하잖아.”

아직 성실한지 어쩐 지는 모르시잖아요. 앞엣것도 다 맞는지 모르겠고요. 그래도 칭찬을 들었으니, 노래 한 곡조 뽑기로 했다.

삼십 촉 백열등은 달려 있지 않지만, 그래도 마주 앉아있으니, ‘목로주점’을 부르기엔 딱이다. 잠시 추억에 잠긴 듯, 아주머니들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곰 씨는 정말 딸 하난 잘 뒀네.”

“내 말이.”

“아유, 우리 영감탱이가 부른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핸드폰이 짧은 휴식이 끝났음을 알린다.  

“다음번엔 쌍화차를 가져올까?”

“그래, 그게 떡 하고 어울려.”

“그럼, 난 과일이나 가져올게.”

덕분에 비타민 걱정 안 해도 되겠습니다. 아주머니들을 배웅하고, 제각각인 잔들을 헹궜다. 떠들썩한 아주머니들이 사라지자, 어쩐지 허전하다. 역시 음악이 없어서인가. 명색이 레코드 가게인데, 음악이 없는 것도 참 쓸쓸하다. 시험 삼아 틀어보기로 하자. 음, 어떤 게 좋을까. 가느다란 레코드 등을 살펴보다 카펜터스의 ‘Close to you’를 발견했다. 


‘나처럼 별들도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은가 봐요.’ 시 같은 가사와 따뜻한 목소리가 마음을 울렸다. 가게 밖에 앉아 봄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카펜터스의 노래를 들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볼륨이다. 스피커는 차양 바로 아래에 붙어있었다. 어느 한 곳 튀는 곳 없이 잘 돌아간다. 좋구나. 이 바람과 이 노래.


 어느 집 담장에선가 벚꽃잎이 날아온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벚꽃잎이 떨어진 자리마다 연보라 빛 그림자가 퍼져간다. 내게도 다정한 봄빛이 스며드나보다. 두근두근 그 빛에 빠져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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