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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May 25. 2023

크로바레코드 4

4. 후추 맛 파 맛-H


“하니, 왔니?”

공손하게 인사하고 식탁에 앉았다. 막 썰은 김치와 대접 가득한 곰국이 나를 반긴다. 쫑쫑 썰어놓은 초록 파도 반갑구나. 

“엄만, 왜 곰국만 끓이면 얠 불러?”

“곰국 핑계로 나도 눈 정화 좀 해야지.” 

“나나 얘나.”

“아무리 맛난 것도 맨날 먹으면 물린다.” 

한껏 물린 매직이가 입을 삐쭉대면서도, 고슬고슬 지은 밥을 국에 만다.

“잘 먹겠습니다.”


 송송 파도 넣고, 후추도 팍팍 뿌렸다. 집에서 끓인 곰국은 너무 진하기도 하고, 끓이면서 맡은 냄새에 질리기도 해서, 먹기가 힘들다. 하지만 매직이네 집 곰국은 그리 진하지도 않고, 잡내도 없다. 그 덕에 한 공기 정도는 뚝딱 할 수 있다. 어릴 때 놀러 와서 저리 얘기했더니, 매번 끓일 때마다 초대해 주신다. 

“오늘도 맛있네요.”

“후추 맛, 파 맛으로 먹는 주제에.”

“김치도 엄청 맛있어요.”

“니네 집 김치가 더 맛있어.”

드디어 꼬집혔다. 매직이가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지른다.

“얘 밥 먹는데, 촐싹거리지 말고, 좀 가만히 있어!”

매직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곰국을 먹는다. 매번 보지만, 참으로 흥미롭다.


“제이는 봤어?”

“그게 누군데?”

“곰 씨네 딸 못 봤어? 그 레코드 가게.”

후추로 뻗으려던 손을 멈추고, 아주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한테 딸이 있었나?

“아, 불이 켜져 있긴 했었어.”

“좀 들러보지 그랬어?”

“엄마가 빨리 오랬잖아. 밥 다 퍼 놨다고.” 

“으이그, 이상한 기집애들 집 앞에 세워놓지 말고, 그런 아가씨를 만나란 말이야.” 

이 틈에 후추를 획득했다. 역시 순한 맛이라, 좀 더 쳐야겠다. 

“누군 그러고 싶어서 그러나.”

김치가 떨어져 간다. 아주머니가 눈치 좋게 다시 한 접시 내놓는다.


“하니, 너도, 애인 없지?”

어째 화살이 나한테 온다. 

“엄마, 얜 짝사랑 중이라니까!”

어흑, 소리와 함께 대박이가 고개를 푹 숙인다. 아직 발차기 실력이 녹슬지 않았구나.

“그렇게 참한가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암만, 노래 잘하지, 예쁘지, 벌써 가게가 반짝반짝 하다니까.”

그건 별처럼 예쁜 존재라서 그런가요? 청소 만렙이라 그런가요?

“너, 우리 엄마 눈 모르냐? 완전 지하갱도야. 우리 엄만, 일 잘하는 소 같은 여잘 좋아해. 덩치 크고, 힘 세고…”

이번엔 등짝이다. 매직이가 등짝을 비틀며 신음한다. 

“아주머니 눈에 드셨다면, 정말 참한 아가씨가 맞네요.”

국물까지 후루룩 들이키고, 아주머니가 깎고 계신 배를 젓가락으로 푹 찍었다. 

“그래, 그렇다니까. 내일은 꼭 들려봐.”

곰 아저씨라면 모를까, 딸이라면 그렇게 스스럼없이 들릴 수 없을 것 같다. 우리의 아지트도 유년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네. 뭔가 아쉽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저만치 불이 켜진 레코드 가게가 보인다. 여전히 따뜻하고 그리운 불빛, 아까까지 들리던 카펜터스의 음악이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벚꽃만 하염없이 흩날릴 뿐. 

그래도 한 번 들려볼까. 곰 아저씨를 닮은 따뜻한 눈빛을 찾아.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대학 동아리 동기다. 뭔가 성가신 부탁을 할 것 같아, 다시 걸지 않았다. 졸업까지 한 마당에 구태여 학교를 찾아가고 싶지 않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다. 놀기 좋아하고, 끼기 좋아하는 매직이는 분명, 이 전화를 받을 것이다. 그렇다. 매직이와 나는 내리 동창이었던 걸로 모자라, 동아리까지 함께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쳤던 것 같다. 


텔레비전을 보며 맥주를 홀짝이던 누나가 잔을 치켜든다. 마실 거냐고 묻는 거 같은데, 사양이다. 누나는 술버릇이 좋지 않다. 평소에 무뚝뚝한데, 술만 마시면 애교가 대량 방류된다. 가족에게도 예외가 없다. 탁자에 놓인 치킨엔 관심이 가지만, 참기로 했다. 저걸 먹으려면 역시 술을 마셔야 한다.

“왜 혼자 마셔? 연하의 애인은 어디 가고?”

“헤어졌어.”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가 전학이라도 간 것 같이, 무심하구나. 누이여.

“이별 통보는 누나가 했겠네.”

“뭐, 그렇지.”

 악취미다. 그쪽에서 완전히 빠져든 걸 알면, 꼭 찬다. 연애는 상큼할 때까지만 좋다는 건데, 사과를 한 입만 먹고 버리는 것과 뭐가 다른가. 아니 더 나쁘다. 그쪽은 분명히 울었을 거다. 불쌍한 사과 

“매직이라도 부를까? 혼자 먹으려니 심심하네.”

“하지 마.”

“싫으면 니가 마셔주던가.”

딱히 나랑 마시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누난 치킨이 남을까봐 나를 끼워 넣는 거다. 뭐든 남기는 걸 싫어하는 결벽증이랄까. 결국 캔을 깠다. 


“예쁘더라.”

“뭐가?”

닭 다리를 집어든다. 아직 따뜻하다. 유혹에 넘어가길 잘했구나. 츄릅

“크로바 레코드 새 주인”

“가봤어?”

“응, 문이 열렸길래. 아저씨한테 인사도 할 겸.”

“아직 요양 중이라며.”

“몰랐지. 대신 제이를 만났어.”

“제이…”

“여동생이 생긴다면 꼭 그런 애였으면 좋겠더라.”

어째. 매직이 엄마와 증상이 같다. 

“착하고, 반짝반짝하고, 그런 거야?”

“너, 꼭 본 것처럼 말한다. 그것도 맞지만, 외모 말이야. 완전 귀엽게 생겼어.”

흐음, 누나가 귀엽다면 정말 귀여운 건데. 누나의 눈은 순도 99.9의 금보다 고급지다.

“매직이 보다 귀여워?”

“걔가 왜 여기서 나와?”

살짝 간 봤습니다. 그래도 내 친구니깐요. 

“동글동글한 갈색 눈에, 상고머린데, 곱슬거려. 그거 천연이래. 코도 입도 다 앙증맞은데, 눈만 큰 게 꼭 애니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니깐.”

나도 그렇게 생긴 사람을 아는데, 꼭 그렇게 생긴 여자를 아는데,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동실동실 거실 창으로 떠오른다. 우리 집 창문에서 이렇게 예쁜 달이 보였던가. 


“눈가에 눈물점도 있겠네.”

“역시 너도 봤구나!”

그럴 리가 없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다. 흔한 점이야.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절대 말하지 말자. 이미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으니까.

“하나 더 꺼내줄까?”

“응!”


그녀는 사서를 통해 책을 빌리지 않는다. 대출, 반납 기계를 이용해서 책을 빌린다. 그게 바쁜 사서들에게는 고마운 일이지만, 가끔은 기계가 고장 났으면 싶을 때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납대에 놓인 책으로 이름 정도는 알아놓을걸.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맥주를 누나에게 내밀었다. 

“야, 매직이 온대.”

“부르지 말랬잖아!”

내가 냉장고로 간 사이에 일을 벌이셨겠다!

“역시 너랑 마시면 심심하단 말이야.”

누나가 주섬주섬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오징어 굽는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땅콩이 접시 위로 또르륵 쏟아진다. 밑바닥이 보이는 마요네즈를 눌러 짤 무렵, 매직이가 도착했다. 좀 튕기란 말이다. 행복한 해피처럼 당장 달려오지 말고!


“왜 왔냐?”

“누난?”

“니 좋아하는 오징어 굽고 있다.”

“역시 내 누나라니깐.”

“꺼져,”

매직이가 웃으면서 부엌으로 꺼졌다. 아, 나도 내 방으로 꺼지고 싶다. 


“너, 전화 받았냐?”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치킨도 없고, 오징어도 맛없는 다리만 남았다. 술도 떨어져가니, 더 마시려면 누군가 사러 가야 한다. 역시 매직이인건가. 

“무슨 전화인지 모르지만, 쟨 안 받았을 거야.”

고개를 까딱이고는, 누나에게 눈치를 보냈다. 맥주가 동이 났다는 텔레파시와 함께. 귀신 같은 누나는 금세 알아들었다. 

“매직아, 그 얘긴, 슈퍼 갔다 와서 하면 안 될까? 누나가 돈 줄게.”

누나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매직이가 발딱 일어섰다. 이런, 행복한 해피 같으니라고. 


술과 더불어 과자도 잔뜩 사 왔다. 죄다 누나 취향이네. 이 충직한 녀석. 그래도, 공통의 취향이라는 게 있지. 오징어땅콩을 뜯었다. 

“동아리 축제를 하는데, 꼭 같이 오래.”

“안가.” 

“벌써 이름을 올렸대.”

“미끼야.”

이쪽 의사도 묻지 않고 이름을 올렸다는 게 말이 되냐. 

“어차피 그날 쉬잖아.”

“내 소중한 휴일을 모교 동아리 방에서 날리고 싶지 않아.”

“꼬물꼬물 귀여운 후배들이 잔뜩 온다는데.”

“우리 동아리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어.”


역사 깊은 문학동아리, ‘둥지’엔 없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난 신춘문예를 통과한 문인이 없다는 거고, 하난 미녀가 없다는 거다. 동인지로 데뷔한 선배들은 있어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사람은 없다. 그건, 뭐 취미 위주의 동아리니까 그럴 수 있다. 아예 등단한 선배가 없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 근데, 그 긴 세월 동안 미녀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역시 이상하다. 미남은, 종종 나오는 모양이지만, 뭐, 나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둥지’ 말하는 거면, 나도 동감이다. M.T 사진 봤더니 처참하더구만.”

누이여, 악몽을 떠올리게 하지 마시오! 알콜이 필요하다. 새로 하나 깠다. 

“덕분에 하니가 왕자가 됐잖아.”

왜 니 얘긴 빼냐. 너도 더불어 왕자가 됐잖아. f2인지 뭔지 꽤나 민망한 걸로 불렸던 것 같은데. 

“하여간 안가.”

“우리 학교에서 도서관이 얼마나 가까운지 잊은 건 아니지? 후배 몇 명을 데리고, 밥 먹으러 온다던데. 괜찮을까? 하니의 사생팬이 도서관엘 와도?”

“협박이냐?”

“아직 안나에겐 네가 있는 곳을 알리지 않았어.”

안나, 인공착향료로 만들어진 불량식품 같은 그 앨 다시 봐야하는 것이냐. ‘둥지’의 저주를 피해간 미녀이긴 하지만, 어쩐지 천연으로 보이질 않아, 아무도 쳐주지 않는다. 문제는 인공적인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에 있다. 목이 졸린 카나리아 같달까.


“게다가 엄청 귀엽게 생긴 외부인도 부른대.”

“대체 왜!”

“‘둥지’ 50주년 기념이잖아.”

복사기 무료사용만 아니었다면 결코 가입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침묵을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매직이가 그제야 관심을 껐다.  


희희낙락하는 누나와 매직이를 두고 베란다로 나갔다. 술기운이 올라와서 좀 더웠다. 이마를 식혀주던 바람이 벚꽃 잎 몇 장을 데리고 크로바 레코드 가게로 날아간다. 오렌지 색 불빛이 쏟아지는 그 가게로 내 마음도 조금 흘러간다. 



“어, 닫혀있네.”

매직이가 크로바 레코드 유리문으로 안쪽을 살핀다. 그렇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잖아. ‘외출 중’ 이라고, 친절하게 종이에 써 붙여 놨구만. 

“얼마나 귀여운 제이인지 보고 싶었는데.”

“오는 길에 봐.”

“오! 그래도 되겠다.”

술을 마실지도 몰라서,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간밤에 제비가 옷을 물어다 주던?”

오늘 매직이는 검은 남방에 검은 슬랙스를 입었다. 덕분에 아주 질 나쁜 제비로 보인다. 

“모르는 소리, 이 복장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기 좋다고.”

너무 시커메서 더 눈에 띄는데?

“그러는 넌, 야학 선생님이라도 되냐?”

흰 남방에 검은 슬랙스를 입은 나를 비웃는 모양이다. 

“이 복장이야말로 도망치기 딱이거든.”

“웨이터랑 비슷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쳇, 제비 주제에. 

일 년 만에 학교에 가는 버스에 탄다. 매직이도 워킹홀리데이에 해외자원봉사만 아니었다면 같이 졸업했을 거다. 

“요즘도 동방에 가냐?”

“나 같은 노인네가 가면 되겠냐?”

“하긴.” 

“수업 하나 있는데 쨌다. 너 길 잃을까 봐.” 

“뻥 치시네.”

내 핑계로 수업 째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버스로 한 시간은 달려야 한다. 차창 밖에 눈을 두었다. 한결 가볍고 밝은 색의 옷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공연히 내 마음도 들뜬다. 오랜만에 모교라서 그런가. 변변찮은 첫사랑도 있었고, 어줍잖은 삼각관계도 해 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 소꿉장난 같다. 먼 훗날의 나도 오늘의 나를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안나도 졸업을 안 한 거야?”

“음, 그렇지. 나야 해외로 나돌아서 그렇지만, 걘 성형외과를 나돌아서 그렇다는 얘기가 있어.”

설마, 그럴 리가. 그 정도로 숱하게 손 본 얼굴은 아닌 것 같다만. 학교에 가까워지자 대학생들이 많이 올라탄다. 신입생들은 역시 풋풋하다. 차림새도 그렇고 화장도 그렇고, 말투까지 어딘가 어설프다. 나와 매직이도 한 땐 그랬겠지. 슬쩍 곁을 보니, 매직이는 졸고 있다. 어제 늦게까지 마시더라니. 


인문대 뒤에 있는 별관이 떠들썩하다. 플랫카드에 대자보에, 샌드위치 맨까지 정체성도 없고 개성도 없이 혼란하기만 하다. 그건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겠지. 신입생 땐 이마저 신선해 보였었는데.

“젋은 게 좋긴 하네.”

“우리도 아직 젊거든요.”

예, 예, 아직 학생인 너는 충분히 그러시겠죠. ‘둥지’가 있는 3층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인데. 그도 그럴 것이 여긴 정적인 모임 위주이기 때문이다. 학보사나 만화감상, 영화 감상, 등등이 3층에 집합해 있다. 덕분에 시험기간에는 조용히 동방에서 공부를 할 수도 있었다. 사생팬들만 난입하지 않는다면. 근데 오늘은 이 조용한 3층이 다소 떠들썩하다. 환호와 함께 박수 소리가 들리고, 잔잔한 기타 소리도 들려온다.


“외부 손님인가 보다.”

환호가 그치자 기타 선율과 함께 막 구운 빵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뭐지, 이 두근거림은. 주머니에 있던 손을 심장에 대 본다. 내 심장에 꼭 맞는 목소리. 복도를 오가는 발소리와 매직이의 숨소리와 바깥 창으로 들려오는 소음들이 일시에 사라진다.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 마음으로 흘러든다. 목소리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바로 이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인어를 사랑한 왕자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 목소리에 빠져 바다로 몸을 던진 선원들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빈혈이라도 나냐?”

푸른 바다에 빠져 해파리처럼 떠다니는 내 심장을 매직이가 건져든다. 매직이에게 끌려 문 앞까지 갔다. 매직이를 알아본 안나가 튀어나온다. 

“왔어?”

“누구야?”

“아, 내 친구. 노래 잘 부르지. 정식 데뷔는 못 했지만, 버스킹 경력은 좀 되는 애야.”

쉿, 검지로 그 목소리를 막았다. 카나리아야, 부디 지금은 조용히 해줘.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잖아. 미간을 모으긴 했지만 조용해지긴 했다. 다시금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서 모닥불을 지피나, 왜 내 마음이 이토록 뜨거워지는 건데. 익사에 이어, 화형인가. 덩치 큰 후배 녀석 덕분에 목소리의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지, 내가 상상했던 그녀의 목소린데. 낮고, 다정하고, 따뜻하고, 수줍다. 연보라색 내지를 찢고 도망간 그녀처럼 수줍다. 


시야가 가려서 답답했는지 매직이가 버티고 선 후배의 어깨를 톡톡 쳤다. 멍한 눈으로 돌아보던 후배가 매직이를 알아보고 고개를 까딱인다. 

“흥배야, 입구 막고 서있지 말고, 좀만 비켜봐라.”

“앗, 죄송합니다.” 

이 녀석도 저 목소리에 낚여 먼바다로 투신을 하였구나. 비척비척 흥배가 비키는 사이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다. 다시금 눈을 감는다. 이대로 영원히 있어도 좋을 것 같아. 눈치 없는 매직이가 어깨를 두들긴다. 지금은 안 돼. 장작더미에 불을 붙었다고, 


성화에 못 이겨 눈을 떴다. 훤하게 트인 시야로 식빵처럼 따뜻한 목소리의 주인이 보인다. 화장터에서 돌아온 뿌연 눈동자가 초점을 맞춘다. 아, 

희고 말랑한 얼굴로, 동글동글한 예쁜 눈으로, 왼쪽 눈가에 찍힌 보석 같은 눈물점으로, 나의 그녀가 수줍게 노래한다.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 가 이렇게 마약 같은 노래였나요? 나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매직이가 다물려 준다. 

“제이야.”

“응?”

“쟤 이름이 제이라고, 송 제이.”  

안나가 속삭인다. 작게 속살거려도 역시 송곳 같은지 제이가 눈을 들어 이편을 바라본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붉어지는 뺨. 아, 너무 사랑스럽다. 

“더 안 불러?”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뚫고 매직이가 안나에게 묻는다. 

“앙코르만 두 번 째야.”

“아, 좀 빨리 올걸.”

“그러게, 왜 이렇게 늦었어?”

“뭐. 이것저것 하다 보니.”

술 먹고 깨어나지 못했다는 진실을 결코 말할 순 없겠지. 

“뒤풀인 갈 거지? 후배들이 잔뜩 기대하고 있어. F2를 만난다고.”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 마라.”

안나가 웃는다. 지금 어디선가 유리 깨지는 소리 들리지 않았어? 매번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네. 역시


기타를 챙기던 그녀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사라졌다. 방금 전까진 있었는데, 매직이와 안나의 수다에 말려드는 게 아니었다. 부끄럼쟁이 그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 걸 예상 했어야 하는데.

막 튀어나가려는 나를 매직이가 붙잡는다. 

“벌써 배신하고 도망치면 안 되지.”

“사라졌어.”

“뒤풀이에 오겠지.” 

여자 후배들이 작은 눈을 반짝이며 밀물처럼 밀려온다. 포진해있던 사생팬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도망칠 때가 맞는 것 같은데. 

“정말?”

“설마, 노래만 딸랑 부르고 가겠어? 그치?”

“어, 응.”

어째 안나의 대답이 시원찮은데. 그래도 매직이를 믿고, 캄캄한 악의 구렁텅이를 향해 나아가기로 했다. 그곳에 그녀만 있다면, 나는 구원 받을 수 있다. 동지여. 그러니 어서 안내하게나. 


후배들 사이에 껴서 아무리 맥주를 홀짝여봐도, 그녀는 오지 않는다. 맞은 편에 앉은 매직이만 신났다. 하여간 사교적인 녀석이다. 문득 들려오는 하이 톤의 목소리가 내 귀를 사정없이 공격한다. 안나가 옆자리 후배를 밀어내고 털썩 곁에 앉는다. 마침 잘 왔다. 

“제이는?”

“응? 뭐?”

분명 알아들었을 텐데, 모른 척 한다. 맛없는 안주도 그렇고, 뭔가를 자꾸 묻기만 하는 종달새 같은 후배들도 그렇고, 슬슬 짜증이 올라온다.

“제이는 왜 안 오는데?”

“너, 제이 기다리고 있었어?”

그럼, 내가 신입생이나 꼬셔 댈려고 여기 앉아있는 걸로 보였냐.

“왜 안 오는데?”

다시 묻는다. 웃음기 하나 없이 

“그야, 걔는 외부 사람이잖아. 우리 학교 애도 아니고, 우리 동아리 애도 아니고,”

“아깐 온다며.”

“그래야 니가 오니까”

목소리 말고, 싫은 점이 또 있었지. 바로 이런 거. 

“야, 어디가.”

매직이와 안나가 동시에 외쳤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지하주점을 벗어나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심장 께에 다시 손을 댄다. 내 심장에 꼭 맞는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다. 오늘은 그걸로 족해. 

매직이를 버리고 온 건, 미안했지만, 그래도, 녀석은 즐길 것이다. 다음 날 동방에서 미라로 발견된다 해도, 분명 행복했을 거라 믿는다. 차창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우글우글 구겨진 마음을 환하게 펴 준다. 

화를 내기보단, 물어볼 걸 그랬나. 그녀의 연락처를, 주소를, 그게 아니라면 버스킹하는 장소라도. 아니, 안나라면 안 가르쳐줬을 거다. 그 앤 그런 애니까.    

 

그녀가 서 있던 서고를 정리한다. 신간이 들어올 예정이라, 오래도록 대출되지 않은 도서는 정리해야 한다. 5년 이상 대출되지 않은 책들이 수레 가득 실린다. 그녀를 숨겨주었던 딱딱한 표지의 책들이 와르르 뽑혀 나왔다. 벚나무는 이제 잎이 돋기 시작했다. 이곳의 사계절을 모두 사랑했다. 그녀가 서 있던 이곳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전산이 완료됐으니까 보존서고로 가면 돼.”

“네.”

왕복 다섯 번째다. 오늘은 아직 한 번 더 남았다. 마지막 수레를 끌고 보존서고로 내려갔다. 먼저 와서 정리 중이던 아동실 사서가 장갑 낀 손을 흔든다. 그녀도 먼지투성이다. 사다리 위에서 내가 책을 꽂고 그녀가 건네주는 것으로 했다. 꽂는 방식은 자료실 서고와 같다. 다만 여유 공간이 없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촘촘히 꽂아야 한다. 


“유성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이 질문 언젠가 받을 줄 알았다. 마침 둘 밖에 없네. 다른 선배들은 전산 작업으로 바쁠 거다. 한쪽에선 폐기도서를 분류하고 있겠지. 

“네.”

“그런 거 같더라.”

더는 아무 말도 없이 책을 꽂았다. 서늘한 서고인데도, 등에 땀이 난다. 이제 한 카트만 더 꽂으면 된다. 그녀가 서 있던 서고의 책들이다. 

“유나 사서, 아직 밥 안 먹었지?”

종합자료실 태수 사서다. 눈매가 다소 매섭긴 하지만, 전체 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 덕분일까. 그나저나 나도 안 먹었는데, 왜 유나 사서만 챙기는 겁니까?

“별로 생각 없는데.”

“혼자 먹긴 그러니까, 같이 가자.”


태수 사서가 유나 사서의 팔을 잡아끈다. 마지못해 가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이다. 결국 보존실엔 나만 남았다. 그녀가 보듬던 책들을 한 권 한 권 꽂는다. 오래된 책 냄새가 훅 끼쳐온다. 어둡고 서늘하고, 오래된 책 냄새로 침잠된 이곳을 나는 좋아한다. 이용자가 보존실서고의 책을 찾을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내려오곤 했다. 일 분만, 더 일 분만 더 하다가, 십 분 넘게 이용자를 기다리게 한 적도 있다. 다행히 자료를 열람 중이라, 이쪽의 게으름을 탓하진 않았다. 사다리에 앉은 채 눈을 감는다. 이 먼지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벚꽃이 다 지도록 여길 오지 않는다. 그녀가 무심히 꺼내 읽던 청록색 장정의 책을 꽂다 말고, 펼쳐본다. ‘시적 모험’ 20세기 프랑스 시선집이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은 어느 누구를 위해 거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밤보다 훨씬 멀고 

낮보다 훨씬 높은 어느 다른 곳에 거주한다

그들 첫사랑의 눈부신 투명함 속에   

    

자끄 프레베르의 시였다. 책갈피에 꽂혀있던 크로바가 사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아직 초록을 간직하고 있는 잎맥을 찬찬히 살려본다. 그녀도 이 작은 잎새를 가만히 바라 보았을까. 상기된 표정으로 막 발견한 네 잎 크로바를 책장에 숨기는 너를 상상해본다. 쪼그리고 앉아 네 잎을 찾는 발그레 볼을 상상해본다. 크로바를 다시 책장에 돌려놓고, 가름끈을 정리하다 미묘하게 벌어진 책 틈을 발견한다. 일일 달력처럼 얇은 종이다. 양팔 가득 책을 든 누군가를 그려놨다. 한쪽만 뻗치는 머리칼에 유니폼처럼 입는 브이넥 니트, 나였다. 

처음으로 죄를 저질렀다. 곧 폐기 될 책이었지만, 분실처리를 하고, 가방에 넣었다. 그녀 말고는 아무도 읽지 않은 그 책을 훔쳤다.     


“왜 이렇게 멍하냐?”

구내매점에서 우동을 먹는 데  탄산음료를 든 매직이가 맞은 편에 앉는다. 

“그게 점심?”

“그렇게 됐다.”

“태수 사서가 데리러 안 갔어?”

“나 말고, 유나 사서를 데리고 갔지.”

“와, 야박하다. 기왕이면 같이 먹을 것이지.”

“단둘이 있을 기회가 어디 흔하냐.”

매직이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 참에 국물을 들이켰다. 오늘따라 개운하구나. 

“유나 사서, 나를 이용한 게 아닌가 싶어.”

“나도 동감.”

단무지를 마저 먹고, 빈 그릇을 반납했다. 

“기분이 별로네.”

매직이가 캔을 우그러뜨렸다. 

“가끔은 그런 봉사도 해야지. 맨날 남의 눈에서 피눈물만 나게 하면 되겠냐.”

“하긴, 그러네.”

매직이와 함께 폐기할 도서를 묶었다. 이렇게 꽁꽁 묶여서 버려지기 전에, 책을 훔친 건 잘 한 일일 거다. 내 도덕성이 시험을 받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나가 서운해하더라.”

“걔 얘긴 꺼내지도 마.”

“여전히 싫어하네, 걘 여전히 널 좋아하는데.”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시적 모험’을 손에 넣지 않았다면, 주먹이 날아갈 뻔했다. 오늘 더는 손을 더럽히지 말자. 

“그렇다고, 그렇게 박차고 나가버리냐.”

“그 앨 보려고 간 건데, 안 온다잖아. 그럼 뭐하러 있냐.”

“참, 대쪽 같은 놈일세. 사회생활이 그런 게 아닌 거거든.”

“그러니까 맨날 이용만 당하는 거야. 안나한테도, 유나한테도.”

“야!”

매직이가 발끈하거나 말거나 묶은 책을 수레에 실었다. 매직이도 씩씩대며 책을 나른다. 말랐지만, 잔 근육이 있어, 책을 들 때마다 걷어붙인 팔에서 알통이 도드라진다. 

“니가 좋아하는 걸 눈치챘는지, 절대 말해주지 않더라.”

그럴 줄 알았다. 

“애썼다. 고맙다.”

“애초에 널 끌고 간 내 잘못이 크지. 그래도 같이 가지 그랬냐. 너 가고 나선, 어찌나 감시가 삼엄한지. 화장실도 못 가게 하더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댔을 매직이의 난처한 얼굴이 떠올라서다. 

“누나가 맛난 오징어 사 놨다고, 다음에 술 사 들고 들리란다.” 

내가 들 책까지 번쩍번쩍 드는 걸 보니, 기분이 몹시 좋아진 모양이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작업이 끝났다. 먼지투성이 몸을 끌고 집으로 향한다. 근로장학생인 매직이는 진작에 퇴근했다. 한잔하고 가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긴장의 끈을 놓치면 나도 모르게 입을 열지도 모른다. 폐기 전의 도서를 마음대로 훔쳤다고, 힐끗 조수석에 놓인 가방을 쳐다봤다. 그녀가 가져간 연보라 빛 내지처럼 나도 그녀


#달달로맨스 #웹소설 #힐링물 #현로 #크로바레코드 #봄봄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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