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냐옹 May 25. 2023

크로바레코드 5

5. 비오는 동물원- J

  

봄비가 부슬부슬 온다. 비가 오늘날엔 지하갑판에서 잠든 것처럼 몸이 더 가라앉는다. 그 핑계로 늦잠을 잤다. 밤늦게까지 곡을 쓴 것도 한몫했겠지. 

얼추 청소를 마치고 나니, 삼총사가 올 시간이라 아침을 거르기로 했다. 음악은 동물원 2집. 비오는 날, 듣기 좋은 온기 있는 목소리다. 늘 그렇듯이 참새 아주머니가 먼저 오셨다. 오늘은 막 나온 시루떡이다. 포근포근 맛있게도 생겼다. 아침을 건너뛰길 잘 했는걸.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는데, 식혜를 든 세탁소 아주머니가 오셨다. 집에서 담근 밥알 동동 식혜도 짝짝이 컵에 따라놓는다. 

마지막에 등장한 슈퍼 아주머니가 엄청 난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보따리 때문에 우산도 못 챙기셨는지 머리칼이 젖어있다. 서둘러 수건을 건네 드렸다.   

“어느 집 털었어?”

“털긴 털었지. 딸년 옷장.”

“뭔 옷이 이리 많아.”

호기심이 동한 참새 아주머니가 보따리를 푼다. 어찌나 꾹꾹 밟아서 묶었는지 손을 대자마자 팍하고 풀어진다. 


“월급으로 옷만 쳐 샀는가 봐. 이것 말고도 몇 보따리 더 있어. 몇 번 입지도 않았는데, 살이 쪄서 못 입잖아. 아까워서 가져왔어. 제이야 괜찮으면 입을래?” 

내가 거지인 걸 알고, 부러 딸내미 옷장을 정리하신 건 아니실까.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주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꼭 필요했던 거에요.”

슈퍼 아주머니의 얼굴이 발그레 물든다. 거절당할까 걱정이라도 하셨던가 보다. 


“아이고, 좋은 걸로 추려 왔구먼, 그 집 딸내미 엄청 멋쟁이잖아. 옷이 다 고급이네.” 

셋이 힘을 합쳐 방 안으로 옷을 옮겼다. 텅 비어 있던 옷장이 꽉꽉 들어찼다. 나도 이제 단벌 신사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보답은 아니지만, 이왕 주셨으니 몇 가지 입어보기로 했다. 허리에 주름이 잡혀서 예쁘게 퍼지는 검은 색 투피스를 입어보았다. 박수가 쏟아졌다. 역시 옷이 날개죠? 다음은 목둘레에 진주가 달린 연분홍 니트 원피스, 검은 색 허리끈이 있고, 치마는 연분홍 레이스다. 누구든 사랑스럽게 만드는 마법의 옷이네. 정말 이런 옷을 저 주신다구요. 평생 노예로 일해도 될까요. 마마님. 


“정말 예쁘네. 티 쪼가리 입고 있을 때도 이쁘긴 했는데,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어.”

“옷도 주인이 있는가 보다. 딸년이 입었을 땐 그리 촌스럽더니. 제이가 입으니까 공주님이네.”

“선녀가 따로 없다야.”

아주머니들의 극찬을 받으며 패션쇼가 성황리에 끝났다. 

“들고 오길 정말 잘했네.”

슈퍼 아주머니가 흡족해하며 떡을 찍어 들었다. 암요, 오늘 할 일 중에 제일 잘 하신 일이세요. 

“오늘은 특별 서비스 들어갑니다.”


슈퍼아주머니를 시작으로 안마를 시작했다. 엄마가 미용실에서 해주던 걸 흉내내는 정도 밖에 안 되지만, 어깨가 많이 뭉쳐있는 아주머니들은 그마저 기뻐해 준다. 기묘한 비명을 지르기도 하면서 깔깔 웃기도 하면서 은근 안마를 즐긴다. 

“오늘도 잘 쉬다 간다.”

슈퍼 아주머니껜 하나뿐인 우산을 내드렸다. 

“내일 돌려줄게.”

“네. 살펴 가세요.”


상인회 삼총사도 업무에 복귀하고, 이제야 혼자 남았다. 떡고물이 떨어진 테이블을 닦고, 컵도 씻어 엎어놓고, 이젠 뭘 할까. 아까부터 무한 반복되고 있는 음악부터 바꿔야겠다.     

‘동물원’ 3집을 꺼내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무한궤도’를 찾았다. 어린 신해철의 패기 어린 음색과 조금은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 또래의 감성이 잘 묻어난 그 음반을 나는 사랑한다. 특히 도입부가 너무 좋다.      


흐린 창문 사이로하얗게 별이 뜨던 그 교실나는 기억해요내 소년 시절에 바라던 꿈을,’     


노래를 흥얼거리며 속 비닐을 꺼내다가 뭔가 툭 떨어졌다. 사진이다. 기억이 있는 사진인데, 낯선 존재도 함께 찍혀있었다. 나와 엄마와 그리고 활짝 웃고 있는 낯선 사람. 이 사람이 곰 씨일 것이다. 동물원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코끼리가 배경인 것도 있고, 기린이 배경인 것도 있다. 엄마의 집에 있는 사진은 그랬다. 다만, 곰 씨만 없었다. 누군가 찍어준 게 분명한데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단 하루의 기억이기 때문일까. 사진 속에 있었다면 기억했을까. 


신해철의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쌀을 씻고, 슈퍼에서 사 온 어묵을 볶았다. 기름을 조금 두르고, 어묵과 간장 조금, 마늘, 그리고 설탕, 파랑 양파가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뭐 없으니까 생략. 어묵 끝이 노릇해지면 완성. 그릇에 담아두고, 김치를 썰었다. 

누가 봐도 닮았다. 곰 씨와 나는 부녀처럼 닮았다. 먼 친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닮았다. 흰 피부, 동그란 눈, 곱슬곱슬한 머리, 다리 건너, 다리라,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렇게 닮았다는 건, 엄마가 오랫동안 곰 씨를 숨긴 것과 연관이 있겠지. 

떡을 먹어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한 술 뜨기로 했다. 어묵은 따뜻할 때가 제일 맛있으니까. 흰 밥에 달게 볶은 어묵을 올리고 맛있게 먹는다.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그가 내 아빠임을 알린 것이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 방식으로. 남은 반찬을 냉장고에 넣고, 그릇을 씻는데 전화가 왔다. 손이 젖은 것도 그렇지만, 별로 받고 싶은 전화도 아니어서 벨이 울리도록 놔뒀다. 물기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는데, 메시지가 왔다.  

   

‘12일 4시에 동아리 행사가 있는데, 와서 노래 좀 해줄래? 사례는 할게.’      


메시지였지만, 그 애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거절을 할까 하다가, 수락했다. 백수 주제에 더운밥 찬밥 가릴 때가 아니다. 게다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라면, 가려선 안 된다. 트럭 짐칸에서 부르건, 폐가에서 부르건, 무대는 무대다. 남은 오후엔 곡 선정을 하고, 기타 연습을 해야겠다. 보슬보슬 봄비도 코러스를 해주겠지. 


기타를 조율하는 데, 검정 우산을 쓴 손님이 들어왔다.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를 했다. 동네 사람인가?

“어서 오세요.”

“음반 팔지?”

대답도 하기 전에 후줄근한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앨범을 고르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고르는 것이 리스트가 있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가격을 어떻게 책정해야 하나. 남자가 고른 레코드판이 차곡차곡 테이블에 쌓인다.

“장당 오만 원이면 되지?”


내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이 남자가 고른 음반이 그 가격이 아닌 건 알겠다. 비닐도 뜯지 않은 새것인 데다, 빌보드차트에 이름 좀 올렸던 명곡음반인데, 어찌 그 가격으로 후려친단 말인가. 아무래도 이 사람 꾼이구나. 

“아뇨. 그 가격엔 팔지 않습니다.”

“허, 다른 데 가면 이보다 헐값인데, 상태가 좋아서 내가 쳐주는 거야.”

“그럼, 거기 가서 사세요.”

남자가 면도를 하지 않은 지저분한 턱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른다. 작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 편을 뜯어보는 게, 어찌 구워 삶을까 가늠하는 모양인데, 소용없다.  


“그럼, 얼마에 팔 건데?”

남자가 꺼내놓은 음반을 그러모아 가슴에 안았다. 

“안 팝니다.”

“왜!”

“아저씬, 업자잖아요. 업자한텐 물건 안 팔아요.”

“누가 업자래. 꼭 갖고 싶은 음반이라서 그래.”

대꾸도 없이 함부로 뽑은 음반을 다시 꽂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자, 만 원씩 더 올려줄게.”

남자가 지갑을 꺼내 돈을 센다. 

“백 배를 줘도 안 팝니다.”

남자의 얼굴이 잘 익은 새우처럼 달아오른다. 


“비까지 쫄쫄 맞고, 이 구석탱이까지 왔는데, 뭐야?”

“어리바리한 어린 여자가 음반가게를 지키고 있으니까, 맘대로 후려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고 온 거잖아요.”

“누가 그래?”

“행패 부리실 거면 경찰 부를 겁니다.”

전화를 들자, 남자가 손을 든다. 

“팔기 싫음, 안 팔면 그만이지. 경찰은 왜 불러? 우리나라 경찰이 그리 한가한 줄 알아?”

“아무튼, 나가주시죠.”

“정말 안 팔 거야?” 

“네.” 

“아가씬, 지금 엄청 손해 본 거야. 다른 데 가면 저거 오천 원도 안 쳐줄걸…”


문을 닫았다. 검정 우산이 빗속을 잠시 서성이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기타를 다시 집어 들었지만,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곰 씨는 어떻게 음반을 팔았던 걸까. 이 구석까지 음반을 사러 올 사람이 있다면, 저런 업자들뿐일 것이다. 지나가다 들려서 충동구매를 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뭐가 그리 심각해?”

“아, 언니.”

이웃에 사는 몽이 언니다. 원숭이 몽이 아니고, 꿈 몽 자라고 했다. 그나저나 종이 울린 것도 모르고 생각에 빠져있었구나. 

“곰 아저씨는 어떻게 음반을 판 걸까요?”

“어머, 몰랐어? 가게를 물려줄 때 다 알려주신 거 아냐?”

“아뇨. 갑자기 받은 거라서요.”

“그랬구나. 하긴, 그게 아저씨답긴 하네. 나도 들은 거긴 한데, 아저씬 오프라인으로 팔지 않으신대. 후려치는 사람도 많고, 인심도 잃는 것 같아서 싫으신가 봐. 흥정에 약하신 분이시니까.”

 참새 아줌마가 두고 가신 떡을 내왔다. 공복이었는지 몽이 언니가 꿀떡꿀떡 잘도 먹는다. 차는 따뜻한 쌍화차. 김이 모락모락 나서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오프라인이 아니면?”

“온라인으로 경매에 부치는 거지.”

“아,”

“복수로 있는 음반에 한해서고, 한 장뿐인 음반들은 안 파셨어.”

“역시 소장용인가요.”

“뭐, 그렇지. 전에 마이클 잭슨 걸 달라고 떼쓴 적이 있는데, 꿈쩍도 안 하시더라. 물론 희귀음반인 걸 몰랐을 때지만,”

말이 좋아 음반가게지, 소장품을 자랑하는 개인 박물관이구만,

“생각해보면, 다 널 주려고 하셨던 것 같네. 이게 재산이 될 걸 알았던 거지.”

과연 그럴까요. 저는 종자를 품고 잠든 알거지로 보입니다만, 


“아까, 손님이 왔었어요.”

“그래? 그래서 팔았어?”

쌍화차도 얼추 식어서 이제 먹기 딱 좋다. 입안에서 견과류가 씹힌다. 오도독오도독 건강한 소리다.

“아뇨. 장당 오만 원에 달라고 해서, 안 판다고 했어요.”

“저기, 저 아래 있는 거?”

눈길을 따라가니, 바닥에 놓아둔 상자가 보인다. 상자 속엔 비닐을 뜯은 중고 LP가 촘촘히 꽂혀있다. 

“아뇨, 중고 말고 새 걸로요.”

“LP 가격은 잘 모르지만, 분명 그 가격은 아니었을 거야. 안 팔길 잘했다.”

“네.”

“참, 너 내 동생 봤니?”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 서고 정리한다더니, 바쁜가보다. 담에 같이 들릴게. 가게에서 한잔해도 되지?”

“방도 괜찮으시면요.”

“방 좋지. 어릴 땐 동생이랑 그 방에서 살다시피 했어. 아저씨가 재밌는 CD를 많이 틀어줬거든. 아직 있을걸?”

몽이 언니가 CD 진열대로 가더니, 낡은 CD 몇 장을 빼 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CD다. 알라딘부터, 인어공주, 라이언 킹, 미녀와 야수. 나도 많이 봤던 애니메이션이다. 

“이런 것도 팔았네요.”

“응, 아저씬 애들 것도 많이 팔았어. 음반도 그렇고, CD도 그렇고, 최신 건 다 있어서, 꼬맹이들의 아지트이기도 했어.”


집에 있던 어린이용 만화 CD들은 그가 준 선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혼자 있을 땐 담요를 덮고 누워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봤다. 그래서인지 학예회 땐 어김없이 원어도 된 디즈니의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인어공주나, 쟈스민 공주의 노래. 

“그러잖아도, 동네 친구가 그리웠던 참이야. 퇴근하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친구 말이야.”

내가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생각보다 소심하고, 생각보다 외톨이인 내가. 

“저도요.”

“나, 네일 하거든. 네 손톱도 좀 해줄까?”

“고맙긴 하지만, 기타를 쳐야 해서요.”

“좀 걸리적거리려나?”

그것보다, 손톱이 답답할 것 같아서 사양합니다. 

몽이 언니는 삼십 분쯤 있다가 갔다. 수다 덕인지 기분이 풀어져서 다시 기타를 집어 들었다. 그럼, 빗소리에 맞춰,      


작게 열어둔 문틈 사이로

슬픔보다 더 큰 외로움이 다가와 더 날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날 늘 응원해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도, 좋다. 내 마음이 이토록 잠잠히 기쁘니까. 네게 들려줄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언젠가 들려줄 그 날을 위해, 다시 한번, 불러본다. 수고했어 오늘도     



  뭘 입을까? 내가 이런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될 줄 몰랐네. 슈퍼 아주머니 덕에 옷을 고를 수 있는 호사를 누리게 되다니. 누군지 모르지만, 제게 옷을 기부한 언니께도 감사의 마음을 드려요. 언제고 꼭 들려주세요. 노래라도 한 곡 선사할게요.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고른다. 


흰 블라우스 위에 연노랑 뷔스티에를 입고 베이지색 팬츠를 입기로 했다. 발목에서 두 번 접고, 이날을 위해 아껴준 눈부신 양말에 스니커즈를 신었다. 좋아, 오늘은 꽤 부유해 보이는 구먼. 산호색 립스틱을 마지막으로 바르고, 활짝 웃어 보였다. 거울 속 나도, 즐거워 보인다. 그럼, 가볼까!

 

   평일 낮이라 지하철이 한산하다. 버스를 타는 편이 더 시간 절약이지만, 악기를 가지고 탈 땐 전철을 더 선호한다. 만원 버스에서 기타 때문에 욕을 먹을 이후론 가급적 전철을 탄다. 물론 붐비는 시간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 전철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는다. 덜컹덜컹 소리와 힘찬 발소리, 안내방송, 손잡이가 삐걱거리는 소리, 기침 소리, 희미하게 들리는 음악 소리, 도서관에서 나는 소리도 좋지만, 한산한 지하철에서 나는 소리도 좋아한다. 수많은 삶이 교차 되는 이 작은 공간에 잠시 고여있는 이 소리가 좋다. 소박하고, 정겹고, 살아있다. 하얀 백지가 아니라, 종이 결이 오롯이 느껴지는 한지 같아서 좋다. 

웅, 핸드폰이 울린다.      

‘오고있지?’

‘그래’     


안나와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별로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같이 있었을 때가 많았다. 짝을 지어 할 일이 있으면 안나는 어김없이 나를 지목했다. 듀엣곡도 안나와 함께 불렀고, 학예회도 안나와 같이 했고, 수학여행 버스 안에서도 안나 곁에 앉았다. 막상 같이 있으면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심심했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것까지도 없어서, 묵묵히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땐 내가 안나의 블라우스에 달린 브로치 같은 존재란 걸 몰랐다. 안나가 허영심 때문에 나를 데리고 다니며 뻐긴다는 걸, 다른 친구를 통해 들었을 때 웃었다. 내가 뭘 그리 반짝이는 존재라고, 어둠 속에선 반디의 연약한 불빛도 눈부시게 빛난다는 걸 몰랐을 때다.  


어제와 다르게 날이 맑아 다행이다. 선선하긴 했지만 추울 정도는 아니다. 처음 와 보는 캠퍼스라 입구부터 헤맸다. 참으로 드넓구나. 장대하다. 이럴 땐 나도 대학에 갈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충분히 갈 성적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필요를 못 느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꼭 대학에 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라, 더 그랬다. 

“저, ‘둥지’에 가려고 하는데, 이쪽이 맞나요?”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물었다.

“‘둥지’는 인문대 뒤쪽 건물에 있어요. 저쪽으로 돌아가시면 되요.”

꾸벅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러다 늦을 수도 있겠는걸. 


안나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꾸민 티는 확실히 나야한다는 안나의 모토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준 복장이다. 앞이 뾰족한 하이힐에 커피색 스타킹, 명품이 분명한 투피스가 동아리 축제에 걸맞지 않게 화려하다. 안나는 MT도 저 복장으로 갈 것 같다. 인공적인 속눈썹을 깜빡이며 안나가 웃는다. 나한텐 로봇 연기 하지 마. 


“시간 맞춰 왔네. 보면대 말고, 뭐 더 필요한 거 없어?”

응, 니 민낯. 저 과한 화장을 벗기면, 수수하고 앳된 얼굴이 나오는데. 고등학교 때 안나는 예쁘진 않았지만 꽤 귀여웠다. 그래서 남자친구들도 제법 있었다. 저렇게 인공적인 얼굴은 졸업 후에 만들어졌다. 외국에서 메이크 업을 배우고 왔다는데, 아무래도 헐리우드 식이었나보다. 동양인에게는 과할 수 있는 화장법이다. 오늘만 해도 치크가 너무 강해서, 취중진행 같다. 언젠가 이 메이크업이 각광 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화장이 좀 수수한데, 내가 좀 해줄까?”

“아니.”

칼같이 거절하고, 기타를 점검했다. 

“바로 부르면 될까?”

“응, 뭐 게릴라 콘서트 같은 거니까.”

인사는 한 곡이 끝난 후에 하기로 하자. 지금은 노래를 불러 주위를 환기를 시키는 편이 낫다. 첫 곡은 일기예보의 ‘좋아 좋아’     


처음 널 만나는 날 노란 세 송이 장미를 들고

룰루랄라 신촌을 향하는 내 가슴은 마냥 두근두근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하던 관중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따로 홍보도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어 온다. 버스킹도 좋지만, 이런 작은 공간에서의 공연도 훈훈하고 좋구나. 한 곡이 다 끝나기 전에 관중들이 동그랗게 에워쌌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없는데, 숨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다. 

“반갑습니다. 홍대나, 대학로에 자주 가시는 분이라면, 저를 아실 수도 있을 거예요. 버스킹 가수 제이입니다.”

박수가 쏟아졌다. 좋아, 힘이 난다. 


“바깥에만 봄인 줄 알았는데, 여기도 물씬 봄이네요. 꽃 같은 사람이 많아서 저도 꽃이 된 것만 같습니다. 다음 곡도 같이 즐겨주실 거죠? 아시는 분은 같이 불러도 좋아요.” 

훈스의 ‘얘가 이렇게 예뻤나’ 

설레는 봄빛 목소리로 불러본다.      


멀리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너

이렇게 예뻤나

Sunshine in my eyes

눈이 부시게 

활짝 웃는 너를 본 그 순간      


손을 잡은 커플도, 어깨동무를 한 친구도, 모두 귀 기울인다. 풋풋하고 예쁜 봄빛. 이 빛이 그리웠다. 청춘이라는 봄이 그리웠다. 

노래는 세 곡만 준비해 왔다. 인사를 하려는 데, 앵콜 소리가 격하게 들린다. 에워싼 관객들도 흩어질 기미가 없다. 혹시 몰라 준비한 앵콜 곡을 부르기로 했다. 역시 봄 노래다. 조금 심술 궂은 가사의 ‘봄이 좋냐’를 부르고 있는데 입구 쪽이 부산스러웠다. 안나가 뛰어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귀빈이라도 왔나보구나. 새된 목소리가 잠시 들리다가 그친다. 다행이다.


 솔로 부대들이 따라 불러주는 바람에 분위기가 더 후끈 달아올랐다. 슬슬 다음 곡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뭘 부를까. 역시 어제 불러보았던 ‘수고했어 오늘도’ 가 좋겠다. 마무리 곡으로도 좋고. 


1절이 끝날 무렵 입구를 가렸던 덩치 큰 남학생이 안쪽으로 훅 들어왔다. 신경이 쓰였지만, 뭐 버스킹 경력만 오 년이다.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음정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눈이 마주친 덩치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다음 소절을 부른다. 


눈을 들었을 때 그가 보였다. 상기된 표정의 그가 입구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박자를 한 번, 두 번 놓쳤다. 반주가 좀 길어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어쩌지. 

누군가 첫 소절을 작게 부르기 시작해서, 덩달아 들어갔다. 분명 얼굴이 빨개졌을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수고했어 오늘도’ 를 완성한다. 박수 소리 덕에 정신이 들었다. 아쉬워하는 탄식이 들렸지만, 더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 이 부끄러움으로부터 빨리 도망쳐야 한다.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기타를 챙겼다. 누군가 불렀는지, 입구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데, 안나에게 전화가 왔다. 

“인문대 앞에서 잠깐 기다려. 줄 거 있어.”

그냥 계좌 이체하면 안 될까. 결국 인문대 앞에서 안나를 기다렸다. 

“이거 사례비. 오늘 수고했어.”

“불러줘서 고맙지.”

“너, 뒤풀이 갈래?”

“뒤풀이?”

“그래, 오늘 반응 좋았잖아.”

“고맙긴 한데 사양할게.”

“그럴 줄 알았어. 하긴 내가 생각해도 불편한 자리네. 넌 우리 학교 학생도 아니고,”


애초부터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안다. 그럼 빛나던 브로치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눈치껏 손을 흔들고 물러났다. 오늘 나를 부른 것도 명문대를 다닌다는 과시 겸, 나 같은 친구가 있다는 허영심 겸이었겠지. 이 돈도 안나의 주머니에서 나왔을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손을 심장 께에 가져다 댄다. 다시금 얼굴이 달아오른다. 꼭 들려주고 싶었던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심장이 이렇게 뛴다. 가요제에 나가서 상을 받았을 때도 이렇게 뛰지 않았던 것 같은데. 병원에 가봐야 하나. 머리도 어질어질하다. 숨을 깊게 들이쉰다. 다시 한번. 

안나에게 물어볼 걸 그랬나. 그가 누군지. 아니, 안나라면 안 가르쳐 줄 거야. 안나는 나에게 관심을 갖는 남자들은 물리쳐 준 B사감 같은 친구니까. 할머니가 떡 하니 앞에 서셔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타를 든 나 보단, 옆에 있는 아저씨 앞에 서셨으면 좋았을 테지만, 만만해 보이는 건 내 잘못이니까. 


한강을 지나, 구시가지를 지나, 불을 밝힌 지하를 지나 전철이 달린다. 보고 싶어 못 견딜 것 같으면 도서관에 가야지. 서가에 숨어 널 보다, 청심환을 먹고, 에너지드링크도 마시고, 그래도 안 되면 위스키 봉봉이라도 와작와작 씹어먹고, 말을 걸어야지. 이렇게 도망치지 말아야지. 날마다 결심을 해도, 막상 그 앞에 서면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바보. 차창에 비치는 내 모습이 밉다. 


슈퍼에 들려 양파랑 감자, 카레가루를 산다. 

“카레 해 먹게?”

“네.”

카레를 먹으면 호랑이 기운이 솟거든요.

“자, 이건 서비스, 유통기한 오늘까지니까 빨랑 먹어라.” 

보름달 빵 하나를 봉지에 끼워주며 아주머니가 웃는다. 

“앗, 감사합니다!”

씩씩하게 인사하고 나왔다. 호랑이가 아니라, 영험한 해태의 기운이 솟구치는구나! 역시 사람은 배가 불러야 해! 

 

감자를 먼저 기름에 볶고, 양파를 넣는다. 당근을 넣으면 색감이 좋긴 하지만, 그 특유의 향과 식감을 싫어하므로 패스. 마지막에 햄을 넣고, 조금 볶다가 물을 붇는다. 카레가루가 엉기지 않게 풀어주고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살살 저어가며 끓이면 된다. 카레가 뭉글뭉글 끓어오르면 완성. 걸쭉한 걸 좋아하면 더 졸이면 된다. 막 지은 밥에 카레를 얹고 비빈다. 비빈다기보다는 만다. 소스가 많을수록 맛있다. 카레 향이 온 집을 노랗게 물들인다. 환기 좀 시킬까. 음, 나중에. 

세탁소 아주머니가 가져다주신 깍두기가 있어서 같이 곁들였다. 역시 잘 어울려. 아삭아삭한 게 맛있다. 정말 이사 오기 잘했어! 


열 수 있는 문은 다 열고, 판을 걸었다. 무한궤도에 이어 신해철 1집이다. 소파에 푹 몸을 묻은 채, 보름달을 한입 크게 물었다.

아, 이 사치. 기쁘구나. 아등바등 돈을 모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한가해지니 일상의 행복이 크다는 걸 알겠다. 아, 평생 노래만 부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럼 가난해도 행복할 텐데. 베짱이 같은 생각 그만하고, 그만 문을 닫아야겠다. 날벌레들이 빛을 찾아 들어오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놀아볼까.” 

간밤에 만들다 만, 노래를 기억의 서랍에서 꺼내본다. 남의 노래가 아닌. 내 노래를 부를 순간도 오겠지. 다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낡은 기타를 들었다. 


빗물이 많이 튀겼는지 유리창에 물방울 얼룩이 많이 생겼다. 오늘은 쇼윈도를 닦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늘이 흐린 게 다시 비가 올 것 같기도 하지만, 일단 닦기로 결심을 했으니까. 유리를 닦으면서 올려다본 하늘에 2층 간판이 비스듬 걸린다.

 봄봄 화실. 클로바 레코드와 역사를 같이 한 것인지, 간판의 모양새도 같다. 통일감 있게 촌스럽구나. 2층은 세를 주었다고 들었는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유리를 다 닦고, 옷장 서랍에 넣어둔 부동산 서류를 뒤져봤다.

 다행히 봄봄 화실 서류도 있다. 흠, 보증금 이천만 원에 월세가 오십만 원이었네. 싼 건지 비싼 건지 모르겠다. 월세는 꼬박꼬박 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작에 나간 가게인지도 알 길이 없다. 

봄봄 화실 서류 봉투에는 여벌의 열쇠도 같이 들어있다. 이 문제는 곰 씨에게 물어 보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봄봄 화실 계약서네.”

부지런한 참새 아주머니가 바람 떡을 들고 오셨다.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떡! 아침을 조금 먹길 잘했다. 

“세를 주었다고 들었는데, 열린 걸 본 적이 없어서요.”

“문 안 연지가 5년쯤 지났어. 곰 씨가 있을 때도 닫혀있었으니까.”

“아,”

“이천에 오십이었나?”

“네.”

“보증금은 다 까먹었을 거야.” 

랩으로 포장한 바람 떡이 두 팩이다. 뭘 이리 많이 가져오셨지? 접시를 내오는데, 한 팩을 다시 곱게 담으신다. 

“이건 곰 씨 갖다 줘. 곰 씨가 제일 좋아하는 떡이거든. 병문안도 못 가보고, 미안하네”

윽, 제게 이런 숙제를 남기시다니요. 부디 제가 좋아하는 바람 떡에 트라우마를 남기지 말아주세요. 

슈퍼 아주머니께서 시판 수정과를 들고 오시고, 세탁소 아주머니는 부직포행주를 잔뜩 들고 오셨다. 전단지가 끼워져 있는 걸로 보아 판촉물 같은데. 

“필요하면 나눠들 가져. 아들이 회사에서 가져온 거야.”

내 몫까지 남아서 부엌이 한결 쾌적해지겠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봄봄 화실, 안 연지 오 년 넘었지?”

“이 위에? 오 년도 더 됐을걸? 매직이가 여기 다녔었잖아. 고등학교 때 갑자기 미대 간다고 고집을 부려서, 몇 개월 다녔지.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 문 닫았으니까.”

“연락처가 어디 있을 텐데.”

슈퍼 아주머니가 핸드폰을 꺼내 주소를 훑어보신다. 

“봄봄 연락처가 왜 자기한테 있어?”

“봄봄은 아니고, 조카 연락처야. 병원 데리고 가는 날에 잠깐 들렸었거든, 무슨 일 있으면 여기로 연락하랬어.”

조카의 연락처를 계약서 끄트머리에 적어 두었다. 아, 이 삼총사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드님 이름이 진짜 매직이에요?”

전부터 궁금했는데 오늘에야 묻는다. 

“에이그, 그럴 리가 있어. 별명이지. 이름이 유성이라, 매직이라고 불러.”

“애들이 하도 매직, 매직하니깐 우리도 입에 벴잖아.”

“뭔가 마법사 같고 좋은데요.”

“그으래? 이참에 한 번 만나볼래? 내 아들이지만, 훤하고 잘 생겼다니까.”

“아이고, 이렇게 이쁜 처자가 애인 하나 없겠어.”

“그릉가? 제이 애인 있어?”

아, 이럴 땐 정말 난감하다. 딱 잘아 거절을 하기도 그렇고, 무턱대고 알았다고 하기도 그렇고. 예전에 알바하던 곳에서도 똑 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등 떠밀려 나갔는데, 아버지 뻘의 남자가 나와 있어서 크게 당황했었다. 


“애인은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설마, 짝사랑?”

네, ‘설마, 짝사랑’입니다.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은 꿈도 못 꾸겠어요. 어제도 봤다니깐요. 

“에고, 하니랑 똑 같네.”

하니? 잠잠하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발 이러지 마. 일상생활에 무리가 가잖아.

“하니도 짝사랑이래?”

“걔도 오래됐어. 매직이가 소개팅을 해준다고 해도, 그 짝사랑인지, 뭔지 때문에 나가질 않는대. 생각보다 순정파야.”

 생각이 일시에 정지됐다. 설마 내가 아는 그 하니는 아니겠지. 

“하니 누나는 몇 번 봤지? 몽이 있잖아. 몽이라면 들렸을 텐데.”

“아, 네. 몽이언니는 자주 놀러와요.”

“하니가 걔 동생인데, 우리 매직이보다 아주 쬐끔 잘생겼어. 대학 다닐 때 F2였다나 뭐라나.”

“저, 하니도 본명인가요.”

삼총사가 동시에 깔깔깔 웃었다. 내 어리바리한 반응이 재밌었을 거다. 

“애기 때 ‘달려라 하니’의 ‘하니’를 꼭 닮아서, 우리들끼리 하니라고 불렀지. 원래 이름도 하니랑 비슷하기도 하고, 본명은 ‘이 한’ 이야.”

철수를 찰스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거네. 그의 원래 이름도 그럴까. 그가 그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왜 나는 이렇게 두근거리는 것일까. 꼭 갖고 싶은 퍼즐 한 조각을 발견한 아이처럼 설렌다. 

삼총사의 수다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일은 노래 교실이 있고, 모레는 예전에 일하던 옷가게에서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역시 오늘 갔다 와야겠구나. 곰 아저씨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봄봄 계약서를 챙기고, 바람떡도 챙겼다. 허탕을 칠 수도 있어서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이따 잠깐 들릴게요.’     


엄마의 미용실은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가야 한다. 내가 처음에 갔을 땐 논하고 밭뿐이어서 손님도 파마를 하러 온 할머니뿐이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엄마의 미용실의 고객층도 젊어졌다. 내가 고등학생일 무렵엔 리모델링까지 해서 꽤 현대적인 미용실이 되었다. 지금은 다시 촌스러워졌지만, 

구름다리를 건너 환승 열차를 기다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자취를 시작했다. 처음엔 고시원, 그 다음엔 하숙, 화장실이 달린 전세를 얻기까지 숱한 방을 거쳐갔다. 엄마의 집에서 더 살았다면, 삶이 더 편했을 텐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왔다. 늦은 사춘기 탓도 있지만, 엄마라는 사람이 주는 어색함이 더 싫었던 것 같다. 7살 때까지 한 번도 찾아오지 않다가 취학통지서를 받고, 처음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 버스터미널에. 

집을 잃은 달팽이처럼 나는 하루아침에 등껍질을 잃고 길바닥에 버려졌다. 엄마의 집은 내 집이 아니었다. 


전철이 들어온다. 빈자리가 드문드문 보였지만 앉지 않았다. 입구에 서서 풍경을 보는 게 낫겠다. 

손님들에겐 종달새처럼 지저귀면서도 집에 오면 말이 없는 사람. 할머니도 말이 없으시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친한 사이의 침묵은 이불처럼 따뜻하고 편안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이의 침묵은 보이지 않는 벽과 같다. 내 유년은 그 차가운 벽에 갇혀있다. 

그토록 벽을 두었던 엄마가 어느 날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거절했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홀리듯 주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다. 


여기서부턴 버스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버스에 올라탄다. 개발이 됐다고 하지만, 아직 덜 된 곳도 있어, 버스를 타고 달리다 보면 뜻하지 않게 논밭이 펼쳐지곤 한다. 차창을 조금 연다. 비가 왔었는지 젖은 흙냄새가 싱그럽게 느껴진다. 조금만 가면 도착이다. 


매주 화요일은 정기휴일이지만, 엄마가 쉬는 걸 본 적이 없다. 역시 머리를 말고 있다. 곁에서 파마 종이를 건네주는 건 곰 씨인가. 망설이면 내내 서 있게 될 거다. 생각을 짧게 행동은 빠르게. 딸랑, 종이 울렸다. 

“어서오세요.”

곰 씨가 살갑게 인사한다.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커트 하실 건가요?”

사진 속에서 봤던 곰 씨가 이렇게 생생하게 말을 거니, 뭔가 이상하다. 만화 속 인물이 현실에 나타난 느낌이랄까.

“제이야. 내가 온다고 했잖아.”

“아, 제이.”

그제야 나를 알아보고는 접대용 미소를 지운다. 별로 할 것도 없어 참새 아주머니가 준 떡을 내밀었다. 

“참새, 아니 방앗간 아주머니가 전해달라 하셨어요.”

“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람떡이네. 잘 받았다고 전해줘.”


말없이 앉아있자니, 답답하다. 곰 씨는 다시 종이를 건네주고 있다. 미용실은 내가 떠날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반짝반짝하던 새것들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낡아졌을 뿐.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다. 30대처럼 보이던 얼굴도, 세월을 비켜 가진 못했는지 이제는 제 나이로 보였다. 탈색한 노란 생머리는 그대로지만.

“밥은?”

“먹었어요.”

들고 온 서류를 만지작대다 곰 씨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처리하는 게 낫겠다. 

“봄봄 화실은 나간 건가요?”

“아, 거기, 아니, 나가진 않았어.”

엄마보다 늙어 보이진 않는데, 오빠가 맞긴 한 걸까. 아무리 봐도 동생뻘로 보이는데. 역시 베짱이라 늙질 않는 건가. 

“월세는요?”

“봄 여사님이 병원에 간 후엔, 받지 못했어.”

“그럼, 보증금은 다 까였고, 월세도 밀렸네요.”

“응.”

서류를 꺼내 들여다봤다. 대략 오백만 원쯤 밀린 것 같네. 

“이쪽에서 알아서 처리할까요?”

“응. 그래 줄래.”

대답을 들었으니 됐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드디어 불편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밀린 숙제를 끝낸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저쪽에서 아무것도 밝히지 않는다면 이쪽도 캐물을 필요가 없다. 


길가 분식점에서 핫도그를 팔기에 하나 샀다. 케첩은 지그재그, 막 깨물어 먹는데, 누군가 톡톡 어깨를 친다. 

“아깐 손님이 있어서, 시간 괜찮으면 어디 좀 들어갈래?”

곰 씨다. 젠장, 핫도그에 한 눈 팔지 말고, 버스에 바로 올라탈 걸. 분식집 옆에 있는 빵집 겸 카페로 끌려갔다. 

“소개가 늦었네. 내가 김 곰이야.”

설마 그 말씀 하시려고 핫도그를 막 깨문 절 붙잡으신 건 아니시죠?

“어디서부터 얘길 해야 하나, 역시 과거부터 얘기하는 게 나을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얘기라면요. 


“미나 누나랑 난 사촌지간이야.”

미나 누나? 우리 엄마? 역시 이 아저씨가 연하였어. 뭣 때문에 친척 오빠라고 속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피는 한 방울도 안 섞였어. 난 재혼한 엄마가 데리고 온 아이였거든. 그래도 사촌이니까, 아무래도 쉬쉬 할 수 밖에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뭘요?

“좋아한 건 내가 먼저. 어릴 적부터 미나 누나랑 결혼한다고 말하고 다녔다니깐, 오래되긴 했지.”

마침 커피가 나왔다. 엄마의 연애사를 듣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용기도 없다. 곰 씨가 각설탕 두 덩이를 아메리카노에 넣는다. 나는 얼음을 휘젓는다. 

“그래도 고모는 알았을 거야. 네가 나를 닮았으니까.”

얘기가 너무 두서없다. 고모라 함은 우리 할머니를 말하는 건가. 

“그래서 더 가보질 못했어. 미나 누나도 못 가게 했고.”

모든 가족 행사에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았던 이유가 그런 거였나. 그건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다 끝난 후에 통보하듯 연락이 왔다. 내가 본 건 유골단지와 내 이름으로 된 통장뿐이다. 그땐 정말 엄마를 원망했다. 아니 지금도 원망한다.


“왜 낳았어요?”

“그야 사랑의 결실이니까. 당연하잖아.”

사랑의 결실 좋아한다. 그래서 책임도 못 지고, 그리 버려두셨어. 

“저를 키운 부모는 할머니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아저씨도 엄마도 저를 사랑의 결실이라 부를 자격은 없어요.”

“미안하다.”

“체면 때문에 부모 노릇을 하지 못했다면, 끝까지 그렇게 해주세요.” 

“제이야.”

“크로바 레코드도 빚 대신이라면 받겠습니다만, 유산이라면, 받지 않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생물학적 부모일 뿐, 내겐 의미가 없다. 사랑의 결실? 그런 무책임한 말은 처음 들어본다. 지나가는 택시를 바로 잡았다. 백미러로 망연히 서 있는 곰 씨의 모습이 보인다. 바람떡만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텐데. 


역 근처 편의점에 들러 술을 샀다. 슈퍼 아주머니에겐 죄송했지만, 그래도 이미지 관리는 해야 하니깐. 안주는 뭐, 햄이 들어간 김치찌개면 될까. 깡 소주도 나쁘지 않고. 

어째서 곰 씨에게 그리 차갑게 쏘아붙였는지 모르겠다. 엄마보다 더 편해서 그랬을까. 처음 보는 사람을 그리 대하는 건 실례인데, 나도 참 못됐구나. 나답지 못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이런 날엔 할머니가 더 보고 싶다. 내 진짜 엄마. 미용실 집이 싫어 울면 언제고 놀러 오라고 위로해주셨지. 근데 이젠 갈 수가 없어요. 할머니.


가게 불을 켜고 음반을 건다. 피노키오 1집 ‘다시 만난 너에게’다. 정겨운 리듬과 함께 서정적인 가사가 나를 위로해준다. 햄 대신 참치캔을 깠다. 국물을 따라 버리고, 통째로 찌개에 넣는다. 설탕 한 스푼에 MSG도 조금, 기왕이면 맛있게 먹겠습니다. 밥 대신 찌개에 소주를 마셨다. 크헉, 좋다. 그 시절 내 곁을 유일하게 지켜주던 건 음악이다. 구닥다리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철 지난 음악들이 내 유년을 빛나게 해주었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꺼내든다.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날 보는 너의 그 마음을 이젠 떠나리     


‘사랑과 우정 사이’를 불러보다 공연히 코를 훌쩍인다. 찌개가 매운가. 기타를 부둥켜안고 눈물까지 뚝뚝 흘렸다. 널 만난 것도 그 집이었어. 누군가 이사 갈 때 버리고 간 널 몰래 주워와서 밤마다 연습했지. 빈 병을 주워 판 돈으로 기타 책을 샀을 때도 참 좋았었는데,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서도,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어. 내겐 노래와 네가 있었으니까.      


#달달로맨스 #웹소설 #크로바레코드 #힐링물 #첫사랑 

작가의 이전글 크로바레코드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