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깨닫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나를 떠나야 했다
살면서 정말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정신없고 바쁜 시기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찾아온다.
지나고 나서야 진짜 안 죽고 버틴 게 용하다 싶은, 오늘 당장 내가 잘못돼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
내게 그 시기는 2024년도였다.
회사 내 조직개편으로 새로운 팀에 들어가서 지금까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하게 되었다.
이 회사 고인물 소리를 들을 정도의 연차였음에도, 아예 처음 해보는 업무에 나의 기존 경험과 지식들은 하등 쓸모없어졌고 업무적으로나 체력적으로도 한계에 도달했다.
밤 12시 전에 퇴근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주말까지도 일을 해야만 했던, 정말 오징어 게임의 명대사인 ‘이러다 다 죽어요’가 현실감 있게 와닿았던 그 시기.
끝이 보이지 않고 쏟아져내리는 일더미에서 어떻게든 우리를 버티게 해 줄 동아줄이 절실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치 짠 것도 아닌데 연 초부터 빠르게 휴가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누구는 4월 누구는 6월 누구는 7월... 그 바쁜 와중에도 우리들은 오늘을 버티기 위한 미래의 보상을 빠르게 예약했다.
늘 ‘오로라’가 목적인 겨울 여행만 갔던 나는, 노르웨이에서 ‘오로라’를 본 이후 여행의 목적이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가고 싶은 곳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고 겨울 여행 외에는 가본 적 없던 나였지만, 이 지옥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없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 길게 떠나고 싶었고, 겨울여행을 좋아하지만 겨울까지는 버틸 자신이 없었기에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대략 마무리되는 10월을 목표로 여행지를 찾아봤다.
일주일 이상의 장기여행, 가깝지 않은 나라, 사람이 너무 붐비지 않는 나라를 떠올리다 찾은 나라가 아일랜드였다.
TV 프로그램과 영화 등에 버스킹으로 많이 나와 유명해진 나라, 배낭여행자들의 성지.
이 두 가지 정보 외에 아일랜드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게 없었지만 더 이상 고민할 시간도, 여유도 없던 나는 일단 무작정 10월 더블린행 티켓을 예약했다.
그러고 나서야 좀 숨통이 트이고 앞이 보이지 않던 어둠의 터널 끝에 한줄기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신중하고 꼼꼼한 성격이라 평소 같으면 몇 날 며칠을 검색하고 여러 가지 대안을 비교해서 티켓을 예약했겠지만 이 때는 그냥 아일랜드가 떠오른 순간 바로 10월 행 티켓을 질렀다.
아마 나는 훌쩍 떠나는 배낭여행자들처럼 그렇게 내 어깨, 머리, 마음속에 가득가득 쌓여있는 짐들을 내려놓고 훌쩍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일상에서의 탈출이 될지,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여행이 될지...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깨닫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나를 떠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