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East Asian Rainy Season.
사전적으로는 6월 하순에서 7월 하순의 여름에 걸쳐 비를 뿌린다는 장마.
헌데 올해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인지 7월 느즈막부터 8월 지금까지 대기와 하늘을 지배하는 중이다.
오늘은 천둥 번개가 유달리 세게도 내리쳤고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 건물 로비에는 빗물막이 가림막이 설치되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날은 흐리고 마음 울적한 날은
흐린 날과 동요하는 마음을 빌미 삼아 농땡이부리기 딱 좋은 날이다.
건물 내 공기 순환 시스템에 의해 쾌적한 사무실 내 온습도를 누리고 있으니,
딴짓이 더욱 간절하고 노래가 듣고 싶고 손끝이 간질간질하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손이 작아 피아노 건반 한 옥타브를 한 번에 치지도 못해 도-도를 엄지와 새끼손가락으로 나눠서 쳐야 했음에도, 같은 나이 긴 손가락을 가진 친구가 선생님의 지도하에 콩쿨 준비하는 걸 지켜보면서 아쉬움을 삼키던 순간에도 피아노학원은 내게 작은 낙이었다.
입시용으로 피아노를 치던 게 아니었기에 부담 없이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칠 땐 열심히, 지겨운 노래를 연습해야 할 땐 쉬엄쉬엄 선생님이 정해준 할당량만 연습하고 집에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부모님도 여자아이라면 한 번 경험해 볼 만하다 싶어 피아노를 시키셨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피아노 학원을 바꾸는 바람에 바이엘을 몇 번을 치는 지루한 진도를 견뎌낸 것이나 드디어 체르니로 넘어가서 체르니 몇 번을 치는지 등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그저 몇 번 내게 '만남'을 칠 줄 아느냐 물으셨고 나중에 그 노래를 연주해 줄 수 있겠느냐 물으셨다.
그랬기에 그 시간을 내 마음을 담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피아노 하나, 선생님용 원형 의자 하나 들어가면 끝날 작은 피아노방 몇 개와 아이들이 모여 피아노 이론 문제집을 놓을 수 있는 큰 책상 하나 있는 그 학원 가는 길이 왜 그리도 설렜을까.
선생님은 아주 작은 빨간 경차를 몰고 다니셨다.
입술 위에는 까만 점이 있고 뿔테안경을 낀 약간 새침한 젊은 여자 선생님.
그 작은 것 하나하나가 기억날 만큼 피아노 학원은 나에게 애정 가득한 공간이었다.
특히나 가요 악보 책을 연습하던 때가 좋았다.
그때 피아노 건반의 울림과 내가 나기도 전에 세상에 나온 음악들이 어찌나 어린 마음을 아련하게 하는 지 한 번의 실수 없이 연주해내기 위해 짤막한 손가락의 온 신경을 곤두세워 건반을 두들겼다. 가끔 누군가 선생님이 좋아하는 가요를 연습할 때면 선생님은 옆에서 노래를 불러 주셨다.
낭만이었다. 두 자릿수 나이도 되지 않은 나였지만 그게 낭만이라고 느껴졌고 그 순간만큼은 예술가였다.
그 때 참으로 좋아했던, 그래서 진도와 상관없이 책을 넘겨 연습했던 노래들이 있다.
연가/은희(1972)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잠잠해져 오면 오늘 그대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 사랑 영원히 기다리리.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 사랑 영원히 기다리리'
레레시시라라솔시. 그 음계가 지금도 귀와 손에 선명하다.
학원에 새 피아노가 들어와서 온 아이들이 그 피아노에 앉아 연습하려 눈치 게임을 하던 그때,
나도 다른 아이들의 순서를 기다리고 기다려 내 차례를 받아 연습했던 곡이 연가였다.
연가의 연이 무슨 한자인지도 몰랐을 그때도 어찌나 멜로디가 구슬픈지 있지도 않은 그대를 기다리다 마음이 삭는 느낌이었다.
이제 찾아보니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전통민요란다. 절절한 사랑을 사랑했던 부족이다.
타타타/김국환(1991)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다른 구절은 기억나지 않는다.
딱 이 구절의 가사와 통통 튀는 음계가 재밌어서 아주 꽝꽝 내리쳤던 기억이다.
지금 보면 참으로 맞는 말이다. 나도 나를 모르겠다.
누가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까.
비처럼 음악처럼/김현식(1986)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오늘같이 비가 쏟아지고 빗물이 거리가 범람하는 날에는 살짝 어긋나는 듯 하지만,
사무실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자니 고요하고 스산한 멜로디가, 가사가 머릿속을 맴돈다.
아무리 울면서 걸어도 내 눈에 흐르는 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이런 날은
조금 나태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옛 추억을 곱씹는 것도 재미지다.
하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은 남아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비처럼 음악처럼
오늘 흘러간 하루와 마음이
내일은 조금 더 정화된 그것으로 가득 차 있기를
그래서 맑은 정신으로 모든 것을 품어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