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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하 Oct 04. 2024

강릉 밤바다와 넘치는 거품

오늘은 일찍 눈을 떴다. 아침 7시. 아직 어둑한 학교를 빠져나온다. 9시 22분 청량리역. 강릉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한다. 10시에 있을 합격자 발표는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노트북을 꺼낸다. 12월 15일. 올해도 의미 없이 한 해가 저물어가겠구나. 내 시간은 작년 여름부터 멈춰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의 결과를 확인한 후 대충 사진을 찍은 후 노트북을 덮는다. 스마트폰을 집어든 뒤 첫 끼로 무엇을 먹을지 검색한다. 1차 시험을 떨어졌음이 확실해졌으니 대체 왜 나가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조차 설명할 수 없었던 2차 스터디를 더 이상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23살. 청춘의 한 가운데. 나는 오늘 청춘의 고독과 방황을 즐길 것이다.


너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 서울로 응시했으나 나는 이제 이 곳을 떠나고 싶다. 네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 너의 존재를 잊고 싶다 영원히. 그러나 너는 여기까지 날 따라온다. 기차가 출발했던 청량리역. 조금만 더 걸으면 너와 닿을 수 있는 곳. 그러나 나는 다시 멀어졌다.


쇳덩어리 철도 위를 걸어

정해진 그곳으로

난 알고도 표를 끊었어

이제야 보이네 풍경

#airplane mode


시험 생각보다 네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생각이 날 떠나지 않았다. 내가 벗어나려할 수록 너라는 존재는 멈추지 않고 나를 다시 옭아맸다. 그 순간들이 나에겐 가장 큰 고통이었다. 지금도 나에게 고통이 있다면 그것을 벗어나려 최대한 멀리 떠나와도 그것은 나를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 자꾸만 나를 따라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누군가 내 눈을 가린 채 데려왔다면 바다인지도 모를 만큼 까만 밤바다를 바라보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너를 생각했던 그 시간만큼

정확히 그 만큼


나는 너와 더 멀어지고 있었다는 것.


답답한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더욱 더 세상과 단절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어폰을 꽂고 세상의 소리를 차단한 후 보이지도 않는 밤바다를 대책없이 쳐다봤다.


Meet me in toronto sometime

Meet me in toronto sometime

I can show you what this love's like

Like we fuckin for the first time

Real Love

멀지

허나 같은 도시에 있어도

멀어진 사람이 더 멀지

너가 좋아했던 내 미공개곡

비행 내내 것만 들었지

내가 나의 돈들과 인기를 다 잃어도

아니, 그게 뭔 상관이야 이 순간

서울 서울

서울을 벗어나니 돌아오는 원래의 나

다들 무관심해 내게 마치 원래의 나


"사진 작가세요?"

"아니요"

"아 사진 작가이신 줄 알았어요. 제가 하나 찍어드릴까요"

"감사합니다"



그래 참 멀어졌어 I Know

왼손은 라 오른손은 highest note

왼손은 너 오른손은 나이고

타고 만남 안돼 글리산도?

아마 그러긴 힘들꺼야

그래도 빌어봐 난 이렇게

'네 젊음이 너를 이곳 데려올꺼야'

#meet me in toronto


젊음. 그렇다. 나의 21, 22, 23살 나의 젊음에는 모두 네가 있었다. 너를 빼고는 나의 젊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너의 젊음 한 폭 정도에는 내가 있을까. 무언가를 바라는 것에 돌아오는 것은 실망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안다.


오늘의 나를 위해 미리 예약해둔 펜션은 눈치없이 넓다. 텅 빈 공간이 나의 감정을 증폭해준다. 제트 스파에 입욕제를 통째로 부어넣는다. 거품이 넘쳐 흘렀다. 그 모습이 꼭 나를 닮은 것 같아 허탈한 웃음이 났다. 이대로는 방 전체가 거품으로 가득찰 것 같아 물을 조금 빼고 다시 따뜻한 물로 채웠다. 몸을 푹 담궜다. 발을 쭉 뻗어도 남을 정도로 큰 욕조가 마음에 든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애초에 오늘 밤은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했으므로 물 속에 잠긴 나는 평온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 하얗고 폭신한 이불 속에 안겼다. 이내 충만함이 느껴졌고 몸 전체가 떨렸다. 내 안이 가득 차있는 느낌. 이런 감정을 느껴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이었다. 그 날은 바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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