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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Jul 21. 2017

나는 욜로(YOLO)족이 아닙니다.

끝 모를 여행 이야기를 시작하며

“안녕하세요 작가님, XXX 방송사 OOO 기자입니다.”


 공중파 방송의 여덟 시 뉴스 섭외 전화를 받았다. ‘한 번뿐인 인생, 행복한 오늘을 위해 산다’는 제목으로 최근 유행하는 욜로(YOLO : You only live once) 트렌드를 소개하는 리포트 기사에 여행 욜로족으로 인터뷰를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지난해 출간된 내 책의 저자 소개글을 인상 깊게 봤다며 섭외 이유를 설명했다. 생각해보니 몇 주 전 출연한 주말 라디오 방송의 DJ도 그 문장에 관심을 보였었다.


'바닥난 통장 잔고보다 고갈되고 있는 호기심이 더 걱정인 어른'


 무작정 사표를 던지고 여행을 떠난 회사원의 이야기가 당사자, 그러니까 내 인생에선 더없이 특별한 일이었겠지만, 사실 이야깃거리로서는 이제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TV와 서점, 블로그에서도 그런 소재는 너무 흔해졌으니까. 그들이 내게 원하는 이야기도 아마 내가 여행을 결심한 과거보다는 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먹고살아야 할 미래에 있었을 것이다. ‘뭐, 아무렴 어때. 텔레비전에 내가 나온다는데.’ 나는 통화 내내 그저 설레어 있었다.


 약속한 인터뷰를 이틀 앞두고 나름의 예상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정리했다. ‘얼마나 많은 나라와 도시를 다녔는지’, ‘가장 좋았던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은 어디였는지’와 같은 상투적인 질문들부터 ‘여행만 다니며 먹고살 수 있겠어요?’와 같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너 앞으로 뭐 먹고살래?’ 같은 현실적인 질문까지. 그렇게 면접 준비하듯 수첩에 질문과 답을 하나씩 채울수록 점점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만, 내가 욜로족인가?’


 대답 속 내 생활은 TV와 책 속 유명인들이 부르짖고, 사람들이 선망하는 욜로 라이프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는 통화 연결음에 늘 해외 로밍 안내가 설정돼 있는 지인들처럼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지도 않았고, 각종 해시태그(#)로 여행에 미쳤다고 자랑스레 고백하는 그들만큼 여행을 사랑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매일 출퇴근을 하지 않을 뿐 생계를 위한 일에 매여있는 것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내가 욜로족으로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마 그 날 만약 마지막 하나 남은 예상 질문의 답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다시 기자에게 전화해 미안하다고, 다른 멋진 여행가를 찾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했을지도 모르겠다. 비교적 일찍 적어놓았지만 선뜻 풀기 어려워 마지막까지 미뤄 놓았던 질문이었다.


‘어떤 이유로 여행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까?’


리보르노(Livorno), 이탈리아

 이탈리아 항구 도시 리보르노(Livorno)의 작은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벌써 두 잔째 에스프레소를 마셨지만 피사(PISA) 행 버스의 출발 시각은 아직 한 시간 반이 넘게 남아 있었다. 그다지 운이 좋지 못한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올 듯 말 듯 하늘은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지었고, 삼십 분 가까이 줄을 선 끝에 들은 대답은 오전 버스 티켓이 전부 팔려 오후 분량만이 남았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아홉 시가 넘은 시각에 접한 비보였다. 배나 채우자며 찾은 식당에선 주문한 지 사십여 분이 지난 후에야 스파게티 한 그릇을 겨우 받았고, 따끔한 오월 햇살을 피해 들어선 작은 카페는 의자 하나가 아쉬워 합석을 해야만 했다. 1유로짜리 에스프레소를 받자마자 설탕 두 봉을 넣고 휘휘 젓는 둥 마는 둥 한 뒤 곧장 입에 털어 넣었다. 자근자근 씹히는 설탕 끝 맛에 위로를 받기 위함이었으리라.


피사의 사탑, 콧대 높은 숙녀.


 언젠가부터 수첩에 여행을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비록 대부분이 이런저런 하루의 불만들로 채워지지만. 수첩 위에 놓친 버스 티켓이며 본토 음식이라기엔 맛이 형편없었던 점심 식사에 대한 불평을 털어내던 내 어깨에 별안간 ‘툭’하는 신호가 울렸다. 깜짝 놀라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백발의 지긋한 노신사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는 어느새 뺨이 닿을 듯 말듯한 거리까지 다가와있었다. 반팔 줄무늬 셔츠에 배꼽까지 추켜올린 바지가 노년의 관광객 치고는 꽤나 멋스럽다고 생각했다. 오늘 본 관광객들 대부분은 커다란 반바지에 폴로 티셔츠를 넣고 샌들을 신었으니까. 건너편엔 유난히 흰 피부의 노부인이 언제부터였는지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색과 대비돼 한결 강렬해 보이는 진분홍빛 입술이 영락없는 노신사의 연인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왔다는 노신사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듣자 무척 반가워했다. 은퇴 후 함께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며 자신들을 소개한 그는 지난해 일본과 대만 그리고 한국을 경유하는 아시아 크루즈 여행을 통해 부산에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서울의 공항 이름과 도심까지 걸리는 시간 등을 연거푸 묻더니, 테이블 위의 내 카메라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40여 년 전 자신도 같은 회사의 카메라를 사용한 적이 있다고 했다. 실내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음성과 쉼 없는 점원의 외침,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자동차 소리로 시끌벅적한 카페에서 우리는 몸을 점점 더 가까이 기울여야 했고, 중간중간 귓속말을 하며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오늘 피사행이 이번 유럽 여행에서 두 사람이 가장 기대했던 순간이라는 그의 말을 들었을 땐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짝’하고 마주치며 탄성을 질렀다.


 정오가 가까워 오자 카페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버스들이 올 시간이었다. 노부부가 마주 보고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무릎 위에 놓인 가방끈을 꼭 쥐었다. 그들은 일어나기 직전까지 멋진 여행을 바란다며 격려의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탈 버스가 오기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 손목을 보니 시계는 제때 태엽을 감지 않아 멈춰버린 상태였다. 곧바로 시계 끈을 풀고 태엽을 감았다. 그렇게 다시 찾아온 적막을 보내는 내 어깨에 다시 '툭' 신호가 왔다. 가방 끈을 꼭 쥔 주먹이 낯이 익었다. 노신사는 허리를 반쯤 굽혀 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이만큼 시간이 지나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이제야 피사를 찾은 것이라네.

내겐 지금 나와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자네의 젊음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자네는 알 수 없을 거야.
앞으로 더 많이 다니고, 경험하게. 지금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을 테니.
자네가 꼭 그것을 발견하길 기도하겠네."


 노부부가 카페를 나선 후 당연하게도  다시 그들을 볼 순 없었다. 나와 다른 시각, 다른 버스를 탄 우리가 인파로 가득한 피사 대성당에서 다시 마주친다는 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오후 한 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달려 버스들이 늘어선 한 주차장에 도착했고, 두 시간 남짓 짧은 피사 관광 시간을 얻었다. 촉박한 시간에 간간히 작은 빗방울이 떨어진 날씨까지 겹친 탓이었는지, 처음 본 피사의 사탑은 기대만큼 굉장해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기울어져 있네!’ 사진에서 보던 기운 탑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팩트 체크’ 정도의 의미였달까. 오히려 정문 앞에서 사전 교육이라도 받고 온 양, 탑이 세워진 방향으로 손가락 하나를 펼치거나 입을 쩍 벌려 약속한 듯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흥미롭게 보였다. 물론 나도 손가락으로 기울어진 종루를 받친 척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언제 또 피사에 오겠냐는 핑계였다.


 오후 네 시 반, 리보르노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사람들은 태반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인생의 버킷 리스트 하나를 채운 성취감이 선사한 단잠일 것이다. 내게 졸음 한 번 찾아오지 않은 것도 아마 같은 이유였으리라. 그리고 그 날 창 밖으로 펼쳐진 어딘가 정겨운 시골 풍경을 보며 남긴 하루의 갈무리에 남은 것은 피사의 사탑도, 대성당도 아닌 노신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격려 같기도 혹 고백 같기도 했던 그 한 마디를 곱씹으며 나는 여행을 좀 더 이어가 보기로 했다. 낯선 도시에서만 분비되는 ‘여행 호르몬’의 분비가 멈출 때까지는.


 하지만 이런 낭만적인 일화에도 불구하고, 이틀 후 내 인터뷰는 말 그대로 형편없었다. 자유로운 질문과 답으로 한 시간 넘게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곁눈으로 보이는 커다란 카메라에 압도돼 종종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을 했다. 말이 뚝 하고 끊어지거나 어버버 더듬거리기 일쑤였고,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수첩에 적힌 노신사와의 이야기며 그날의 감상 역시 까맣게 잊은 채 인터뷰가 끝났다. 일주일쯤 지나 기사가 방송됐을 때, TV에 내가 나온 시간은 십 초가 채 되지 않았다.


아쉽게도 이 이야기는 인터뷰에 나오지 못했다

 한동안 나를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게 했던 첫 인터뷰는 내게 버릇 하나를 남겼다. 여행을 시작하는 날, 목적지로 향하는 비행기나 버스 안에서 리보르노에서의 일화를 두고두고 떠올리며 글과 말로 정리해 놓는 버릇이다. 다시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내겐 여행을 결심하게 된 근사한 사건이 있었다'며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인생은 오직 한 번뿐(We Only Live Once)이라고.


피사(PISA),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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