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김성주 Dec 01. 2017

다시,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맺음 글 - 잠시 이별을 고하며.

우연히 발견한 연인의 프러포즈와 노부부의 꼭 잡은 두 손에서 사랑을, 생김새는 다르지만 한결같이 반짝이는 아이들의 미소에서 행복을 발견합니다. 낯선 도시에 쌓인 영겁과 매 순간 펼쳐지는 찰나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받습니다. 잊고 있던 꿈과 사랑했던 이, 행복의 조건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여행을 반복하다 보면 알게 되죠. 그 어떤 대륙도 한 사람의 인생만큼 넓을 수 없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아주 긴 각자의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한 번의 생을.



2015. 1


 일요일 저녁, 목요일부터 이어진 긴 신년 연휴의 끝과 내일 첫 출근에 대해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동안 나도 비록 방향은 그들과 다르지만 비슷한 크기의 기대감 그리고 걱정으로 월요일을 준비했다. 머물 날짜 수만큼의 옷가지와 수첩 그리고 22개월 무이자 할부에 혹해 덜컥 구입한 새 카메라를 챙긴 뒤, 지난주에 환전해 둔 루블과 여권까지 올려놓으니 ‘이만하면 제법 낭만적인 출국 전야(前夜) 아니겠어?'라며 우쭐해진다. 하지만 잠시 후, 챙겨놓은 짐을 하나둘씩 욱여넣다 내가 가진 여행 가방이 너무 낡고 작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일곱 시, 황급히 영등포 지하상가로 향했다. 한두 가게를 둘러본 후 허리춤까지 오는 28인치 대형 트렁크를 구입했다. 먼 길, 그리고 겨울 여행에 이 정도는 갖춰야겠다 싶기도 했지만 실은 26인치보다 단돈 만원밖에 비싸지 않다는 아저씨의 꾐에 넘어간 것이었다.

 이십여 분 후, 마치 남의 가방을 맡아둔 듯 어색한 포즈로 지하상가 한편에 서 있는 내게 친구 녀석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얼굴은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나로서는 도통 동의할 수 없는 이유로 한달음에 달려온 그는 저 멀리서부터 이미 내일 나와 함께 떠나는 것 같은 그렁그렁한 표정을 지으며 본인의 남다른 공감 능력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가 불과 삼 년여 만에 이만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저 능력 덕분이다. 


“이거 왜 이래, 나 혹한기 훈련 때도 내복 한 번 안 입은 사람이야”

 타임 스퀘어의 한 의류 매장에서 대뜸 발열 내의 한 벌을 내민 그에게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보통 사람들보다 추위에 꽤 강한 편이라고 그간 자신해 왔다. 그 흔한 등산 브랜드의 패딩 점퍼 하나 없이도 서울의 겨울쯤 거뜬히 보내고 있는 내게 내복이라니. 게다가 대체 저 흰색 쫄쫄이 바지는 대체 어떻게 입으라는 건지.


“일단 가져가긴 하겠지만 입을 일은 없을 거야.”

 혹한의 겨울 도시에서 그 내복이 제2의 피부가 될 것을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먼길을 달려온 그와 맥도널드 2층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길에서 불곰을 만나면 죽은 척을 해야 한다느니 러시아 마피아 딸의 유혹에 넘어가면 큰일 난다는 등의 시답잖은 대화로 시작된 이야기는 새로 출시된 아이폰과 브루클린의 느낌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삼성동 수제 햄버거 가게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제법 긴 두 남자의 수다 중 여행에 관한 것은 없었다. 그와는 애초에 그런 대화를 하는 사이가 아닌 데다 나는 그간 여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보니 여행 전날의 대화로 그만한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낄낄대다 우습게 한 시간이 지난 것을 확인한 후 나는 그새 애물단지가 된 28인치 트렁크를 끌고 맥도널드를 나섰다. 다녀와서 보자는 내 무뚝뚝한 인사에 그는 대뜸 '잘 다녀와'라며 조심히 다가왔고, 막 코트 깃을 정리하던 나를 꼭 안았다. 당황한 나는 가만히 안겨있을 수밖에. 세상에, 왜 그때 가만히 있었지!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돌아오는 버스 안, 몸집만 한 트렁크의 손잡이를 꼭 잡고 창 밖을 응시하다 피식 웃음이 터졌다. 때마침 창 밖으로 흩뿌려지기 시작한 새해 첫눈을 보며 엉겁결에 주인공이 된 조금 전 브로맨스 씬이 떠오른 탓이었다. 내 부끄러움을 가려 주려는지, 창밖 풍경은 곧 함박눈에 가려 부옇게 사라졌다. 그럭저럭 운치 있는 출국 전야였다.


"내가 일을 벌이긴 하는 건가”

어쩌면 여행은 그날 밤 이미지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2017. 11


“작가님의 다음 목표가 있다면요?”

 말은 못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작가로 불릴 때마다 콧잔등이 간지러 죽겠다.


 “첫 번째 책을 내면서 세운 목표는 두 번째 책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꿈이 이뤄졌고요. 다음 목표 역시 세 번째 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배경은 역시나 여행이 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꼭 낯선 도시나 오지가 될 필요는 없지만요.”


“또 다른 여행 계획이 있으신가요?”


“마침 두 번째 책의 계약금이 입금됐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제 여행의 시작이었던 겨울 도시로 떠나보려고 합니다. 역시나 다른 여행가들처럼 멋지고 특별한 여행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지금까지의 여행보다 더 느린 걸음이 될 수도 있지만 제 방식 그리고 시선으로 다시 한번 시작해보려고요. 그곳에서라면 다시 그날처럼 뜨거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그제야 숨을 돌리며 광역버스 창을 가린 짧은 커튼을 젖히니 언제부터 내렸는지 때 이른 십일월 눈이 어느새 창 밖을 가득 채웠다. 폭설 덕에 어디쯤 왔는지 알 수도 없는, 느릿느릿 구르는 버스에서 나는 모처럼 해묵은 설렘을 떠올렸다. 아니, 어디엔가 가라앉아 있던 것이 저절로 떠올랐다는 표현이 맞겠다. 겨울 도시의 이름이 적힌 쪽지 하나 움켜쥐고 무작정 떠났던 내 첫 번째 여행의 시작이. 이년 후, 오늘의 나는 놀랍게도 ‘여행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언가 얼떨떨한 기분에 괜히 양쪽 어깨를 한 번씩 번갈아 보며 달라진 나를 훑어보았지만 사실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수시로 휘청이는 불안한 일상까지도.


'내 이럴 줄 알았지. 나이 두 살 먹고 여행 좀 다녔다고 내가 근사한 사람이 됐을 리가 없잖아.'


 남산 터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후 동네로 가는 지하철 대신 택시를 타고 삼청동에 있는 카페 D로 향했다. 해가 진 후에 온 것은 처음이다.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영업시간을 물으니 다행히 열 시까지란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2층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몇 번의 여행을 준비하며 내겐 ‘설렘’으로 각인된 이 공간에서 나는 모처럼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대신 지난 두 해 동안의 여행을 추억했다. 처음 걷는 길 위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던 혹한의 겨울 도시부터 사춘기 시절부터 간직했던 도시의 이름이 현실이 된 아침, 지금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인생의 가치를 찾길 바란다는 노신사의 진심 어린 조언 그리고 수많은 도시에서 선물 받거나 우연히 주워 온 생의 여러 조각들을.


 한 바퀴 돌아보니 여전히 철없지만 그동안 조금은 어른이 된 것도 같다는 으쓱함에 나는 용기를 내 그동안 미루고 미뤘던 커다란 질문 하나를 꺼냈다. 주변을 둘러보니 2층에는 역시 나 혼자 뿐. 그래서 소리 내어 읽었다. 사실 진작에 해야 했던 답, 하지만 그동안 누구도 내게 이 질문을 해 준 이가 없었다.


지금 당신을 가장 뜨겁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업 종료에 맞춰 카페 D에서 쫓겨 나온 내 스마트폰 화면에는 조금 전 도착한 항공권 예약 메시지가 떠 있다. 역시나 아직 가본 적 없는 또 다른 낯선 도시의 이름이 적혀있다. 삼 년 전 그날처럼 즉흥적인 결정은 아니었지만, 삼청동을 걸어 나오는 걸음에 맞춰 서서히 빨라지는 심장 박동은 영락없이 그때 그것이다.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어쩌면 진짜 여행은 지금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



생애일주 (生涯一周, 부제 : 도시는 끊임없이 내게 물었다)

를 마무리하며.

  위클리 매거진을 기획하며 스무 개의 목차를 정리할 때까지도 제가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오늘로서 무사히(?) 맺게 되었습니다.

 무작정 사표를 내고 떠난 러시아 모스크바, 혹한 속 ‘미친 여행’을 시작으로 지난 2년간 낯선 도시들을 여행했습니다. 그 여행에서 제가 얻은 크고 작은 것들을 ‘세계일주’에서 착안한 생애일주(生涯一周)라는 제목의 매거진을 통해 나누고 싶었습니다. 부족한 글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신 덕분에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봄에 다시 뵙겠습니다!

 하나 더, 감사하게도 생애일주 매거진의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게 되었습니다. 스무 편에 채 담지 못한 또 다른 여행을 더해 새 봄에 소개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동안 귀 기울여주셔서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이전 19화 종착은 없어, 잠시 기항할 뿐이지.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생애일주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