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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주 Nov 24. 2017

종착은 없어, 잠시 기항할 뿐이지.

지구 어딘가. 생이라는 항해 (2/2)

 항해 나흘째, 매일 아침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데려다준 배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쉬지 않고 지중해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다. 애프터눈 티를 마시고 잠시 갑판으로 나온 나는 수평선 위 어떤 대륙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육중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광활한 풍경에 이제 더 이상 압도당하지 않는 나를 새삼 대견해하며. 하루의 절반 이상을 바다 위에서 보내다 보니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그보단 항해 첫날 이곳에서 만난, 세상을 떠난 배우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배에 오른 남자를 통해 본 거대한 대륙 혹은 해협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리라.



 바르셀로나 항을 출발해 그제 카르타헤나(Cartagena)로, 그리고 어제 지중해와 대서양의 경계에 있는 지브롤터(Gibraltar)를 돌아온 배가 프랑스 남부를 해항 하는 하루는 온전히 바다 위에서 보내는 날이었다. 그리고 배 안에선 아침부터 승객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나는 오전에 5층 레스토랑에서 아웃렛 쇼핑을 즐기고 오후에는 7층의 강당에서 열린 그림 전시와 경매를 구경했다. 배 한편에 있는 카지노에선 우연히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딜러와 반갑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나 모스크바 여행기를 책으로 준비하고 있어.”

“멋져! 근데 말이야, 사람들이 모스크바를 좋아할까?”



 총 19층에 달하는 배 안에서 열린 이벤트를 모두 볼 수 없었지만 이 날 하루의 하이라이트는 저녁 시간에 열린 파티라는 것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일곱 시, 선내 안내 방송을 듣고 5층 중앙 홀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승선과 함께 챙겨 온 턱시도와 드레스로 한껏 멋을 낸 모습이었다. 황금색 조명과 샹들리에로 치장된 홀이 여느 고급 호텔의 파티장 못지않았던 데다, 어느새 중앙 홀을 가득 채운 밴드 음악과 재즈 가수의 노래가 어찌나 황홀했던지 나는 잠시 내가 지중해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잊고 파티 분위기를 즐겼다. 지긋한 중년 신사 숙녀들 속에서 베이지색 슈트 차림의 동양인이 꽤나 눈에 띄었던지,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는 요청을 받은 덕분이기도 했다.


 잠시 후, 이 배를 지휘하는 기장이 턱시도 차림으로 홀 중앙에 섰다. 성공적인 항해를 위해 축배를 들자는 말로 입을 뗀 그는 수십 잔의 잔으로 쌓은 탑 위로 첫 번째 샴페인을 부으며 파티의 절정을 알렸다. 그 뒤로 승객들이 하나 둘 홀 중앙에 마련된 무대에 연이어 올라 축배를 채웠다. 이 배 바깥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음악과 환호성, 그리고 이따금씩 배를 부드럽게 흔드는 파도의 움직임. 세상 어느 대륙에도 없는 파티는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축배가 끝난 후에도 파티는 끝나지 않았다. 먹고 마시며 바다 위에서 보내는 이 하루의 특별함을 만끽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갑판에 오른 나 역시 슈트와 보타이 차림 그대로였다. 밤바람이 차가웠지만 이 하루를 위해 챙겨 온 옷을, 그리고 이 파티를 벌써 벗어버리는 건 역시 아쉬웠다. 대형 스크린과 수영장이 있는 갑판 위에도 비현실적인 조명이 반짝이며 배 전체에 퍼진 파티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 기적 같은 지중해의 노을이 펼쳐졌다. 그 역시 이 하루만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루에 한 도시,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도시가 펼쳐진 크루즈 여행은 내가 얼마나 느린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도시와 미처 사랑에 빠지기 전에 돌아와야 했고, 지난 이야기의 되새김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다음 도시로 떠밀려 나갔으니까. 한 도시에 되도록 오래 머물며 지지부진한 사랑을 즐기는 내게는 숨이 벅찰 정도로 빨랐달까. 하긴 여행뿐만 아니라 사랑에도, 일에도 미련이 많은 나는 늘 느린 사람이었다. 이 하루를 없어서는 안 될 날로 기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쁘게 달린 이레 간의 항해에서 이 하루가, 그리고 사람들의 시간에 맞추느라 휩쓸리며 여기까지 온 내 생에선 이 항해가 파티이자 쉼표였다.


 내 세상에 없던 색으로 칠해진 그날의 노을을 보는 나는 돌아가면 오늘처럼 파티를 해 보고 싶어 졌다. 소중한 사람들을 초대해 오늘 하루는 대리, 과장, 누군가의 엄마와 아빠도 아닌 각자의 바다 위에서 축배를 들어 보자고. 건배사는 ‘앞으로의 항해를 위해!’


 다음 날 아침, 배가 마르세유(Marseille) 항구에 닿았다. 나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이 밝기 전 발코니에 나가 항구와 도시를 맞이했다. 그렇게 다시 하루에 한 도시씩 남은 여행이, 그리고 밤마다 파도 소리와 움직임뿐인 항해가 이어졌다. 아침마다 눈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 새 하루에 도착해 있는 것이 짜릿했고 그 이야기를 보고 듣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던 시간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다시 배에 돌아가야 했던 탓에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의 밤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반복되는 항해, 그리고 새로운 도시와의 만남은 둘의 경계를 점차 모호하게 만들어서 나는 점점 내가 도시에 머물렀다 떠나는 것인지, 아니면 대륙이 잠시 내게 닿았다 다시 멀어지는지 알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 항해에서 내가 만난 도시 중 평범한 곳은 없었고, 무의미한 하루 역시 없었다고 자신한다. 오후 네 시의 카르타헤나 항에서는 행복을 위한 치열한 노력을 배웠고, 제노바의 어느 골목에서 만난 소년의 뒷모습에선 청춘을 살기 위해선 호기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되새겼다. 내 처지와 닮은 것 같아 측은하기까지 했던 스페인 끝자락의 영국령 지브롤터에선 나와 세상의 거리를 조절하는 법을, 마르세유의 카페테라스에서는 나도 몰랐던 여행자로서의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실 모두 이미 내 안에 있었지만, 떠나오지 않았다면 그저 품고만 있었을지도 모를 것들이었다. 언젠가 내가 정말 작가가 되는 날, 이 긴 항해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터놓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




누군가는 모스크바 강을 건널 사람들을 위해 거대한 돌을 자르고 깎고 쌓아 다리를 만들어 두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를 떠난 사람들도 어김없이 한두 개의 조각을 남겼고, 이것은 내가 삶이라는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줬다.

- 인생이 쓸 때, 모스크바 (2016, 위즈덤하우스)


 일 년 전, 폭설이 쏟아지는 모스크바 강 위의 어느 다리에서 나는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답은 이랬다. ‘어느 것 하나 원래부터 내게 있었던 것은 없다.’ 지금도 귓가에 흐르는 피아노 반주곡을 내게 처음 들려준 사람과의 기억, 걱정하는 일 대부분은 그보다 수월하게 지나간다며 등을 토닥여준 선배의 말을 밟고 나는 생의 걸음을 한 발짝씩 떼 왔다. 빛나는 봄의 지중해 한복판에서 겨울 도시를 떠올린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사실 도시 하나를 지날 때마다 조금씩 변해가는 이 항해가 꼭 생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시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추억 혹은 조각을 밟으며 또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그 겨울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발견과 다르지 않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기대했다. 이 항해 끝의 나를. 겨울 도시가 나를 여행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켰던 것처럼, 이 항해의 끝에 있는 나는 또 한 번 달라져있을 거라는 생각에. 지중해 위에서의 마지막 날은 호화로운 배를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보다는 내일부터 시작될 또 다른 항해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토요일 아침,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발코니 문을 여니 배는 이미 오래전에 항구에 도착해 있었다. 이탈리아 서쪽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 항. 이번 항해의 종착지였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짐을 꾸린 나는 정든 발코니와 엘리베이터, 5층 홀 그리고 배 입구에 차례로 작별 인사를 하며 하선했다. 치비타베키아 기차역까지 가는 길에는 마치 일주일 만에 땅에 내린 사람처럼 종종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어쩌면 가슴속 무언가가 좌, 우로 묵직하게 나를 흔든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치비타베키아 역을 출발해 로마 테르미니(Termini) 역으로 가는 기차에서 나는 모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 배에서의 마지막 밤, 처음으로 취할 때까지 진탕 마셨던 탓에. 한참 후 눈을 뜨니 빗방울 맺힌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쉴 새 없이 스쳐가는 이탈리아 시골 풍경뿐이다. 지난 일주일은 어쩌면 긴 꿈이 아니었을까, 광장의 춤과 아이들의 미소도 어쩌면 밤샘 비행 후에 잠시 든 사이 나 혼자 꾸며낸 이야기들은 아니었을까. 오른쪽 좌석에 놓아둔 검은색 수첩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참 더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섬에 갇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내 재킷 주머니 속에, 작은 크로스 백 안에 품고 다닌 검은색 수첩. 어느새 힘없이 늘어진 고무줄이 그 간의 항해가 거짓이 아닌 것을 확인시켜줬다. 그리고 펼친 수첩 속에는 그동안의 항해가, 내 생이 있었다. 분명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 믿는다는 항해 첫날의 나를 향해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테르미니 역에 도착했다. 첫 번째 여행부터 나와 함께 해 온 영등포 지하상가 출신 28인치 트렁크도 그 못지않은 소음을 내며 나를 따라 기차역의 인파와 소음, 알 수 없는 글자들 가로지른다.


항해의 종착지 치비타베키아에서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하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여행엔 애초부터 종착지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다음 여행을 시작하기 전 머무는 기항만이 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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