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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Jul 13. 2018

나의 여름이, 강릉에 배어 있더라.

우리 함께 걸었던 강릉 어느 바다에서.

 왼 손에 쥔 아이팟의 동그란 휠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연주곡 속 플루트 연주자의 긴장된 숨소리가 귓가에 바짝 다가섭니다. 덕분에 걸음을 뗄 때마다 나던 사그락 거림은 물론 거실 텔레비전의 백색소음마냥 멀찌감치 부서지던 파도소리까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됐습니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흡사 초록빛 진공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 보폭을 한껏 넓혀 걸어 봅니다.


초록빛 진공 속에서, 강릉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이 솔숲에는 아무래도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걷다 보면 자꾸 목적지를 잊게 되거든요. 시야를 가득 채운 아찔한 푸르름, 들숨마다 흠뻑 스며드는 솔 향, 끊임없이 귓바퀴를 간질이는 파도소리 중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취한 듯 자꾸만 휘청이게 돼 방향을 잃은 것도 벌써 여러 번입니다. 나무들 틈 새로 떨어지는 햇살에 주황빛이 제법 비치는 것을 보니 곧 해가 저물겠네요. 그래도 굳이 지도를 꺼내 보고 싶진 않습니다. 걷다 보면 언젠가는 바다에 닿을 테니. 이대로 좀 더 헤매도 상관없겠죠. 

 

 촘촘하게 늘어 선 초록과 구불구불 난 산책로를 사진에 담아 함께 오자는 메시지와 함께 보냈습니다. 언제쯤 이 솔 향까지 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라는 말을 덧붙여. ‘바다 보러 가자.’라는 짧은 독백으로 시작된 반나절 즉흥 여행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솔 향과 파도소리가 있는 산책길, 강릉


“특별히 수고해 주신 것도 있고 해서, 민망한 액수지만 고료를 조금 더 책정했어요.” 


눈먼 돈 오만 원이 생겼습니다. 이유 모를 무기력에 시달리던 차에 걸려온 행운의 전화, 그래서인지 통화를 마치자마자 이 돈을 오늘 꼭 다 써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알차게, 가능하면 기억에도 남도록. 곧 머리 위로 몇몇 단어들이 쏟아졌고, 눈과 코로 점차 좁아지는 관을 통해 걸러지고 남은 세 단어가 입 밖으로 떨어졌습니다. 바다, 커피 그리고 추억.

 운 좋게도 거기 꼭 맞는 곳이 떠올랐습니다. 기억이 맞다면 사, 오 년쯤 전이었어요. 투명에 가까운 쪽빛 바다와 늘어선 카페들 사이 모래사장을 걸었고, 이제 곁에 없는 그녀의 스물아홉 여름과 함께였습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아침 열 시, 가방을 챙겨 곧장 버스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두 이름을 가진 그림 골목

안목항, 강릉.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 건 세 시간 뒤, 덜컹거리는 강릉 시내버스의 창 밖으로 이제 막 파랑이 펼쳐지던 무렵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종점인 안목 해변 정류장에 멈춰 섰고, 해변과 이어진 좁은 골목 입구에서 아슴푸레 그려지는 그 날의 기억과 마주했습니다. 제대로 찾아왔다는 안도의 긴 한숨 직후 짧은 여행은 시작과 동시에 절정을 향해 올랐습니다. 그에 맞춰 심장 박동도 달음박질을 시작했습니다.


그림으로 가득 찬 좁은 골목, 강릉.

 소년은 문이 따로 없는 해안가 마당 너른 집에 살았고, 소녀는 옥색 철대문이 있는 버스 정류장 건넛집에 살았습니다. 둘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어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누구 하나 먼저 말한 적이 없어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죠. 그 시절의 그리움이란 게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라들기는커녕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라 마침내는 두 집 사이를 잇는 작은 골목을 매일같이 서성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우연히 그 혹은 그녀와 마주치는 상상을 하면서요. 그러다 소년은 옥색 철대문 앞, 소녀는 마당의 평상이 보일 듯 말 듯 몇 걸음 거리에 와 있었지만, 결국 이름 한 번 불러 보지 못하고 걸음을 돌리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소녀가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골목 입구에 낯선 그림이 있었습니다. 빨간색과 흰색 등대가 노랗게 익은 노을, 주황색으로 물든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장면이었어요. 그때까지 그렇게 화려한 색의 바다를 본 적 없던 소녀는 한참 동안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 그림이 자신을 위한 선물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붉어진 볼을 한 손으로 감싸고.

 그 후 골목의 그림이 하나씩 늘어났습니다. 등대 그림이 그려진 벽 바로 옆에 그려진 물고기 세 마리 그림을 시작으로 거북과 문어, 고깃배, 소나무까지. 새로운 그림을 따라 매일 골목 안쪽을 살펴보는 것이 어느새 소녀의 아침 일과가 됐죠. 보름쯤 지난 후 어김없이 새 그림을 찾아 골목 안쪽으로 들어선 소녀 눈에 띈 것은 벽을 가득 메운 물고기 떼였습니다. 물고기 떼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던 소녀는 어느덧 골목 끝에 다다랐고, 그 끝엔 자신을 닮은 여자 아이가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그리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 옆에 서 있는 그림을 보자 소녀는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보았거든요. 

이전까지 바닷가 사람들에겐 버스 타는 골목, 안쪽 마을 사람들에겐 바다로 가는 골목으로 불리던 좁고 짧은 길은 그렇게 그림 골목이란 새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백 미터나 겨우 될까요, 안목 버스 종점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그림 골목에 가득한 이야기들에 빠져 엉뚱한 상상에 한참 동안 빠져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재료가 된 그림들을 따라 걷고 멈추길 반복하다 골목길이 끝났음을 알리는 표지판에 다다랐고, 이야기도 결말을 맺었습니다. 아쉬움에 몸을 뒤로 돌려 버스 타는 그림 골목으로 다시 한번 들어서려던 찰나, 멀찍이 솟은 건물들 사이 좁은 틈으로 파랗게 펴 바른 바다 조각이 보입니다. 어느샌가 잊고 있던 여행의 목적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나는 바다가 그리워 온 거였지.’


안목 해변의 오후

오후의 안목 해변, 강릉.

 고작 노래 몇 곡이 흐르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풍경은 몇 번이고 감동적인 장면들을 빚어 시선 앞에 내려놓습니다. 맨발로 바다에 발을 담그며 즐거워하는 스무 살 언저리의 청춘들, 말없이 나란히 걷다 문득 동시에 멈춰 서서 바다를 보는 벗, 닿을 듯 말듯한 거리가 여러 가지를 짐작케 하는 사랑하는 연인의 어깨, 가만히 바다를 응시할 핑계로 낚싯대를 드리운 듯한 중년 남성의 여유로운 뒷모습. 문득 그중 하나로 해변에 앉아 있다는 것이 벅차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어요. “어쩌면 이 모두가 떠나왔기에 가질 수 있는 것들일 거야.” 

 두어 시간 전, 그림 골목을 빠져나와 안목 해변을 보았을 땐 이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싶어 스스로가 대견하기까지 했어요. 곧장 잰걸음으로 모래사장을 휘휘 젓기 시작해, 부둣길 끝 등대까지 제법 긴 걸음을 이었습니다.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마주 선 안목항 풍경이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정겹기도 했죠. 아마 그 장면이 아니었다면 오 년만에 다시 이 해변을 찾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부두에서 다시 모래사장으로 돌아온 후엔 탈탈 털어 내용물을 비운 가방을 모래 위에 깔고 앉아 남은 오후를 보냈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한 후로는 잘 듣지 않게 된 오래된 아이팟에서 흘러나오는, 그 언젠가 듣던 음악들은 파도 소리와 그럴싸한 조화를 이뤄 마음에 들고 나기를 반복했고, 그동안 눈은 내내 바다를 향해 있었습니다.  


아늑한 설렘. 

 바다를 마주한 채 느낀 감정은 한동안 잊고 있던 낯선 도시에서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된 후 여행에 이런저런 목적들과 내 것이 아닌 이야기들을 하나씩 붙였던 시기가 있었고, 무언가를 얻거나 만들어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여행은 차라리 떠나지 않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럴듯한 핑계로 주저앉아 다시 겁 많은 가짜 어른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무기력의 이유가 아니었을까,라고 털어놓아 봅니다.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한 마디로 시작된 즉흥 여행은 기대보다 훨씬 더 큰 위로가 됐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강릉.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카페들 중 바다와 가장 가까워 보이는 곳을 선택했습니다. 요즘 SNS에 올라오는 모던한 인테리어는 확실히 아닌 데다, 어딘가 미사리의 옛날식 카페 느낌도 나는 것이 최근에 들어선 곳은 아니지만 바다가 잘 보일 것 같은 창가 좌석이 탐났어요. 삼천 육백 원이었나, 가장 저렴한 하우스 블렌드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나니 그제야 아침으로 먹은 바나나 한 개 외에는 종일 굶었다는 것이 떠올라 수플레 케이크 한 조각을 추가했습니다. 오 만원 짜리 한 장 들고 시작한 여행에선 한참을 고민해야 했던, 제법 큰 사치였어요. 

 사람이 많지 않은 평일 오후, 3층 창가 4인 좌석을 독차지하고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최대한 편한 자세로 창 밖에 펼쳐진 해변을 바라보았습니다. 모래사장 방향으로 손가락을 들어 조금 전까지 앉아있던 지점을 찾아보기도 하고요. 해변이 아직 사람들로 붐비지 않는 것, 부두며 골목들이 그때와 다르지 않은 것 모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았을 때도 변함없기를 기대할 수 있으니까. 지인들에게 ‘커피 마시러 강릉 왔어.’라고 한바탕 거드름을 부리고 나서 적당히 식은 커피를 마셔봅니다. 따뜻하고 구수해서 어르신들이 드시기 좋을 것 같은 커피는 사실 여기까지 찾아 올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려놓은 오렌지 색 컵 너머로 보이는 오션 뷰에 이 정도야 뭐 아무래도 괜찮다 싶더라고요. 


시간을 보니 벌써 여섯 시. 사실 안목 해변에 도착한 순간 여행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아니 그보다 전에 강릉행 버스의 탁한 창 너머 풍경을 보며 한 상상들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밤바다를 보고 돌아가면 더 좋을 것 같더군요. 걸어서 한 시간쯤 걸린다기에 그러기로 했습니다. 또 언제 이렇게 한가하게 해안가를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한동안 파도가 그립지 않게 실컷 보고 들으려고요.



밤바다

강릉의 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솔숲에서 마침내 빠져나와 저 멀리 반쯤 숨은 해를 따라 걸었습니다. 경포대에 도착할 즈음하여 해는 완전히 사라졌고, 바다와 파도는 암흑 속에 가려져 소리로만 남았습니다.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 반나절 짧은 여행의 종착점입니다. 버스 시간표를 검색해 보니 서울로 가는 버스는 이제 두 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되는 게 여행의 매력일 지도 모르겠어요.

 아침까지만 해도 제가 강릉 해변에 앉아 신발 속 모래를 털며 오후를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간 갈 곳 없이 헤매던 마음도 이제 좀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니 가끔 이렇게 이런저런 핑계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순히 다녀오기만 하는 것으로 뭐가 달라지겠냐 싶었는데, 역시 일단 떠나면 뭐든 생기는 것이 여행인가 봅니다. 커피 마시러 강릉에 다녀온 오늘 이 사치스런 짧은 여행 이야기를 종종 하게 될 것 같으니 말예요. 제목은 ‘한 번쯤 무작정 떠나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정도로 지으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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